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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대소동, 열려라! 현관문!

위대한 문명 속, 게으른 자의 반성문

by 아보카도

삐삐--삐삐 이이 이---


건전지를 바꿔달라는 현관문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한 건 사나흘 남짓 되었다. 집을 나설 때마다 울려대는 이 소리에 멈칫했지만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잊고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비번을 눌렀다.


띠리릭


분명히 열려야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열려라 참깨! 외쳐봐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비번이 틀렸나? 하고 다시 입력해 보았다. 그런데도 문이 열리지 않는 게 아닌가! 눈 앞이 까마득해졌다. 한쪽 귀에서는 구창모의 '문을 열어~ 마음의 문을 열어~' 가 들려올락 말락, 입술은 바짝바짝 타오른다. 일단 내 눈에 보이는 1588로 시작하는 문 수리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렸고 다시 전화를 끊었다. 문득 어딘가에서 들었던 사연이 떠올랐다. 방전된 현관문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112에 전화를 걸었더니 당직을 서던 순경분이 편의점에 가서 9V짜리 건전지를 사면 된다고 토닥여 주었다는 훈훈한 사연.


'현관문 건전지 방전'


구글에 딱 세 글자 검색했더니 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의 소중한 후기가 좌르르 보이는 게 아닌가. 하나를 냉큼 클릭하고 곧바로 편의점으로 내달렸다. 역시나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편의점 아주머니께서는 9V짜리 건전지를 꺼내 주셨다. 난생처음 보는 네모난 건전지였다.


'네가 오늘 나의 구세주구나.'


하마터면 건전지와 입맞춤할 뻔했다. 매서운 추위에 발그스름해진 두 뺨을 붙잡고 안도했다. 30초만 건전지를 대고 나서 비번을 입력하면 굳건히 닫혔던 문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30초를 대고 나서 비번을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플러스 단자와 마이너스 단자를 거꾸로 착각했다기보다는 내 현관문 비번을 누르는 곳에는 구멍이 두 개가 보이질 않았다. 억지로 비좁은 공간에 건전지를 들이대 보았다. 양 백 마리 세듯 마음속으로 30초를 세는데 그 시간은 요 근래 느낀 가장 긴 시간이었다. 1차 시도 실패 이후 2차 시도를 하는데도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다. 다시 한번 더 초조해졌다. 오늘 옷도 얇게 입었는데 제발 문아, 열리면 안 되겠니? 애원을 해 보아도 철옹성 같은 문은 무반응이었다. 미지근했던 손에서는 냉기가 느껴졌고 요즘 같은 시국에 복도에서 기침을 했다가는 큰 일 날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더 숨을 내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유심히 현관문을 들여다보았다. 비번을 누르는 익숙한 곳이 아닌 밑 부분을 보니 구멍 두 개가 보이는 게 아닌가! 조금 과장해서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부리나케 착 하고 건전지를 갖다 대었더니 힘없는 띠띠띠 소리가 아니라 램프의 요정 벨소리 같은 슈류링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숨을 한 번 더 고른 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다행히 문은 열렸고 냉큼 건전지 네 개를 새로 갈아 끼웠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던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버트런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해 찬양했지만 나 같은 베짱이는 '부지런함에 대한 찬양' 이란 책이 나온다면 읽어야 하는 게으른 인간이다. 삐삐삐가 처음 울렸던 그 순간에 냉큼 건전지만 바꿨다면 초조함을 느낄 일도, 한밤중에 편의점에 달려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개미가 되지 못해 베짱 거리는 베짱이는 한겨울에 베짱 베짱 하고 웁니다.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정할 필요는 없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겠다. 한겨울에 폰이 방전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라고 쓰고 있지만 단번에 답이 떠올랐다. 편의점에 가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서 충전을 하고 차가워진 몸을 온기로 녹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머니께 나의 사정을 말씀드리면 친절하게 9V짜리 건전지를 건네주실 것이고 충전된 폰으로 페이코 앱을 열고 결제를 하겠지. 에이 너무 간단하잖아. 다시 한번 더 느낀다. 기술문명의 위대함을.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놀라운 세상에 다시 한번 더 감사하며 베짱이는 그저 게으름을 다시 한번 더 반성할 뿐이다. 나와 같은 게으른 자들이여, 당황하지 말고 편의점으로 달려가면 만사 해결됩니다.


덧, 어릴 때 비번을 누르지 않고 열쇠를 들고 다녀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열쇠는 없고 집에 아무도 없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기에 경비원 할아버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경비실에는 텔레비전이 있었고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보면 엄마가 '어이구!' 하는 표정을 지으며 경비실 앞을 지나갔고 나는 쭈굴쭈굴 표정을 짓고 엄마를 쫄쫄 쫄 따라가곤 했다. 독설을 서슴지 않는 우리 엄마는 늘 블라블라 말씀하셨고 나는 귓등으로 이야기를 흘려듣고는 내 방 책상 위에 놓인 열쇠를 보며 아침에 부리나케 집을 나서던 내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도 아차 싶었다. 지금처럼. 그러고 보니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 살기 좋은 이 편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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