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폭력성 ② 화가와 피사체
이전 포스트에서는 시각이 이성중심적인 서구 철학사에서 다른 감각들에 비해 특권적인 위치를 누려 왔다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시각은 다른 감각들과 다르게 관찰자와 대상 사이에 거리를 설정하고 '합리적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의 특권은 대상을 향한 감정적인 이입을 차단하고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 (보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이성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폭력적인 위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발생한 것이 문명화란 명목으로 무분별한 과학 기술을 통해 유색인종과 자연을 지배한 백인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폭력성이라는 관점에서 시각 문화가 대변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뿌리 깊은 남성중심주의 사상입니다.
시각 문화는 전통적으로 남성 권력과 결합되어 작동해 왔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요. 첫 번째, 시각은 남성에 비해 여성을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프로이트와 같은 서양 철학자들이 생식기의 가시성에 기초하여 여성을 비(非)남성으로 구분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죠. 겉으로 돌출된 남성 생식기에 비해 여성 생식기는 대담하게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닙니다. 여성은 남성에게는 '있는 것'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여성이 하는 특징적인 행동에는 대부분 남근 선망이라는 정신분석학 해석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사상가 뤼스 이리가레의 촉각 중심적 페미니즘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기인합니다. 이리가레는 남성중심적인 시각 문화가 여성을 무시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시각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 체계로서 촉각을 제시했죠. 그녀는 여성의 음순과 질 입구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은 방식으로 경험된다고 말하면서 여성의 몸을 '이성'과 대비되는 '감각'을 중심으로 재정의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시각은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고 소비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해 왔습니다. 페미니즘적 비평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메일 게이즈(Male Gaze)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로 예술 작품에서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포착하고 묘사하는 시선을 이르는 말인데요.
1985년, 뉴욕에서 결성된 익명의 예술가 모임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는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를 패러디하면서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벗어야 하는가?(Do women have to be naked to get into the Met. Museum?)"라는 포스터를 내걸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은 5%밖에 걸려 있지 않은 반면, 누드화의 85%가 여성을 소재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녀들이 패러디한 <오달리스크>의 원본을 봅시다. <오달리스크>는 여성을 실제와 다르게 왜곡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메일 게이즈가 굉장히 노골적으로 반영된 작품입니다. 우선 오달리스크는 오스만 제국 황제가 거느리는 후궁들은 가리키는데요. 본래는 시중을 드는 궁정 시녀를 의미했었으나 할렘 문화에 대한 유럽의 오리엔탈리즘 환상으로 인해 뜻이 변형되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침대에 비스듬이 누워 옆가슴이 보이도록 몸을 틀고 옷을 벗는 그녀는 마치 관람객의 관음을 허락하는 듯이 오묘한 웃음을 걸치고 화면 너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체 누가 옷을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벗는단 말인가요? 이 오달리스크 모티프는 앵그르의 작품 이후 나체화의 주요한 테마로 남아 들라크루아, 르누아르, 마티스 등 여러 미술가들에게 변주되었고, 우리는 그 관능적이고 왜곡된 누드 이미지로부터 예술사에 뿌리박힌 남성 특권의 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시각이 우월한 주체인 남성과 열등한 대상인 여성을 분리함으로써 여성을 영구하게 타자화시키는 감각 체계라면, 시각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의 불공평한 권력 관계를 허물어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초상화 화가 '마리안느'가 백작 부인으로부터 딸 '엘로이즈'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마리안느가 의뢰 받은 것은 결혼에 쓰이는 초상화인데요. 엘로이즈가 결혼을 거부하고 있어서 마리안느는 대신 그녀를 관찰하며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여성 화가와 여성 모델인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구도는 이질적입니다. 시각의 남성중심주의적인 질서에 따르면 무언가를 보는 주체는 남성으로 설정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데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사이에는 거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성 간의 동질성을 갖고 있고(일단 외적인 부분부터요. 그들은 색만 다른 허리를 조인 드레스를 입고 있죠. 침대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로맨틱 포스터는 데칼코마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서로의 위치에 감정적인 대입을 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작중에서 엘로이즈의 '산책 친구'를 가장하여 그녀와 함께 다니던 마리안느는 점점 엘로이즈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엘로이즈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는지도요. 초상화를 완성한 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을 못 이겨 결국 그녀의 곁에 있게 된 진짜 목적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완성한 초상화를 보여주는데요.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그게 진짜로 당신이 본 내 모습이냐고 묻습니다.
마리안느 :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 이념이 있어요.
엘로이즈 : 생명력은 없나요? 존재감도?
마리안느 :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엘로이즈 : 그렇지 않아요.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어요.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엘로이즈가 보기에 마리안느의 초상화는 생명력이나 존재감, 감정이 있는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닌 왜곡된 이미지로 재현된 것입니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새로 그리기로 합니다.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권력 질서가 무화되는 데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보는 사람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예술 작품에 보이는 대상, 즉 엘로이즈 본인의 의견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죠. 새로 그리는 초상화 모델을 서 주면서 엘로이즈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마리안느 : 당신은 당황스러울 때는 입술을 깨물죠. 화가 날 때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요.
엘로이즈 : 다 아는군요.
마리안느 : 미안해요, 나였어도 그 위치 싫었을 거예요.
엘로이즈 :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당신은 이마를 만져요.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이 올라가죠. 당황할 때는 입으로 숨을 쉬고.
마리안느는 화가가 일방적으로 모델을 관찰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엘로이즈 또한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사소한 습관을 알아챈 것처럼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라는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거예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작품 전반에 오르페우스 신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보는 남성'과 '보이는 여성'의 원형이 나타나는 비극적인 내러티브입니다. 음유시인인 오르페우스는 불행한 사고로 인해 아내 에우리디케와 사별을 맞게 됩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향했고, 명계의 왕인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에 감명을 받아 에우리디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죠. 바로 저승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 나가다가도 일을 그르치는 걸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답게 이승에 다다랐을 때쯤 아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했던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았고, 다리를 절면서 따라오던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7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비탄에 젖게 됩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현대까지도 구전되며 여러 해석을 낳았지요. 신과의 약속을 의심으로 인해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의 절대적인 가치 등등….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나타나는 세 여자들도 이 비극적인 신화를 둘러싸고 각자의 생각을 내놓습니다.
하녀 소피의 평가는 "이해할 수 없다"입니다. 그 순간을 참았더라면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잃지 았았을 겁니다. 비극적 서사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감상입니다. 한편, 마리안느는 이런 해석을 내놓습니다.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이었다"고요. 오르페우스가 오직 연인의 정체성만을 갖고 있었다면 저승의 정언 명령을 지킬 수도 있었겠지만, 규칙을 전복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쫓는 것은 예술가의 성질입니다. 화가다운 해석이군요.
그렇다면 엘로이즈는 어떨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 봐요!"
오르페우스 신화를 접할 때, 사실 저는 에우리디케에게 집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신화 속에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로 인해 규정된 예술가의 뮤즈일 뿐이니까요. 그녀가 뱀에 물려 죽고, 다시 되살아날 기회를 얻고, 그리고 또 다시 저승으로 잡혀가는 일련의 서사 속에서 '보여졌던' 에우리디케의 선택과 욕망을 엿볼 행간이라곤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에우리디케가 먼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 봐요!'라는 말을 건넸던 거라면요? 인상적인 것은, 이 해석이 영화에서 초상화의 피사체가 된 엘로이즈에게서 나왔다는 겁니다.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동성인 두 사람의 사랑은 인정받지 못할 뿐더러 엘로이즈에게는 이미 혼약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결국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완성한 마리안느가 그녀와 헤어지는 것으로 끝나게 되죠. 그러나 문 밖을 나서려는 마리안느의 뒤로 들려온 목소리가 있습니다. "뒤돌아 봐."
마리안느가 뒤를 돌아보면, 마치 저승을 배경으로 서 있는 에우리디케처럼 흰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가 보입니다. 두 사람은 슬픈 이별을 맞이했지만 적어도 마리안느와의 대등한 만남 속에서 엘로이즈는 왜곡된 초상화로 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두 가지 초상화와 함께 포스트를 마치겠습니다. 뺨이 불그스름하고 상냥한미소를 띤 왼쪽 그림과 다르게, 냉정한 얼굴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오른쪽 그림에서 엘로이즈의 깊고 우묵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