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렸다. 훅하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아, 좋다.”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씻고 난 뒤 방문 앞에 벗어둔 옷을 입었다. 한번 게워내서 그런지 속이 부대끼는 건 줄어들었지만 머리가 여전히 아팠다. 윗옷을 입을 때 몇 번 얼굴을 찡그렸다. 옷을 다 입고 소파에 앉았다. 몸을 깊게 집어넣고 생각을 했다. 밥을 먹을까, 말까. 뭐 먹을 게 있나? 어제 아침은 어떻게 했더라? 먹었나? 냉장고 열까? 뭘 먹을 속이 아니었다.
“그래, 출근이나 하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40층에서 내려온다. 39, 38, 37, 36, 35, 34, 33, 32, 31, 30, 29, 28, 27, 땡. 문이 열리자 오른발을 집어넣었다.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기운에 머리가 흔들렸다. 가라앉았던 욕지기도 올라오는 것 같았다. 손잡이를 굳게 잡았다.
“타지 마라. 타지 마라.”
땡. 18층에서 섰다. 여자가 들어왔다. 짙게 향수 냄새가 풍겼다. 이를 악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욕지기가 목구멍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 주먹에 힘줄이 돋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냄새가 너무 진했다. 머리에서 몸통으로 다시 다리로 충격이 이어졌다. 오른발 발목이 꺾였다. 미끄러지면서 손잡이에 어깨가 걸렸다.
“어이, 아....”
같이 타고 있는 여자가 눈길을 주더니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혐오스럽고 가소롭다는 눈길이었다. 몸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새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고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흡....”
고개를 바로 세우고 다리를 고정시켰다. 정면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구석에 있던 여자가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그 바람에 향수 냄새가 펄럭였다. 숨을 멈추고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 아파트 현관을 벗어나 숨을 내뱉였다. 왼손 팔뚝으로 입가를 훔치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화단을 향해 서서 기지개를 켰다. 하나, 둘, 셋.
“가자.”
신선한 바람 탓인지 아까 올라왔던 욕지기가 사라졌고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을 보고 걸었다. 매일 걷는 길을 걸어 정류장에 섰다. 고개를 들었다. 버스 기다리는 줄이 짧았다. 짧게 숨을 내뱉었다. 언제 버스가 오는지 왼쪽에 있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2분 뒤였다.
“와우.”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스마트폰에 꽂았다. 무얼 들을까. 라디오? 음악파일? 이렇게 정신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남이 틀어주는 거 듣는 게 상책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보낼 수 있다. 라디오를 켜려고 하는데 버스가 왔다.
“끽, 척척척....”
“자리 5개 남았습니다.”
버스 기사님이 남은 좌석수를 알려주었다. 앞에 4명이 있었다. 탈 수 있구나. 스마트폰을 가방에 쑤셔 넣고 차에 올랐다. 기사님 바로 뒤에 빈자리가 있었다. 선호하는 자리였다. 생각보다 넓고 편한 자리였다. 운이 따르는 거 같았다.
“저, 자리에 앉겠습니다.”
자는 척 움직이지 않았다. 가방을 옆자리에 올려놓고 비키지 않는다. 안 자는 게 분명한데 모른 척한다. 오른 다리를 쑤셔 넣었다.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다리를 치웠다. 앉을자리에 가방이 그대로다. 가방을 옆으로 밀고 자리에 앉았다. 신경 쓰지 말자. 자야 한다. 앞으로 1시간 그냥 자는 거다.
가방에 있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라디오를 틀었다. 주파수는 언제나 93.9㎒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9784님의 사연입니다. 언제나 좋은 음악을 틀어주는 DJ님께 감사드려요. 과연 될까 노래 신청합니다. 꼭 틀어주세요. 신청곡은 스타세일러(Starsailor)의 ‘Alcoholic’입니다.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9784님의 신청곡 틀어드리겠습니다. 스타세일러의 ‘Alcoholic’입니다.”
Alcoholic, 뭐야. 아침부터 누가 이런 노래를 신청해. 이런.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불편했다.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고 심호흡을 했다.
“후, 후.....”
술 냄새가 났다. 오른손으로 냄새를 날려 보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으, 으. 으음.”
깼다. 머리가 무거웠다.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얼마나 지났지. 밖을 보니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멍하니 쳐다보았다. 꿈쩍거리기 싫었다. 라디오는 계속 소리를 흘려보냈다. 광고가 끝나고 노래가 나왔다. 신데렐라(Cinderella)의 ‘Somebody Save Me’였다. 아침에 이런 노래를 튼단 말이야. 왜 이런 노래를 틀지. 누가 신청한 거야 제작진에서 고를 거야. 라디오에서 이 노래 듣는 거 처음인데. 희한한 일이다. 소리를 조금 키웠다.
“윽.....”
머리가 울렸다. 이어폰을 뺐다. 왼손으로 뒤통수를 잡았다. 좋지 않아. 두통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어폰은 여전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왼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후.”
눈을 감고 있는데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귀를 기울였다. 알 것 같은 데 입에서 맴돌았다. 소리가 조금만 크면 좋을 텐데. 이어폰으로 고개를 숙였다. 분명히 아는 노래였다. 더 몸을 구부렸다. 답답했다. 분명히 아는 노래인데. 잘 들리면 좋겠는데. 소리에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왼손이 툭 허벅지로 떨어졌다. 이어폰이 만져졌다. 귀에 꽂았다. 잘 들렸다. 오른손으로 남은 다른 한쪽을 귀에 집어넣었다. 이제야 노래가 제대로 들렸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노래가 끝나버렸다. DJ가 나왔다.
“잘 들었습니다. 대구에 사신다는 2169님이 신청하신 곡이죠. 이유진의 ‘눈물 한방울로 사랑은 시작되고’이었습니다. 노래가 나가는 중에 많은 분들이 사연을 올려주셨습니다. 1425님은 첫사랑이 생각나요 해주셨고요. 서울 방배동의 김지순님께서 저 이유진씨 옆집에 살았습니다. 인사도 하곤 했습니다. 아, 재미있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문자를 남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2169님께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지지지이이이....”
터널에 들어섰다. 왜 이어폰 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바본가. 이어폰 집어 끼면 될 걸 고개를 숙이다니. 술이 문젠가. 고개를 설레설레 지었다. 터널을 지나자 DJ가 나타났다.
“도 두 번의 기회를 주었다고 합니다. 축하해주세요.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6372님이 사연 남기셨는데요. 저도 그런, 지지지이이이....”
터널이 이어졌다.
“시기 바랍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신청하신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Tunnel Of Love’ 들으시죠.”
우연인가. 감시당하는 건가.
“쳇”
버스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30분을 더 가야 했다. 출근시간도 넉넉했다.
“후.”
가만히 앉아있으니 속도 괜찮고 두통도 덜하다. 움직일 때 울리기는 하지만 이제 참을 만했다. 아까 토했던 게 효과가 있긴 있는 거 같다. 버스에서 욕지기나면 고역인데 다행이었다. 버스에서 배 아프고 욕지기 올라오면 끝장이다. 식은땀이 절로 난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식품 호박식혜 제공 30분 교통정보입니다. 이 시각 강변북로가 꽉 막혔습니다. 원효대교와 한강대교 양 방면 사고가 있었습니다. 차들이 40분째 꼼작하지 못합니다. 우회로로 빠져 나가기도 힘듭니다. 이 소식 듣는 운전자께서는 강변북로 말고 다른 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소식이 들어왔는데요. 원효대교 양 방면 각각 40 충돌, 50 충돌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각별히 주의하시....”
잠이 들었다. 고개가 꺾였다. 가방 위로 양손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자고 있었지만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씨는 다소 흐리고 곳에 따라 소나기가 내릴 수 있습니다. 출근하실 때 우산 챙기시기 바랍니다. 날씨였습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였습니다. 왁스의 ‘지하철을 타고’를 듣고 잠시 후 만나 뵙겠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왠지 꿀꿀해.
내 전용 자가용 지하철을 타고.
약수역 금호역 다리 건너 압구정에 내려
이 동네 분위기 부담스러워
다시 또 반대편 지하철을 타고
2호선 갈.’
('지하철을 타고' 가사에서)
“헉.”
옆자리가 비었다.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여기가 어딘가. 창밖으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낯설었다. 처음 보는 느낌. 상체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런, 내릴 곳을 지나쳐왔다. 어디인지 감이 안 왔다. 급히 일어났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두통이 일었다. 식은땀이 왼쪽 관자놀이로 흘렀다. 무릎이 꺾일 지경이었다. 엉거주춤 뒷문을 향했다. 교통카드를 찍고 벨을 눌렀다. 두통이 조금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이를 악 다물고 버텼다. 문이 열렸다. 오른발을 내딛는데 욕지기가 올라왔다. 금방 입이 한가득 되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귀가 멍했다. 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고개를 흔들며 왼발에 힘을 주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른발을 문밖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