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2)- 읽기

by 초록 라디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제목이 [나는 좀비를 만났다]였다. 지난번 빌린 [권력의 분립]을 반납하고 가져온 책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왼쪽 위로 흰 글씨의 ‘나는 좀비를 만났다’가 보였다. 무슨 내용일까? 제목 옆에 아마존 베스트셀러라고 쓰여 있는 데 진짜 일까? 지은이가 웨이드 데이비스, 처음 보는 작가다. 재미있을까? 책을 뒤집었다. 인류 최고의 미스터리, 좀비를 파헤친다. 탐사 다큐멘터리란, 이런 것이다. 소설이 아니었구나. 소설 쪽에 있어 집었는데 소설이 아니었다. 다큐멘터리였다. 좀비의 실체를 파헤치는 다큐멘터리였다.

“뭐 이런 책이 있어. 진짜 다큐란 말이지.”

읽기에 앞서 심호흡을 했다.

“후, 후, 후.”

경험으로 봤을 때 다큐멘터리 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오는 장면마다 설명이 있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리를 채워 넣는다. 한 페이지 나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책을 펼쳤다.

“시작.”

첫 페이지를 어렵지 않게 넘겼다. 탄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흐름이 끓기면 다시 찾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특히 서술이 주를 이루는 책에서 흐름은 중요하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눈이 부릅떠졌다. 어렵지 않게 1장을 끝냈다. 주인공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2장, 3장 들어가자 책의 본성이 나타났다. 이제 됐어, 그만 읽어, 주문을 걸었다. 여기까지 봤으면 됐어, 쉬어, 유혹을 걸었다. 아직 이 책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본격적으로 방해가 시작됐다. 한번 시작하면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는다. 쭉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나오면 잽싸게 파고든다. 여기까지, 괜찮아요, 여기까지 한다. 이들의 방해로 맥이 끊기면 책을 접는 경우도 생긴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천 년에 걸쳐 쌓인 기술로 가하는 공격이란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습게 보고 콧방귀 뀌었다가는 말 그대로 큰 코 다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 새겨들어야 한다. 우습게 뻗는 주먹이라고 대주다 보면 대자로 뻗게 된다. 본인은 더 읽고 싶은데 책이 거부해 포기하는 경우가 나온다. 그러면 더 이상 그 책을 쳐다보지 않게 된다. 책이 이긴 것이다. 공격이 성공한 셈이다. 가끔 TV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 무엇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이때 펑하고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난 자가 왼쪽으로 가세요 조언한다. 바로 이어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왼쪽 귀에 대고 오른쪽으로 가야지 유혹한다. 여전히 결정을 하지 못하는 누군가. 하얀 옷과 검은 옷이 재잘거린다. 누군가는 혼란에 빠진다. 어디가 왼쪽, 오른쪽인지 인지할 수 없다. 물어본다. 어디가 왼쪽이냐고. 하얀 옷이 머뭇거린다. 검은 옷이 싱긋 웃으며 입을 다문다. 그러면서 오른쪽으로 가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만 읽을까, 80페이지 넘게 읽었네.”

읽었지만 무엇을 읽은 건지 잊어버렸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주저했다. 왜 읽고 있는 거지. 무슨 내용인지, 뭘 쓴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진짜 좀비를 찾으러 가겠다는 건지, 약물을 찾아내겠다는 건지, 아니면 역사탐구를 하겠다는 건지. 좀비의 정체가 밝혀지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답다. 상황 설명이 끊이지 않는다. 걷다가 들이 나오고 산에 오른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산을 내려와 숙소로 향한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가 끝나고 둘, 셋이 연이여 이어진다. 정보는 쌓이는데 검토할 틈이 없다. 갈수록 위태위태했다.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간다. 방해가 시도 때도 없이 간섭한다. 욱 하고 책을 포기할 뻔했다. 노골적으로 들어오는데 기분이 나빴다. 책이 책을 방해하니 혼란스럽다.

“야, 이제 반 읽었네. 이 책 진짜 힘들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좀비가 궁금한 게 아니라 이 책의 끝이 어디인지 좀이 쑤셨다. 좀비가 뭐고, 어떻게 생기고, 해독제가 뭔지 관심대상에서 멀어졌다. 어떻게 하면 빨리 책을 끝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렸다. 힘들게 페이지가 넘어갔다. 좀비의 나라 아이티의 역사가 섬세하게 펼쳐졌다. 그 나라의 구조를 설명했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좀비의 기원을 하나둘씩 캤다. 하지만 진행이 느렸다. 어서 결론을 보고 싶은데, 손에 잡힐 듯 들어온 거 같았는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만약 이 책을 집었을 때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내려놓았을까? 개의치 않고 집었을까? 책을 들었을 때 제목을 봤다. 앞뒤를 훑었고 읽기로 결정을 했다. [나는 좀비를 만났다]가 소설인지, 다큐인지, 수필인지 생각 않고 선택한 것이다. 되풀이해서 ‘소설’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건 변명이었다.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후회를 과거 탓으로 돌리려 하는 건 비겁한 행위였다. 이렇게 할 거면 반납하는 게 속 편하다. 책 때문에 별의별 생각을 다하는구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273페이지, 가자.”

책갈피로 쓰고 있는 중국집 쿠폰을 책상 서랍에 넣었다. 좀 더 모아야 해. 끝내려면 아직 130페이지가 남았다. 읽는다. 읽는다. 최면을 걸었다. 변함없이 간섭이 시작되었다. 눈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안경을 계속 매만지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안경 코받침에서 딸각딸각 소리가 났다. 신경이 쓰였다. 흐름이 좋게 유지하고 있는데 거슬렸다. 서랍에서 안경닦기를 꺼냈다. 안경을 벗어 닦았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결의를 다졌다.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결말이 어떤 식으로 날지 윤곽이 보였다. 주인공은 여전히 마을 곳곳을 다니며 증거를 수집했다. 책 초반 풋풋하고 열의에 찬 모습에서 책 후반 피곤에 절은 인간으로 바뀌었다. 고생을 하긴 했다. 거의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부딪히며 여기까지 온 거다. 좀비를 만났든, 못 만났든 중요한 건 여기까지 온 거다. 370페이지다. 2시간 끊지 않고 읽은 덕이다. 고지가 눈앞이다. 여전히 주인공은 진실에 배가 고픈 모양이다. 집중했다. 어두워 방에 불을 켰다. 잠시 일어나 몸을 풀었다. 엎어놓은 책을 보니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싱긋 웃었다. 어깨를 한 번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내용을 떠올렸다. 한 줄, 두 줄, 탄력을 받았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던 훼방질은 주인공이 집착을 내려놓는 후반에 이르러 눈 녹듯이 사라졌다. 신비하게도 내려놓자 사라져 버렸다. 오른손에 몇 장 집히지 않았다. 집중하자. 오른쪽 페이지에 공백이 있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용어설명이 나왔다. 끝, 끝났다. [나는 좀비를 만났다]를 끝냈다. 얼추 일주일 읽은 거 같았다. 그동안 쌓였던 부담감이 일순간 날아갔다.

“휴.”

이만큼 힘든 책 오랜만이었다. 만연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건 정도가 쌨다. 하지만 내용이 매력적인 책이었다. 다 읽은 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쉬운 탓에 이리저리 살펴보고 펼쳐보기를 되풀이했다. 끝나고 나니 [나는 좀비를 보았다]가 멋져 보였다. 다시 읽을까? 그건 안됩니다.

“띵똥.”

“누구세요?”

“택뱁니다.”

“수고하세요.”

택배가 왔다. 박스를 열자 CD 2장과 책 한 권이 나왔다. 책을 들었다. 묵직했다. 초록색 표지에 흰 글씨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라고 쓰여 있었다.

(출처: 유튜브)
(출처: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