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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Sep 29. 2019

도마 위의 행복

요리 예찬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꽤나 좋아한다. 혼자 살기 때문에 반찬 투정을 부리지 않는 이 친구를 먹여 살리는 일쯤은 많은 품이 들지 않는다.



요리하는 것은 각오가 필요하거나 애써 힘내서 시작해야 할 그런 일이 아니어서 좋다. 그저 편안히 앉아서 오늘 뭘 먹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와의 조합을 떠올려보고, 장을 봐온 후 도마를 두드리고 삶거나 볶으면 되는 일이다.

요리의 과정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게 혼재해있기는 하다. 불 앞에서 뭘 오래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만 재료 다듬는 것은 즐겁다.

도마 위에서 가만가만 음식을 들여다보고 썰 때가 가장 재밌다.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지고 상념이 사라진다. 오직 나와 말갛고 날것의 재료만이 남아있는, 조용한 세계가 좋다. 소리와 감촉, 후각, 모든 감각에만 집중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생각이 많은 내가 아무 생각을 하지 않던 그 순간이 너무 좋았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요리는 내게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는, 자연적인 명상의 시간이었다.






그 도마 위의 시간이 너무도 좋아서, 오래오래 썰 수 있고, 조리에는 손이 덜 가는 요리가 좋다. 재료를 열심히 손질하고 풍덩 넣어서 끓여버리거나 단번에 볶아버리는 것이 내 취향이다. 맛과는 별개로.





처음부터 요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해 먹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귀찮고, 반찬을 다 먹어갈 때 즈음에는 슬슬 부담을 느꼈다. 요리하는 시간이 아깝고, 그저 노동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하다 보니 이젠 요령이 생겨서 손이 많이 가는 요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여유가 없을 땐 시간이 덜 가는 요리를 빠르게 완성해내고, 오래 걸리는 요리는 주말에 시도하는 등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같은 재료라도 좀 더 편하고 내가 선호하는 조리 방법의 요리를 취사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요리에 부담이 줄어서 좀 더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면 나만의 방식을 찾게 된 걸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더 이상 요리가 노동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만약 첫 만남에서 요리를 멀리하게 되고 간편식만 사 먹었다면, 나는 이렇게 도마에서의 행복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맞는 방식을 알게 되면 좋아질 수도 있다는 걸. 어쩌면 나는 처음의 순간만으로 많은 것을 놓쳐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를.


나는 오늘도 도마 앞에서 열심히 재료를 썰고 있다. 도각. 도각. 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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