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며
물건을 사는 것에는 즐거움도 있지만, 불쾌한 소비를 경험하지 않고 싶어 하는 것도 사람의 경향성인 것 같다. 사놓고 후회를 하게 되는 소비에 대한 후회,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에 대한 부담스러움, 자원 낭비에 대한 우려 등.
그래서인지 물건을 사는 것에는 꽤나 신중한 편이다. 미니멀리스트라고 자칭하기는 쑥스럽지만, 소비의 속도가 느린 편이다. 사들이는 속도가 버리는 속도를 추월하지 않도록 항상 조절한다. 쌓이는 건 삽시간이지만 물건을 버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물건은 생각보다 우리의 곁에 오래 머문다. 충동구매로 산 옷도 오래 입으면 5년 이상 나에게 머물러 있게 된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그걸 알기에 필요한 물건이라도 몇 번을 숙고한 후에 구입을 결심한다.
이러한 신중함 덕분에 세일할 시기를 적절히 기다려 구입하는 장점도 있지만, 너무 신중한 탓에 ‘진즉 사서 쓸 걸, 왜 미뤘나’ 싶은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소비 원칙을 정립해보았다.
<물건을 사는 기준>
1. 사는 속도와 버리는 속도의 균형을 맞추자.
사들이기만 하면 짐이 불어나고, 내 관리 영역의 한계를 벗어난다. 버린 만큼만 사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하게 그러긴 힘들기 때문에, 적어도 두 속도를 염두에는 둔다.
2. 사서 끝까지 잘 소비하면 낭비가 아니다.
평소의 소비 경향보다 비싼 가격의 물건을 구입했을 때 조금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어쨌든 사서 끝까지 잘 소비한다면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렴한 가격에 샀더라도 사서 쓰지 않는 물건이 환경적 측면이든 경제적 측면이든 더 낭비라고 생각한다. 이 물건을 잘 샀나 아닌가 따지거나 죄책감을 느낄 시간에 그냥 잘 쓰고 효용을 누리는 것이 낫다.
3. 사서 잘 쓸 거면 구매를 너무 미루지 마라.
소비에 신중한 것도 좋지만, 필요한 부분에까지 너무 신중해질 필요는 없다는 걸 느꼈다. 최근 물걸레 밀대를 샀는데, 그간 왜 힘들게 바닥에 무릎 꿇고 걸레질을 해왔을까 싶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좋은 물건, 필요한 물건은 미루는 것이 오히려 후회를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것에 조금 더 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잘 버리는 편인 나에게도 버리는 원칙이 필요함을 느꼈다. 생각보다 버리는 기준이 애매한 물건도 많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파손된 물건은 폐기하기에 망설임이 없다. 그러나 스스로가 기준을 정해두지 않는다면 폐기하기 애매해지는 물건도 많이 있다. 이불, 베개, 수건, 옷 등은 아예 못 쓰게 될 만큼 낡기를 기다린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특히나 옷은 해지고 찢어질 때까지 입는 것으로 기준을 삼게 되면, 옷 한 벌이 못 쓰게 될 때까지 수년이 걸린다. 그러면 내 소비 원칙에 따르면, 하나 버려야 하나를 살 수 있기 때문에 새 옷을 사려면 수년의 헤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버리는 속도에 맞추려면 너무 긴 시간이 지나야 한다.
따라서 버리는 것에도 기준을 삼을 필요성을 느꼈다.
물건마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에 기준도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옷을 버리는 것을 예로 많이 삼을 것이다.
<물건을 버리는 기준>
1. 제기능을 상실한 물건은 버린다.
옷의 경우에는 자기표현의 기능(심미적 기능)과 실용적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표현의 기능이 상실된 옷은 남들 앞에서 입고 싶지 않은 옷이다. 입었을 때 스스로가 멋지고 괜찮게 느껴지는 옷을 입어야지, 나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위축되는 옷을 입고 싶지는 않다. 유행이 한참 지났거나 내 취향이 변해서 자기표현의 기능이 훼손되었다고 느끼는 옷은 그래도 아직 실용적 기능이 남아있기 때문에 집에서 입는 옷으로 전환한다. 청바지같이 집에서 입기 불편한 옷은 실용적 기능도 크게 없으므로 처분한다.
2. 위생도 생각하라.
옷의 실용적 기능이 다하려면 옷이 삭아서 헤질 때는 되어야 기능을 다했다고 엄밀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정말 몇 년이 걸린다.
하지만 위생도 생각하자. 아직 실용적 기능이 다하지 않았더라도, 옷이 오래되면 아무리 세탁을 해도 위생적 측면에서 버리는 것이 낫다.
3. 향후에도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으면 버리자.
보통 1년을 되돌아봤을 때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은 앞으로도 입을 가능성이 낮으니까 정리하라는 조언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내 기준으로 1년은 조금 박한 느낌이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자기만의 기준으로, 차지하는 공간에 비해 쓰이는 빈도가 현저히 낮거나 앞으로도 쓸 생각이 없는 물건은 버리도록 하자.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나의 하늘색 면남방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샀는데 지금은 잠옷으로 입고 있는 면남방을 보며 버릴까 말까를 고민했다. 이 옷은 햇수로만 6년은 되었다. 내가 가진 옷들 중에서 최고참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고참에 속하는 녀석이다. 낡은 느낌이 나서 바깥에서는 입지 않지만, 집에서 입기는 굉장히 편하다. 하지만 이 옷을 내가 언제 버릴지를 생각하니 아직도 헤지기에는 너무 까마득했다. 질긴 녀석...
나는 솔직히 새 옷을 사고 싶다. 하지만 무언가를 버리지 않고 새 옷을 사면 내 작은 옷장으로는 수용치를 감당할 수 없다. 지금도 꽉 차서 자꾸 옷이 쏟아지고 튀어나오려고 하기에... 내가 옷이 많은 건 아니고 옷장이 작아서 그런데, 그렇다고 옷장을 늘릴 생각은 없다. 그렇게 되면 지금도 충분히 좁은 원룸이 갑갑해질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하나를 버려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다...
이 하늘색 면남방은 실용적인 기능이 남아있어서 버리기가 참 고민이 되었다. 더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기에는 자원낭비,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서 내 신념과 배치가 되어..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준을 정했다. 이 옷은 위생적으로 실용성에서 기능이 낮아졌다고. 의복을 입는 건 청결해야 우리 몸에도 도움을 주는 게 아닌가. 아무리 열심히 세탁을 하고 관리를 해도 이 옷을 입고 소스도 많이 흘리고 묻혔을 거고, 땀도 나고... 세탁만으로는 제거되지 않은 불순물이 누적되었을 거라고 판단하며 속 시원하게 버리기로 결정했다.
멀쩡해 보여서 버리기에 애매한 물건들은 위생적인 기준을 정해서 주기적으로 버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앞으로 애매해 보이는 물건에도 좀 더 과감하게 결단 내릴 수 있을 듯. 뭔가 조기 처분을 합리화하기 위해 쓴 글 같지만.. 어쨌든 기준이 서니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