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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May 31. 2018

무지한 스승을 읽고

- 교육의 기능에 대한 정치적 해석과 교육의 수단화에 대한 단상

[페북 '교육자들' 그룹에서 진행한 읽기 제안 관련해서 쓴 글입니다.]


뜬금없는 독서 후기를 남깁니다. 2월의 책이었던가요? 무지한 스승.

솔직히 다 읽지도 못하고 덮어버렸지만 그중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는 표현에 대한 생각을 짧게나마 써보려고요.


무지한 스승은 지능의 평등을 전제로 한 모든 이들의 교육기회 및 결과의 평등을 말하고 있다고 전 독해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는 문장이라고 이해하였고요. 곧 배움의 기술 이전에 배움의 근원적 능력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지만 그런 근원적 능력을 재단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교육을 이용한다는 비판 지점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는 개별 현상들의 상이함이 있어 보이나 그 개별 현상조차도 보편적 원리에 포섭되며 그러한 원리의 작동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개별적 전체는 곧 보편적 전체와 같다는 논리구조로 전 이해했어요.


그러한 논리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의 지적 능력의 차이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의 차이로 연동되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러한 지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나 역학이 요구하는 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불평등의 이유에 대한 변명이 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결국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는 논리의 핵심은 지적 해방이라기보단 지적 평등이라는 출발점의 필요성에 있다고 보았어요. 그렇게 읽다 보니 교육의 수단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교육의 수단화는 어쩌면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럼에도 교육을 수단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방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교육을 통해 배우는 자들을 자신들의 지향의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설프게 든 생각은 공교육의 측면에서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는 주장이 수용된다는 것은 공교육 무용론과 연결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반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도 떠올랐습니다. 교육을 부정하지 않지만 공교육은 부정하는 듯한 그의 주장에 이런저런 변명 섞인 항변도 떠올랐고, 한편으로는 교육과 공교육에 대해서 새롭게 볼 수 있어서 수용할만한 지점도 많았기 때문인 듯해요. 왠지 랑시에르의 주장의 일면이 일리치와도 연결이 되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공교육에 있는 입장에서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에 대한 항변을 써보며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공교육은 그 @의 전체에 있지만 전체에 있지 못한 부분들, 어쩌면 구체적 삶의 기술들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요. 이 부분은 생각의 단초만 있을 뿐 그 이상 생각을 밀고 나가지는 못했던 부분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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