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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Feb 22. 2018

윤리적인 교사로 살 수 있을까?

교사로 산다는 것(조너던 코즐)을 읽고

이 책 좋다!


쉽게 읽히면서도 방향이 내가 뭘까?라고 궁금해하던 그 지향을 향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 안에서 일하라

어떻게?


그 어떻게를 시대와 지역의 차이는 존재하나 시사점과 아이디어를 곳곳에서 제공하고 있다. 단순히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행정단위 최말단의 공무원(사실 사립에 있는 나는 공무원 아닌 공무원인 준공무원이란 분류에 속하나) 역할로만 강제되는 현실적 제약, 조건 안에서의 집행자 수준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방법론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기본적인 관점, 사유의 전환 혹은 심화의 기제들도 곳곳에 있다.


파커 J 파머와 비슷하게도 읽히나 다르다. 파머의 약간은 종교적 바탕(영성이라는 것이 딱히 종교적이라 말할 수 없을 진 몰라도)에 둔 생각과 달리 지극히 현실적이다. 한편으로는 알린스키의 운동에 대한 관점도 이 속에 스며들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책에서 얼핏 말했듯 헨리 소로우의 태도도 스며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느껴지는 사유의 특징은 지극히 中庸에서 말하는 방식이다. 기계적 중립이 왜곡하고 감추는 사실들 속에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편향적인 태도(방향만 정반대인)를 취해서 전체적으로 중용을 확립해가는 과정이 그렇다. 그러한 증용적인 태도는 교실 속 연속적인 만남의 순간에서 일어나는 가르침과 배움의 생동감과 무한히 구성되고 생성되는 새로움(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데서 오는 새로움)을 만드는 과정,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과정의 출발을 도덕적 잣대와 명확한 이분법의 관점 안에서 추상적, 당위적 표현만으로 삼지 않고, 저들의 말을 통해 우리의 의도를 말하고, 진짜 적대시할 존재와 더불어 가야 할 존재를 구분해 내며 동료를 만들어가는 방법들을 제시함이 눈에 띈다. 아래 사진의 문구처럼 '1인칭으로 말하기' 부분부터 시작하여 비밀기록부(우리의 생기부와 유사), 교사용 지도서, 교과서에 대한 관습적 생각들의 외피를 벗겨내준다.

1인칭으로 말하기는 입장없음의 입장을 버리고, 분명한 입장을 세우고 그것을 표현하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한 장, 한 장 속의 내용이 주옥같으나 지금까지 읽은 부분 중 여러 면에서 일종의 바탕이 되는 문장은 아래와 같다.

문제가 될만한 큰 투쟁이면서도 해낼 수 있을 만큼 작은 투쟁 이어야 하는 것이다.(p114)
불공정한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장소는 바로 우리가 서있는 곳이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더 큰 상황'을 조용히 인식하면서 바로 지금, 바로 여기부터 실질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꿈꿀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수단을 써가며 노력해야 한다. (중략) 더 큰 악을 없애기 위해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을 자책감에서 해방시켜 세상을 덜 고통스럽고도 덜 불공평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보람되고 만족스러운 투쟁의 첫걸음이다. 이것이 죄책감과 자유를 구분 짓는 차이다.(p114)

나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되는,

그들의 여기, 지금,의 자각과 행동들.

죄책감을 넘어서 자유로운 존재로 향하는 길을 위한 제안이자, 경험의 나눔을 읽으며 내가 있는 지금, 여기와 그 안에서 나를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서 참여소통교육모임에서 했던 엄기호 샘과의 강연이 떠올랐다. 그때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가 '도덕적 교사'와 '윤리적 교사'라는 말이었다. 김상봉 샘의 호모 에티쿠스를 읽고 강의를 듣는 자리였다. 엄기호 샘의 말을 거의 속기사 수준으로 타이핑하려 했으나 결국 이야기를 내가 이해한 언어로 옮겨 적었던 것 같다. 그 첫번째가 '윤리적 주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푸코에 따르면 도덕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며, 그것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사회이다. 예를 들어 좌측통행은 (공중)도덕이며, 이것은 사회(국가)가 결정하는 것이다.(최근 좌측통행이 우측통행으로 바뀐 것). 도덕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것이며,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도덕적 인간이 되면 윤리로 넘어간다. 윤리란 좋고 나쁨의 문제이며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미국에서 합법화되기 이전까지는 비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 중에서는 윤리적인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친구의 잘못을 교사에게 말해주어야 하는데 말하지 않는 학생은 비도덕적이지만 윤리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인 사람은 사회적 손해를 보지 않는다(개인의 자유, 욕망에 있어서는 손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윤리적인 사람은 사회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도덕적인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달리 말해서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의미를 동반하며, 도덕적인 것을 강조할수록 윤리적인 것과는 멀어지게 될 수 있다. 도덕을 강조할수록 윤리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이 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   20150704 엄기호 샘 강연 노트 기록 중                                

인식의 주체, 지식의 주체로 학생을 교육하는 입장에서는 윤리적 주체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학생은 호기심을 가지는 부류와 두려움을 가지는 부류가 생긴다. 교사로서 두려움을 가진 아이들이 어떻게 호기심을 가지게 하느냐가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이 학교에서는 시험을 본 후 자신이 왜 틀렸는지를 호기심으로 전환하는 소수의 아이들과 무관심하고 두려움을 가지는 다수의 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모르는 것"과 "틀리는 것"을 동일하게 만들어버렸다. 평가가 "모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호기심을 가지면서 가지는 정서는 기쁨(쾌락)을 느끼는' 부류와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두려움을 가지면서 가지는 정서로 슬픔을 느끼는 것' 부류가 있는 것이다. 기쁨은 삶이며, 슬픔은 죽음이다. -   20150704 엄기호 샘 강연 노트 기록 중                                


이후 '윤리적 교사'라는 어휘는 학생들과 만남의 순간에 점점 나를 미명의, 혼돈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래서 사실은 "윤리적 교사 따위 되지 못하겠어!"를 외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더 많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엄기호 샘의 강연이 그런 울림과 두려움을 주었지만 이 책 교사로 산다는 것은 '그럼에도'와 '이런 방식이라면'과 같은 반응을 만들어주었다. 나의 나약함 속에서도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있다는 것을 찾아내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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