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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Jul 03. 2018

이상한 학교의 이상한 선생

교육자보다 직업인이 되어가는 나를 돌아보며

2018-1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김현희/생각비행)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중에서


이 책 첫 장 10년 차 초등교사가 푸는 교육계 미스터리의 문두에 인용된 구절이다. 이 책이 관심을 두는 지점을 표현한 것 같다. 우리는 세상의 거대한 흐름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학교는 그러한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변화를 실감할 수 없다. 학교를 둘러싼 제도, 구조, 사회의 변화에 대응한 겉으로 드러난 변화는 있었지만 정작 학교 안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변화는 없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에 대하여 10년 간 초등교사로 지내왔던 저자의 관찰과 분석이 이 책의 큰 줄기이다.


10년 차 선생님의 생각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도 이상하다. 전자의 경우 이상함에 기여함으로, 후자의 경우는 이상함을 외면함으로 이상하다


크게 교사 문화, 교원 정책, 교육 과정과 방법, 관료제와 학교 민주주의로 구분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상한 선생”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학교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이상한 선생이 실은 이상한 선생이 아닌 것이 가진 이상함에 대한 의뭉스러움을 이야기한다. 그로부터 교사의 직업윤리로써 교육의 수량화 거부와 오지랖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이어서 성과급이나 교대의 교원 양성의 문제점 등 교원 정책에 대한 생각과 학부모의 교육 참여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도덕 교과나 STEAM 교육 등의  교육과정과 교육방법이 아이들에게 어떤 잘못된 영향을 끼치는 지를 분석하면서 지식 교육에 대한 오해를 풀어 설명한다. 그리고 학교 급식 문제와 관련한 학교를 지배하는 관료적 행정 처리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의 교육관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출발은 지식 교육에 대한 것이었으며 지식교육을 출발점으로 교육을 통한 자유로운 시민을 기르고자 하는 교육관을 살필 수 있었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다른 책과 달리 밑줄을 그으면서 읽지 말고 한번에 쭉 읽자고 다짐했다.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의 말과 태도를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기록된 말들을 통해서 저자가 사람과 현상을 대하는 태도를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호흡으로 읽지 못하고 한 달여간 띄엄띄엄 읽어서 전반부의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제목에 나오는 ‘이상한’의 중첩적 의미가 무엇인지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상한 것인지 아닌 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내가 이상한 것은 기존의 학교의 관습을 이해하지 못한 이상함이며, 학교가 이상한 것은 사회적 통념과 직업윤리에 비춰도 이상한 행태와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는 배움과 가르침, 인간적 교감과 교류가 있는 역동성을 읽은 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관료적 기획과 수행을 우선으로 하는 교육적이지 못한 착함에 빠져있다. 그런 가운데 교사들은 교육자로서의 의무감이나 열의보다는 관료, 직업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교육자 개개인의 문제이기 보다는 그 개인이 결정적 영향을 받는 구조적 문제도 한 요인임을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 문제와 더불어 교사 개인의 무관심과 관습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학교와 교사는 학생과 교육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살펴본 저자는 중립적이지 않은 중립적 태도로 학교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분명한 입장을 가지되 반대편 입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종합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태도가 일관되게 보였다. ‘변증법적’인 나아감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몇몇 표현 속에서 ‘중용의 미학’을 읽어볼 수 있었다. 이는 지식 교육이 마치 불필요한 것처럼 대하는 요사이 세태에 대한 비판이나, ‘낭만적 진보 교육’을 지향하는 분들의 태도가 미치는 결과 등에 대한 서술 등에서 드러났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러했지만 정책에 대한 이야기들이나 현상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명확한 입장을 이야기한다. 얼핏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확고한 입장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유연함 사이에서 중립적이되 중립적이지 않음을 본 것은 아닐까 한다. 


분석하고, 비판하고, 사회와 교실을 연결하는 태도. 그리고 그 출발이 되는 관찰과 경청. 이러한 저자의 모습을 보며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지금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이상한 선생이 아닐까? 학교가 이상하지 않은 나는 이미 이상한 선생인지도 모른다. 학교가 희망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학교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불합리들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음은 내 무지의 산물일 수 있다. 아니면 내 무관심의 산물이기도 할 것이다. 학교라는 근대적 교육체계가 변화하는 시점이 점점 다가온다. 그러면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관습과 변화의 틈바구니에서 전혀 불화를 느끼지 않는 내가 가장 이상한 선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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