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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Dec 21. 2018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피에르 자위/위고)

- 여전히 사라지고 싶은 자가 읽기엔 갈등되는 책 



관계의 난망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엄청 낮아진 자존감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 대하는 것이 귀찮아졌고, 무언가 타인 또는 다수 앞에서 말수가 점점 없어졌다. 그런 나에게 페친이자 강연과 공부모임을 통해 뵌 분이 책을 추천해줬다. 일단 제목에 끌림이 있었다. 뭔가 궁금증을 자아내는 제목과 사라지고 싶지 않지만 사라진 듯 존재하고픈 이중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지 못했다. 프랑스 철학자의 번역본이라는 것을. 이건 책을 읽는데 매우 중요하다. 왠만한 공부가 없으면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나은 책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사실 간단한 인상평조차 쓰기가 어려운 책이었다. 첫째 7월에 읽기 시작해서 찔끔찔끔 읽다가 12월에 마쳤기 때문이다. 둘째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드러내지 않기의 계보학적 탐구’ 부분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셋째, 기본적은 배경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 이건 두 번째 이유와도 연결되고 프랑스 번역본 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와도 연관된다. 등장하는 많은 인용 대상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름을 들어본 사람의 의미로써)이 반도 안되니 그들의 주장을 이해할 배경지식이 너무 부족했다.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읽으면서 이해하고 나의 처지를 떠올려볼 때 와닿는 부분들도 있었다. 일단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 또는 저항으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것. ‘모든 것을 감시, 관리, 통제’하는 전체주의가 일상에 끼치는 해악에 대한 경계를 읽으며 그것을 담론으로써가 아니라 관계의 말살이라는 일상적 태도라는 관점을 생각해보았다. 여기서의 전체주의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도 한번 등장하지만 벤담의 파놉티콘(판옵티콘?)이 극대화된 시대를 의미한다. 


비밀도, 미스터리도, 한 점 그림자도 없는 삶, 자기와 타자 사이에나 자기와 자기 사이에 아무런 틈도 없는 삶은 절대적인 무한 공포로 치닫게 마련이고 장기적으로는 우리 안의 인간성을 모조리 말살할 터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1940년대 말에 그 점을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전체의 공포는 모든 인간을 서로가 서로에게 떠밀리게 압박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말살한다.”(p131)


위와 같은 논의들 이전의 대략 앞선 전개가 드러내지 않기의 계보학이어서 위 부분은 그래도 실재성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며 이해를 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그리하여 드러내지 않기는 전체주의적 거시정치의 위협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드러내지 않기의 ‘기술’이라는 명명에 대한 설명과 드러내지 않기의 유일한 질료인 ‘사랑’과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 혹은 지각하는 것”이라는 버클리의 테제에 기반하여 드러내지 않는 영혼이 세계의 존재의 근거가 됨을 말하는 것으로 맺음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한다고 써보면서도 전체적은 흐름과 체계는 전혀 잡히지 않는다. 한 번 읽고 그럴수 있다는 생각의 교만함을 넘어 다시 읽어도 분석적으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이해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후 나에게 남겨진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나에게 ‘드러내지 않기’는 사실 “세계의 생성을 침통하게 관조하는 자세로 물러날 뿐 결코 기다리지 않는(p138)” 태도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드러내지 않기의 올바른 기술이 정확히 아닌 것이 함정이다. 관조와 초탈이 아닌 외면하며 숨기를 하고 있는 나를 알 수 있었다. 드러내지 않기가 아니라 전체에 종속되는 안락함을 얻거나 전체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그냥 맘대로 살고픈 이기심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생의 열정을 얻듯이 드러내지 않기의 모순되는 듯한 효과(?)를 통해 찾아야할 것은 사랑, 내어줌을 통한 채움, 그리고 관조임을 기억해야할 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드러내지 않기의 기술. 정치로써의 그 기술을 난 오해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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