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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Feb 13. 2018

無題

생각 없는 나를 생각하며.. 학생들에게 

일단, 위 제목을 읽을 수 있는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고2 이상인데 그것을 읽지 못하는 학생이 다수이면 그것은 학생 책임도 일정 부분 있겠지만, 한문 교사인 내 책임도 있을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이며, 미안한 일이다. 


 이 글의 제목을 無題로 지은 이유는 이렇다. 교지에 실린 글을 부탁받고 글을 써야지 해놓고는 기한을 넘겨버렸다. 그러고 나서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한 첫 번째 작업은 글감 찾기였다. 글감은 곧 주제이다. 그런데 글감을 찾다 보니 글 쓸 시간이 부족할 거란 생각이 든다. 당장 오늘 글을 넘겨야 한다. 시한이 촉박하다. 그렇게 생각이 뻗치니, 그렇다면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써보자는 합리화를 하게 되었다. 그 방식은 ‘그냥 쓰기’이다. 아니면 ‘생각나는 대로 쓰기’ 정도가 되겠다. 한 때 ‘꼬리에 꼬리를 무는’으로 시작하는 시리즈가 유행한 적이 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글로 표현하기’ 정도가 될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주제가 없다. 글감도 없다. 그냥 쓰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지금의 난 달 수가 없다. 아마 글을 다 쓰고 나면 그래도 제목이라 붙일만한 무언가가 나타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제목은 無題이다. 왜냐하면 글의 내용보다 글을 쓴 방식을 난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23일 금요일 오전 11시부터 약 두 시간 가량 김용훈이라는 인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호기심, 궁금함이 있는 분들은 계속 읽어 가시면 좋겠다. “그때 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난 관심없어!!!”하는 분들은 그만 읽으셔도 된다. 읽기가 조금 불편하거나 불친절한 글이라 생각할 수도 있음을 유념해주시면 좋겠다.



#1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어딘가에서 많이 본 문구가 아닌가? 그렇다. 페이스북을 켜면 입력 창에 뜨는 문구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흔히 일상적으로 하는 표현 중에 “생각 없는”이라는 표현이 있다. 뭔가 멍하고 있거나, 일반적 상식을 벗어난 말과 행동을 했을 경우에 우리는 종종 “생각 없는 녀석”이라는 표현을 쓴다. 혹시 페이스북의 질문에 그냥 이렇게 쓰고 싶지는 않은가? “난 지금 아무 생각 없어요.”


 그런데 과연 ‘생각 없음’의 상태는 가능한가? ‘생각 없음’의 상태는 혹 죽음 또는 죽음과 유사한 의식불명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멀쩡히 숨을 쉬고 있으며, 말을 하고, 행동하는 누군가에게 ‘생각 없음’을 말하는 이유는 무얼까? 또는 스스로가 ‘생각 없음’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모르겠다. 각자 해답을 찾아보시길 권유한다.


 한편 ‘생각 없음’과 달리 ‘생각이 너무 많다’는 표현이 있다. 둘의 상태는 다른 것일까?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과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은 정반대의 말과 행동을 보일까? 그에 대한 대답을 나의 현재 상황에 비추어 말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이 없어요.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 무슨 궤변인가? 그리스 시대의 소피스트도 아니고, 춘추전국시대의 명가도 아니고 이 무슨 말장난인가?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와 그것의 결과는 이렇다. 


“이것저것 헤아리고 걱정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이것을 하려면 저것이 걸리고, 저것을 하려면 이것이 걸린다. 그래서 손해 또는 피해가 최소한인 것을 찾아 선택하려고 하다 보면 또 다른 것이 뜬끔없이 나타나 그 선택조차 최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보니 선택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뭘 해도 어차피 손해이다. 내게 최선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니 생각해봤자 결론은 안 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안나는 것이니 차라리 생각을 하지 말자. 생각해서 결론을 못 내리는 것은 내 능력의 부족 탓이지만, 생각이 없없다면 내 능력과 무관하게 단지 내가 안 한 것뿐이니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생각해서 뭔가 결론을 얻으려는 것보다는 생각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내게 더 유리하다. 따라서 나는 생각이 많지만 생각이 없어야만 한다!”


그렇게 나의 생각의 정리(이 또한 궤변이자 모순이다. 생각이 없어도 정리가 안되고, 생각이 많아도 정리가 안되는데 ‘생각’을 ‘정리’한다니. 나란 인간은 모순덩이 그 자체다)하면 이후 나의 태도, 행동은 결정된다. 생각이 없으니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욕을 먹을 테니 적당히 하는 척을 해야겠다. 결국 난 생각이 많아도, 생각이 없어도 같은 결론으로 도달한다. 


“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욕먹기는 싫으니 하는 척은 해볼게요. 적당히.”


슬픈가? 아니면 안도감이 드는가? 

나의 대답은 “적어도 괴롭지는 않으며, 그냥 그렇게 지낼 만하다.”이다.



#2

“생각 없음”에 대한 생각이 “그냥 적당히 하는 척하면서 사는 게 날 덜 괴롭히고, 그것도 지낼만하다”는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궁금하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아니 더 정확히는 “내 생각은 나의 것인가?”라는 것이 궁금하다. 홍세화 씨가 책과 강연을 통해서 이야기한 질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펼치고 있다. ‘생각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 생각들은 내 것일까? 달리 말하면 내 생각은 내가 만들고 있나? 내가 생각의 주인인가?


“내 생각과 결정의 주인은 나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야기이다. 주체. 좋은 말이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체의 환상에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주체의 의미를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체를 말하면서 우리는 ‘차이’를 먼저 염두에 둔다. ‘나는 너와 달라. 그리고 너와 다른 지점이 바로 나의 주체성이야’라는 인식이 내가, 우리가 가진 주체에 대한 전부가 아닐까? 그러면서 ‘개성’적으로 사는 것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개성’은 다른 말로 앞서 말한 ‘차이’에 기반한 ‘구별 짓기’이다. 혹시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 곧 타자와 구별 짓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광고 카피가 있었다. “모두가 예스라고 말할 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문구가 주체성을 대표하는 카피인 듯 보였다. 하지만 주체성이란 행동으로 드러나는 결과만이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남과 달라”라는 것만이 아니라 “나는 남과 같아”라는 말 역시도 주체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과 다른지, 같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인식의 메타인지를 통해서 인지하고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지 여부가 주체에 관한 주요한 평가 척도이다. 말하고 있는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나의 존재. 행동하는 나의 모습을 한 발 물러서 살피며 그것을 이해, 분석, 해석하는 또 다른 나의 존재. 나를 나만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메타인지이다. 달리 말하면, 내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을 끊임없이 새로이 해석하고 구성하는 메타인지를 사용하며 흔들리면 사는 존재가 주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아래 시를 찬찬히 음미해보자. 흔들리는 것, 갈등을 두려워하며 흔들림을 회피하는 것이 어쩌면 주체를 잃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 없음’을 핑계로, 합리화로 그저 적당히 하거나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으로 사는 것. 무언가를 해 가는 것. 그 기준을 자신으로 삼는 것. 그것이 주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약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꺾이지 않고, 뽑히지 않음은 그 흔들림이 내 뿌리를 탄탄히 해주기 때문이다. 흔들림, 곧 움직임, 활동, 뭐라도 하는 것이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3

처음 밝힌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두 번째 장에서 이야기가 벗어나버렸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는 “내 생각은 나의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이렇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 그것을 다루어보려고 했다. ‘한다’가 아니라 ‘했다’이다. 무슨 말이냐고? 쓰기 싫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나도 모르겠다. 각자 해답을 찾아보시길 권유한다.


 참고하고 싶으시면 홍세화 씨의 “생각의 좌표”라는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조금 더 학문적인 이야기로 이해하고 싶다면 박동섭 씨의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을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4

어떻게 쓰다 보니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생각’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다 보니 떠오른 단어는 ‘감정’이다. 나는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 바른 것이며, 감정적으로 사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는 명제를 부지불식간 수용하며 사는 것 같다. 이렇게 특정 항목을 대립이항으로 놓고, 한쪽만을 숭상하는 방식은 내가 판단하는 방식으로 가장 익숙한 것이다. A가 있고, B가 있는데 A가 아니면 곧 B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있고, 공부 못하는 학생이 있는데 공부 잘하면 성실하고 모범적이다. 예의 바른 사람이 있고, 예의 없는 사람이 있는데 예의 없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곧 내 편이 아니면 네 편이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다.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판별이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우리의 이 단순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쉽게 판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일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 다양한 영역이 뒤엉켜있다. 판단하고 판별하여 구별 짓기 이전에 무엇이 어떻게 연결되었고, 그것이 상호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느냐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는 무척 어렵다. 쉽지 않다. 귀찮다. 그러니 최대한 단순화시켜서 결론 내고 싶어 한다. 마치 내가 앞서서 밝혔던 방식처럼. ‘생각 없음’을 통해서 ‘~하는 척하기’가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론으로 확정하고 싶어 한 것처럼.


 이성과 감정의 문제처럼, 자유와 평등의 문제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아... 잠시 멈추자. 난 지금 이성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니 이분법적인 사고의 위험성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멈추자.

 혹시 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면 잘 모르겠으니 각자가 해답을 찾아보시길 권한다. 참고가 될만한 책이라면 철학사와 관련된 책이 어떨까 싶다. 너무 어려운 이론서 말고 개론서로. 굳이 특정 책을 추천하자면 좀 두껍지만 강신주(이분 책 추천하기는 요즘 논쟁적 인물이라 좀 우려되지만...) 씨의 “철학 대 철학”이나 김상봉 씨의 “호모 에티쿠스”를 추천한다. 김상봉 샘의 책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흐름을 따라 읽다 보면 연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다시 이성과 감정으로.


이성은 합리적, 논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감정은 비합리적, 비논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는 합리와 논리를 기준으로 한 이성과 감정의 분멸이지 이성과 감정 자체의 판별 기준은 아니다. 이성은 장려해야 하는 것, 감정은 억제하는 것인가? 또는 이성으로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합리적이나 논리적이냐는 질문보다 더 중요하다. 그 과정을 서술하기엔 내 필력이 딸리고, 내 지식이 짧으며, 생각의 힘이 약하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성과 감정에 대한 이런 결론을 가지고 있다. 


“이성을 향상시키는 힘은 정서적 안정감에서 온다.”


아마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하위 수준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상위 수준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의 욕구, 3단계는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4단계는 존경의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이 이론이 반드시 옳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맞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이성과 감정의 역할에서도 감정적(정서적) 안정감이 이성적 활동을 활성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쓰고 보니 너무 거창한 주제를 협소하고, 주관적이며,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과잉 일반화를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떠랴. 지금 난 그냥 쓴다. 생각나는 대로. 이런 무책임이 잘못이기도 하지만, 이 무책임함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배움을 얻을 누군가도 있다면 무책임하더라도 쓸모없는 짓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합리화해본다. 



#5

 벌써 5장째다. 슬슬 힘들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표현은 “인간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합리화의 존재이다.”라는 평소 내가 가진 나의 사유와 행동양식이다. 이런저런 잡다한 지식을 배우는 표면적인 목적을 나는 ‘성장’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 인정을 위해서 나는 내 지식이 나의 성장에 활용되고 있음을 포장하며 욕구를 채운다. 하지만 내 의도는 나의 지적인 허영을 가리고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자로 보이는 것에 있다. 실제로 내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 많다. 현실 세계에서 도움이 되는 지식보다는 추상성의 허공에 달랑달랑 매달린 지식들이 많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인정받고 싶다. 항상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 ‘자기만족’을 위해서 나의 이 말잔치를 ‘합리화’한다. 그러한 합리화가 타자를 향할 때는 어느 정도 자신은 그것이 합리화임을 인지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타자를 향한 합리화가 아닌 나 스스로의 합리화, 곧 ‘자기합리화’ 쉽게 말하면 변명을 잘 만드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생각 없음’, ‘주체성’, ‘이분법적 사고’, ‘이성과 감정’에 관한 이야기들이 바로 나의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달리 말하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 나의 인정욕을 채워주기 위한 변명을 굳이 귀한 시간 들여가며 읽고 있다는 것이다. 


미안하다. 귀한 시간 뺏어서.


ps) 본문의 내용 중 이 글을 쓴 내 온전한 생각은 얼마나 될까? 아마 없을 거다. 다 누군가의 책에서, 누군가의 강연에서 들은 내용일 거다. 다만 내 경험에 비춘 이야기가 덧입혀졌을 뿐.


ps2) 이 글을 마친 시간은 오후 1시 40분. 생각보다 오래 썼다. 이 글의 마무리가 허무할 정도이지만 나에게는 유익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긴 호흡으로 글을 참 오랜만에 써봤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글이 교지에 실릴지 안 실릴지도 이젠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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