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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May 06. 2023

어느 멋진 날

폴퍼스 베이 캠핑

뺨을 간지럽히는 서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부스럭부스럭 나뭇잎 부벼대는 소리가 난다.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 그림자가 흔들리면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볕도 같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싱긋한 나뭇잎 향기가 바람에 실려서 코끝으로 흘러온다. 읽던 책을 잠시 덮고 눈을 감으면 나른한 색소폰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손을 내밀면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있는 맥주캔이 잡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한 잔 더 할까? 뭐 어때.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건데. 아, 정말 한가하다. 고요하다. 여유롭다. 이 순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바로 이 순간. 캠핑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저 순간은 공짜로 오지 않는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캠핑이란, 모든 것이 다 갖춰진 텐트를 경치 좋은 곳에 장박 해 둔 채 그냥 기분이 동하면 몸만 움직여서 갔다 오는, 말하자면 별장 산책과 같은 것이어서 가장 중노동이라고 해봤자 장작불 붙이고 그 위에 고기 굽는 것 정도가 되겠지만, 우리 같은 서민들의 캠핑은 하나부터 열까지 몸을 써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 같은 캠핑장 예약은 제쳐두고라도, 짐 싸고 기름이나 가스를 채우는 등의 사전 준비는 물론, 캠핑장에 도착한 후에도 타프 쳐야지, 가제보 쳐야지, 텐트 쳐야지, 장작 패야지, 그러고 나면 또 밥 해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온다면 또 이벤트를 만들어 같이 놀아줘야 한다. 이렇듯 가난한 이민자의 캠핑은 휴식이자 오락, 즐거운 여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노동이자 누군가를 위한 서비스이기도 하다.  


그래도 세상 사는 일이라는 게 몸을 더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워낙 태반인지라, 그나마 이렇게 알람 맞춰 일어나 친구들과 같이 캠핑장 예약을 하고, 주중에도 일을 마치고 돌아와 배터리 충전을 하고 캠핑 장비들 정비를 하고, 짐 싣고 운전해서 캠핑장에 도착한 후 꼼꼼하게 텐트 치고, 타프치고 나면, 의자에 앉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아.. 이게 무슨 호사냐..." 하며 맥주를 훌쩍일 수라도 있으니, 캠핑은 그래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취미 중 비교적 평등한 취미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복잡한 예약과 수많은 준비를 무릅쓰면서도 사람들이 캠핑장으로 향하는 것이겠지.


몇 주 전 부활절 캠핑 때, 날씨 때문에 어지간히 고생을 했었는지 "야~ 이제 정말 나이 때문이라도 매주 캠핑은 무리겠어.." 하며 아내와 구시렁댄 적이 있었다. 몸이 너무 지쳐서 집에 오자마자 완전 무기력증에 걸려 한 주 동안 내내 웅크리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예년 낮 기온이 5월 보다 더 좋은 날이 많은 4월 중순 이후에도 올해는 좀처럼 맑은 날이 돌아오지 않아서 무턱대고 캠핑을 떠날 마음을 먹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주말 낮기온이 25도를 넘을 거라는 예보가 나왔는데... 간만에 맑은 날!! 그것도 초여름 날씨!!! 이걸 그냥 놓칠 아내가 아니었지. 비록 3주 전 캠핑의 피로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광역 밴쿠버에 있는 캠핑장은 4월임에도 이미 예약이 동이 난 상황이었다. 한 군데 남아있는 곳은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선샤인 코스트'의 '폴퍼스 베이 주립공원 (Porpois Bay Provincial Park)'. 뱃삯도 비싸지만 그곳 캠핑장은 개별 사이트에서 모닥불 피는 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인기가 없는 캠핑장이었다. 그래서 연휴 때 캠핑장 예약을 하면 보통 가장 나중까지 자리가 남아있는 캠핑장이기도 했다.


마을의 대기 오염 방지를 위해 캠프파이어를 제한한다는 안내문


아무리 (심정적으로는) 백 년 만에 등장한 멋진 날씨라고 할지라도 꼴랑 1박을 하기 위해 그곳까지 배를 타고 가야 하는가? 아무리 (추가요금을 내는 트레일러는 포기하고) 텐트 캠핑이라도 예약비 포함 페리값만 백 불 가까이 되는 건데. 단 하룻밤의 캠핑 비용치고는 넘 비싼 거 아닌가... 하며 0.1초 정도 고민했었지만, 마침 바로 전 주에 '선샤인코스트'로 여행 가기로 한 걸 날씨 때문에 취소했었다는 이유로... 하하하.. 그냥 가기로 했다. 나같이 비겁한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챙기는 일 하나에도 별의별 이유를 갖다 붙이는구나. 단지, 그냥 1박 캠핑이기에 음식이나 다른 캠핑장 내 여흥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 가능하면 근처 시내에서 사 먹기로 했다. 마침 폴퍼스 베이 캠핑장에서 시내 몰까지 차로 6분 거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제법 괜찮은 식당들도 많기 때문에, 원하는 메뉴가 생각났을 때 금방 나가서 픽업해 오기로 했다. 캠핑장에서 음식을 안 하기로 결심하면 한꺼번에 짐이 확 줄고 일도 줄어든다. 그래도 커피는 포기할 수 없어서 기본적인 스토브와 코펠은 챙기겠지만, 그래도 식자재를 안 가지고 움직이는 것만 해도, 아이스 박스니 냉매니 하는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번에는 하나도 준비 안 하고 텐트와 침낭만 가지고 살랑살랑 갔다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나서려니 짐이 한가득이다. 음식재료도 없고 게다가 일박이라서 갈아입을 속옷도 달랑 한 벌인데... 동영상 촬영 테스트를 위해서 장비가 늘어나서 그런 걸까? 어쩌면 인간이 단 하루라도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물이라는 게 생각보다 많을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막상 차에 쑤셔 넣어보니 또 의외로 널럴해서 또 납득하고 길을 떠난다.







오랜만에 타는 페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날이 좋아서인가? 며칠 전에 미리 예약을 해두어서인지 (예약비는 $5) 입구에서 오렌지색 딱지를 하나 준다. 아마도 먼저 들여보낼 예약차량을 구분하기 위해서겠지. 최근 밴쿠버 지역의 인력난으로 인해서 BC Ferries에서는 지역별 운항편수를 많이 줄였다고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7시 반 출발시간 보다 한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있다. 예약하기 잘했지. 그래도 이렇게 좋은 날에는 페리를 기다리는 것도 즐거울 것만 같다. 페리에 차를 세우자마자 옥상 데크에 올라가 보니... 아. 화창하다. 화창하구나. 얼마 만에 맑은 날이야, 정말. 이렇게 좋은 날에 배를 타고 여행을 가게 되다니. 데크에 올라온 사람들 모두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고 있다. 여기저기서 셀카들을 찍느라 바쁘다. 그렇지. 정말 날씨 좋은 날 밴쿠버는 이길 수 없지. 하지만 이게 만일 단지 지난했던 흐린 날들의 반작용이라면? 그래서 밴쿠버 사람들이 날씨에 무척 진심인 것인가? 빡세게 구르다가 먹는 점심은 죄다 꿀맛인 것처럼?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폴퍼스베이 캠핑장에 가본지는 십 년도 전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좋은 곳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그동안 왜 안 왔었지? 페리 가격이 착했던 예전엔 제법 자주 왔었던 것 같은데. 2019년에 7월 연휴 때는 겁도 없이 예약도 안 하고 배 타고 건너왔다가 사이트가 다 찬 걸 보고 발길을 돌렸어야 했다 (https://brunch.co.kr/@vanheading/90 참조). 페리 가격 외에도 자주 안 오게 된 이유가 있을 법도 하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는 오늘만큼 날씨가 좋지 않았을 테지.





보통 선샤인코스트라고 하면 정확한 행정구역이라기보다는 BC주의 South Coast 지역 (밴쿠버처럼 태평양을 접해 있으면서도 미국과의 국경과 맞닿아 있는 지역)의 서북쪽에 위치한 해안 도시를 통칭하는 지역명이다. 밴쿠버의 북쪽에 위치한 스쿼미시와는 Howe Sound로 갈라져 있어서 사실상 도로교통으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고 반드시 배를 타고 가야 한다 (보웬섬이나 키츠섬 역시 선샤인코스트 마을 중 하나로 분류된다). 보통 깁슨 (Gibson)에서 시셸트 (Sechelt), 그 너머 하프문베이(Half Moon Bay)까지가 잘 알려져 있는 선샤인코스트 마을이고, 좀 더 가서 얼즈코브 (Earls Cove)에서 또 배를 타고 들어가는 파월리버 (Powell River) 역시 선샤인코스트의 마을로 구분된다 (파월리버까지 가는 교통편은 밴쿠버 섬의 동쪽 도시 쿠트니 (Courtney)에서 출발하는 페리가 더 많다). 파월리버는 아직 9시 이후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을 정도로 조용한 도시이지만, 깁슨에는 밴쿠버 지역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들이 즐비하고, 시셸트에는 이곳에서 사는 주민들 대상의 각종 쇼핑몰과 병원, 경찰서, 도서관 등의 서비스가 있다. (https://brunch.co.kr/@vanheading/39 참조)



캠핑장 체크인 시간까진 여유롭게 관광객 행세를 하기로 한다. 페리 갑판에서 컵라면을 먹어서 아직 시장기는 없지만, 그래도 슬슬 걸어 다니다가 괜찮은 먹거리가 보이면 덥석 물 수는 있다. 마침, 주말이라 시셸트 도서관 뒤편 골목에서 조그만 주말 장터가 열린다고 해서 가봤는데, 확실히 코로나 이전에 비해서 매우 한가하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여름철이 아니어서 그런가? 야채코너는 아직 없고 몇몇 제과점이나 음식점, 화가들만 나와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눈도장만 찍고 못 사갔던 이 지역 양조장에서 만든 보드카와 드라이진이 눈에 들어온다. 뭐, 이젠, 예전처럼 과음하는 것도 아니니, 저 정도 가격이면 못 살 것도 없다 싶어서 시음을 해봤다. 아. 최근 유행인 복잡한 들꽃 향의 크래프트 진들과는 달리 이 진은 예스럽게 주니퍼 베리 향만 무척 도드라진다. 어쩌면 여름 한정 칵테일 전용으로 기획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척이나 한가했던 주말 장터



길 건너 바닷가로 가본다. 아...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청명한 날에 이렇게 반짝이는 윤슬이라니. 도시를 벗어나 사는 걸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아내조차도 '선샤인코스트 정도면...' 하며 누그러진다. 내 기억에는 요 바닷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펍처럼 보이는 곳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하며 길을 걷다가 보니까, 그 펍이 중국식당으로 바뀐 걸 발견했다. 아닌가? 원래부터 중국식당이었나? 암튼, 이미 식당 비즈니스 라이센스가 있는 상태라면 차라리 이런 노른자 땅에 괜찮은 서구식 브런치 영업을 하면 돈을 쓸어 모을지도 모르는데, 간판부터 亞洲美食이라니. 정말 대륙의 기상이란… 아니지! 그게 아니야! 기왕 이렇게 아름다운 곳까지 왔는데, 나 같아도 가능하면 일 적게 하고 놀겠다. 돈은 무슨.  좀 더 여유로운 삶을 위해서 우직하게 냉동 딤섬을 고집하는 거 아니겠어? 잠시나마 속물적인 생각을 했던 걸 반성하고 <아주미식> 주인장의 평화로운 노년을 상상해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뭐 어때. 이렇게 한가한데. 이렇게 반짝이는데. 이렇게 멋진 날인데.


시셸트 시내에 있는 해변 공원




시셸트에 올 때마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는 K베트남 음식점은 11시부터 영업한단다. 아침 7시 페리를 타고 왔더니 이렇게 여기저기 다녔는데도 식당 영업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다시 중심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그 동네 브런치 맛집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날이 좋다 보니 동네 사람들 모두 개들을 끌고 나와서 파티오에 앉아있다. 음식준비를 안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리고 시내와 가까운 곳에 캠핑장이 위치해 있다면, 일박캠핑도 단순 노숙에서 벗어나 이렇게 관광 같아질 수 있구나. K 베트남 식당의 깨끗한 맛은 여전하다. 어떤 마술을 부리는데 베트남 국수가 이렇게 담백하고 깔끔할 수 있는 건지. 쥔장 할머니의 투박한 말투도 여전하고 다른 식당에 비해서 음식이 늦게 나온다는 것도 한결같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비담을 닮았던 이 집 아들은 이제 대머리가 되었고, 지난번에 왔을 때 아빠 품에서 놀던 아이가 자라 이제 서빙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 이렇게 몇 년이 지나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퀄리티의 음식을 제공해 주는 식당이 있다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다. 언제 돌아가도 항상 기대가 만족되는 곳처럼. 매일같이 변했던 수도권 위성도시에서 성장기를 보낸 나로서는, 이런 관광지 식당에서 오히려 더 고향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내는 "분짜"정식을 먹었다


1시가 좀 넘어서 캠핑장으로 출발한다. 주립공원도 그렇지만, 민영 캠핑장이든 국립공원이든 이곳 캠핑장의 체크인 시간은 대개 오후 1시부터 시작한다. 간혹 포트코브처럼 관리가 빡센 곳은 1시 전에는 절대로 들여보내 주지 않지만, 아니나 다를까 여긴 아예 입구에 사람도 없다. 우리 자리를 찾는 데에도 무척 헤매었는데, 캠프 사이트 번호가 적힌 나무 포스트가 거의 썩어서 도무지 이게 맞는 번호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앞으로 지나가서 다른 사이트 번호를 일일이 확인한 후 역산을 하고 나서야 이게 맞는 곳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화장실이나 샤워 온수, 여타 다른 캠핑장 관리 상태가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그런 건지, 폴퍼스 베이 캠핑장의 사용료는 다른 곳 ($35/박) 보다 싼 $29. 뭐. 그래도. 어때. 이렇게 좋은 날인데.


오래간만에 4계절용 텐트를 가지고 왔는데, 아마 마지막으로 이 텐트를 사용했던 것이 작년 7월이었던 듯 싶다. 다행히 그때 비에 젖거나 하지 않았던 건지 뽀송뽀송한 상태였다. 그래도 텐트를 칠 때마다 뺴 먹는 것이 있고 새롭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겠지. 텐트에 짐을 다 옮겨 놓고, 자전거에 바람도 넣고 나서 폴퍼스 베이 해변으로 나섰다. 'Bay (만)'이라는 이름답게 'U'자 형으로 불쑥 들어간 해안이라 워낙 수심도 깊지 않고 바다 건너에 바로 마을도 보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서 튜브나 패들보트 등을 들고 물놀이를 하고 있다. 수영복을 입고 물에 뛰어들어기도 하지만 꽤 앞까지 나가도 수심은 여전히 무릎 위 정도. 그래도 오랜만에 맑은 날을 즐기느라 하하호호 여념이 없다.



캠핑장에서는 자전거 산책! 중간에 공용 모닥불 장소 표지판이 보인다


Porpois Bay 해변 전경


캠프 사이트 정경 90‘ 롱테이크


캠프 사이트 정경 타임랩스


조금 출출한 느낌이 나서 뭘 먹을지 찾아본다. 식사는 당연히 외식. 배달요리까지 생각해 봤는데 이곳은 대기업 배달요리 서비스가 아직 진출하지 못한 곳이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도 6분이면 중심가에 나갈 수 있으니... 고민고민을 하다가 결국 평점이 가장 높은 피자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20분 정도 걸린다니 나가서 맥주도 좀 산 후에 픽업하면 딱 맞겠다. 보통 캠핑장에 세팅을 하고 나면 엉덩이가 엄청 무거워져서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무척 귀찮은데, 또 이렇게 들락날락하면서 집에서 휴일 보내듯이 하는 것도 재미있다. 뭘 사먹을까.. 하는 지상 최대의 고민도 집에서 보내는 휴일 같고. 신선한 재료를 듬뿍 담은 정통 브루클린 스타일 피자를 씹으며, 맥주와 진토닉을 마시며, 태블릿에 담아 온 예능프로를 보면서 낄낄대며 오후를 보내는 것도 집에서 보내는 휴일 같았다. 서늘한 밤공기를 마시면서 해변을 산책했던 것만 빼고는.










이튿날인 일요일 일기예보는 비였다. 그래서인지 하늘도 우중충하고 찬 바닥에서 자고 일어난 몸도 개운하지가 않다. 보통 캠핑장 아침은 여유롭게 짹짹대는 새소리도 듣고, 부드러운 재즈도 듣고, 여유롭게 커피콩을 갈면서 시작하는데, 이날 아침은 조바심이 나서 도무지 안정이 안된다. 심지어 까마귀들도 비명을 지른다. 비가 오기 전에 빨리 텐트를 걷어야 하는 일도 있지만 9월 첫 주 노동절 연휴 캠핑 예약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폴퍼스 베이 캠핑장은 비교적 시내와 가까운 편이라 무선 인터넷이 어느 정도는 연결되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일찌감치 차를 몰고 시내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을 끓이는 도중에 전화기를 가져와서 틈틈이 포트코브 캠핑장 예약을 준비했지만 결과는 꽝. 뭐 어차피 한정된 자원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가 돌아가게끔 만드는 예약 시스템이라는 걸 알지만, 그리고 남들에 비해서 이미 주립공원 이용을 넉넉하게 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럴 때마다 왠지 당연히 내가 가져야 하는 걸 남한테 뺏긴 것처럼 삐뚤어진다. 내가 못 가게 된 것만큼 다른 사람이 대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거룩한 생각은 이미 안드로메다에 버리고 왔다. 투덜대면서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다가 입천장을 대는 건 덤이다.


핸드 그라인더 손잡이를 잃어버려 전동드릴으로 대신 갈았다



커피를 들고 아침 바다 산책을 한 번 더 하고 나서, 그리고 "썰렁하고 축축한 아침에는 역시 라면이지!" 신조를 또 한 번 실행하고 나서, 텐트를 걷은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은 페리 터미널과 가까운 항구 마을 '깁슨 (Gibsons)'에서 관광객 흉내를 내볼 생각이다. 이번 캠핑을 계획할 때부터 호기롭게 준비한 아내의 일정에는 맥주 양조장 견학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캠핑 출발 전날 매운 쫄면과 맥주를 마시고 나서 호되게 배탈이 난 나로서는 조금 겁이 났다. 화장실 가까운 곳에서 저녁때 마시면 모를까, 또 한참 집에 돌아가야 할 일이 남았는데 괜히 또 배탈이 나서 헤매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내가 부르는 맥주찬가를 못 들은 척하면서 깁슨 항구 근처의 산책로를 걷는다. 랭데일 페리 터미널에서 10분도 안 걸리고, 웨스트 밴쿠버 호슈베이에서부터 온다고 하더라도 한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이 마을은, 그 접근성 때문인지 관광객 상대의 상업이 활성화 되어 있다. 해변 산책로를 따라 보이는 보트 선착장에도 이곳저곳에 낚시 보트 대여업을 하는 곳이 보인다. 조금도 올라가면 식초, 메이플 시럽과 같이 시골 마을마다 꼭 한 군데씩 있는 식품가공품 판매소들이, 그리고 그림이나 프린트 상품을 파는 곳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무척 오래된 항구 도시이기도 해서, 해변 산책로를 걷다 보면 이곳저곳에 버려진 (그리고 망가진) 보트들이 덜렁 놓여있는 것도 쉽게 발견한다.



위장에 부담이 되어 꼭 요구르트로 미리 치료를 하더라도, 캠핑 마지막 날 아침 라면은 빠질 수 없다.


텐트 걷기


Gibsons Landing 보트 선착장 전경




아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프린트 상품을 파는 곳에서 어느 늙은 강아지의 환대를 받았다

 


맥주가 아니면 뭐가 먹고 싶냐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내가 묻는다. 4년 전에, 정말이지 노조가입 회사라는 허울 속에서 각종 모든 거지 같은 시스템은 다 갖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서 이곳에 왔을 때, 그때 들렀던 멕시코 식당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었다. 깁슨 항구 앞 조지아 해협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걸 하려고 그 거지 같은 회사에서 버텼던 거야!" 하며 마셨던 마가리따가 무척 상쾌했었다. 그때 그 회사를 그만두고 옮긴 회사에 4년째 다니고 있다. 업무시간에 짬짬이 글도 쓸 수 있으니 딱히 불만이 없는데, 지난 4년간 주말에 이력서를 쓰고 다른 직장에 지원한 적이 다섯번도 안 되는 걸 보면 내 현재 직업 만족도가 제법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집의 마가리따가 행운의 마가리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점심때가 안되어서 그런지 줄 서지 않고서도 그냥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코로나 이전에는 영업시간 내내 문 앞에 긴 줄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었는데, 코로나 시대 동안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런 관광지 비즈니스들을 보면 왠지 감격스럽다. 나초칩과 께소푼디도 (Queso fundido, 멕시코식 녹인 치즈 요리), 피시타코를 마가리따와 함께 먹으며, 또 조지아 해협을 보고 소원을 빌어본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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