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행 비행기 타고 하늘에서 슝 하고 떨어졌는데 여기가 신혼집 이래.
나에게 2020년은 참 특별하다. 신랑을 만나고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1년 뒤쯤 진행하려고 했던 결혼 준비와 결혼식을 코로나 때문에 당겨버렸다. 코로나 퍼지기 전 2020년 1월 초에 나는 신랑이 있는 캐나다로 하계휴가를 떠나려고 비행기표와 숙소까지 예약을 해두었으니 나는 원래 계획한 것에서 크게 바꾸거나 변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게 되다니 내 인생에서 참 다이내믹하고 재미있는 사건이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의 결혼 절차와 순서는 거꾸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한국과 캐나다 양 국가의 까다로운 입국 제한과 2주 자가격리 절차 때문에 신랑이 서울로 미리 올 수가 없었고, 나도 관광비자로는 캐나다에 입국이 안돼서 캐나다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를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만 했다. 그래서 남들은 어떻게 보면 가장 나중에 하기도 하는 혼인신고를 가장 먼저 해야만 했고, 상견례도 혼인신고하고 나서 할 수 있었다. 결혼식 2일 전에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시댁 부모님과는 신랑 없이 혼자서 여러 번 만나 뵈었다. 시어머님은 6번 그리고 시아버님은 1번. 내가 신랑 없이 시댁 부모님을 만나 뵈었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우와~ 진짜? 어떻게 했어? 나는 못 할 거 같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못하는 건 없다. 상황이 다가오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Yes or No라는 선택권에서 기쁘게 Yes를 선택했다. 나는 너무 좋았다. 남편을 사랑으로 길러주신 분들이기 때문에 감사했고 사랑하는 아들의 배우자로써 환영해주시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 당시에 나도 시부모님이 될 분들을 어서 만나보고 싶었고, 나와 케미가 잘 맞으실지도 많이 궁금했다. 양가 어머님께서는 혼인이라는 경사를 앞두고 여러 번 만나셨는데 두 분은 이야기도 잘 통하셨고 결혼 후에 흔히들 이야기하는 '시집살이'라는 비슷한 경험을 하셔서 서로 이해의 폭과 배려가 넘치셨다.
나는 결혼식 2주 전에 혼인신고를 먼저 했다. 신랑을 보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시는데도 결혼 승낙을 해주신 친아버지께 감사하면서 동시에 죄송스러운 마음이었고, 지금도 이해해주신 친아버님께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신랑은 혼인신고할 당시에 해외 입국자로 한국에서 자가격리 중이었기 때문에 나와 동사무소에 같이 갈 수가 없어서, 나와 시어머니가 한 팀이 되어 릴레이 선수 경주하듯이 필요한 구비 서류들과 인감도장을 배턴을 주고 받듯이 동사무소까지 제출하여 그렇게 혼인신고를 했다. 혼인증명서를 영문으로 공증을 받아서 캐나다 입국 시에 증빙서류로 제출해야 했기에 나도 신랑도 시어머니도 촉박한 시간에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회사를 다니며 일하고 있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제 정말 나의 싱글 독신 인생은 끝이구나, 이 남자가 내 남편이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한 편 으로는 혼인신고가 정상적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조금 시간을 벌 수 있을까도 조심스레 생각했었다.
신랑이 서울에서의 자가격리가 끝나는 날 우리는 8개월 만에 첫 데이트를 했다. 이미 혼인신고는 다 끝나서 Game over 였지만 사실 우린 그동안의 공백 때문에 어색함과 반가움과 설레움에 휩싸였던 것 같다. 사실상 이 기간이 우리에겐 신혼여행이었다. 캐나다로 가면 다시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서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즐겁게 보내야 했다. 공항에서 양가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KF94 마스크와 얼굴 전체를 투명 비닐 필름으로 덮는 Face Shield를 커플룩처럼 뒤집어쓰고서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12시간 정도 지나 보니 신혼집이 눈 앞에 보였다. 아, 여기구나.
처음 와보는 곳인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모르겠고, 앞 뒤 좌 우로 전부 하우스가 있는데 여기서 2주 동안은 꼼짝을 하면 안 된단다. 그래도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어서 바깥공기는 쐴 수 있어서 많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신혼여행 후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단 둘이서 지냈기 때문에 우리는 그래도 견딜만했다. 밖에서 외식을 못하기 때문에 신랑이 미리 냉동실에 얼려놓은 고기와 재료들로 삼시 세 끼와 3-4시경에 먹을 간식을 준비하는 것을 2주 동안 했다. 신랑은 한국에서 이미 3주라는 휴가를 썼기 때문에 캐나다로 와서부터는 자가격리를 하면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쉬면서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걸 어떻게 해냈을까 싶은데 그 시기에는 아무 생각 없이 먹어야 하니까 자청하여 요리사가 되었다.
친어머니는 음식을 참 잘하신다. 어머니는 음식이 보약이라고 하시면서 신선한 재료와 야채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 저염식으로 매일매일 끼니때마다 요리를 해주셨다. 결혼하고 나니, 어머니가 매일매일 아침상을 푸짐하게 차려주신 것과 모닝커피를 핸드드립으로 내려주신 것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하셨을까 존경스러워졌다.
나는 서울에서 아파트에 살았다. 아주 오래전 어렸을 때 주택에 살았었지만, 거의 30년을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주택에 사는 것이 새로웠다. 코로나가 알려준 주택의 장점으로는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것과 내 소유 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앞마당과 뒷마당에 무성한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어 미관상 예쁘게 그리고 햇빛이 더 잘 들 수 있게 하는 것과 잔디밭에 잡초를 뽑아내서 pure 한 잔디밭을 만들고 예쁘게 깎는 것 등등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어서 자가격리가 조금은 수월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