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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Dec 11. 2021

낙지, 꽃게 그리고 연결

무엇이 되어..


기형도의 섬 연평도에 거주한 지 어느덧 7개월이 되었다.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박하는 작은으로 이어진 연육교 아래엔 밀물이면 사라지고 썰물이면 드러나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오-육백 미터쯤 그 길을 따라가면 그 끝에 낮고 좁은 무인도가 나타나는데 각각 거문여와 용듸라는 이름이 붙어져 있다.
물이 많이 빠지는 날이면 주민들은 그 무인도들로 나아가 굴이나, 소라 낙지 따위의 해산물을 채취한다.
2017년 파견된 국립 민속박물관의 조사관들이 이 섬에 1년간 머물며 수집해 만든 연평도 조사서에 의하면,
2017년 즈음 수협은 연평도 갯벌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수십억 원 치의 모래를 연평도 갯벌에 쏟아부었다. 바지락 따위의 조개는 갯벌과 모래의 비율이 맞아야 자라기 쉬운데 연평의 해안은 뻘이 모래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돈맛을 본 바다는 썰물을 동원해 수십억 원 치의 모래를 깊은 바다로 끌고 가 버렸고, 그 짧은새 모래와 눈이라도 맞았는지 갯벌까지 같이 바다로 쓸려 나가 버렸다.

결국 바지락들은 졸지에 수재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지락이 전멸할 동안 다른 수산물들이라고 멀쩡하지는 못했다.
조사서에 의하면 그 무렵엔 망둥어도 제법 잡혀 경륜 있는 섬 남정네라면 하룻밤에 적게는 2 백마리 많게는 6백 마리까지 맨손으로 망둥어를 잡았다는데 이젠 많이 잡아봤자 몇십 마리 남짓이다.
아니 그보다 오래 전인 6,70년대엔 바닷물만큼이나 많았다는 조기도 무분별한 남획으로 이젠 모두 사라져 버렸고 결국 조기 활황 시절엔 쳐다보지도 않던 꽃게잡이로 전향했다.
한데 봄과 가을마다 잡는 꽃게잡이 실태를 보면 꽃게가 얼마나 더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의미 없이 생을 마감하고 해안에 불법 투기되어 버려지는 게의 양만 해도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기 때문이다.
이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보고 있노라면 의미 없는 죽음을 의미하는 '개죽음'이란 단어는 이제 '게 죽음'으로 바뀌어 불려야 할 지경이다.


게죽음이 개죽음과 다른점은 게를 잡는 어부들에게 세번의 돈벌이를 시켜준다는것이다.

첫째. 게를 잡아 돈을 번다.

둘째. 돈안되는 게사체 쓰레기를 바다에 무단투기해서 돈을 번다.

셋째.꽃게철이 끝나면 해양쓰레기를 치우는 바다청소비 명목으로 1일 1인당 13~16만원씩 지급하는 막대한 정부보조금을 받아 돈을 번다.

게를 잡아도 이득,버리면 두번 더 이득이다.

남들은 땀으로 버는 돈을  쓰레기를 버리고 벌고 있으니 이젠 '꿩먹고 알먹고'가 아니라 "게 잡고 게 버리고 "로 말을 바꿔야 한다.

요즘 누가 꿩을 먹나?


매일 밤 쉴 틈 없이 트럭으로 가져다 투기하는 막대한 게 쓰레기를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요컨대 이것은 죽여서 쓰레기로 버릴지언정 게가 살아남아 돌아다니는 게같은 꼴은 도저히  못보겠다는 인간과, 게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알을 낳아 종의 이어가고자 하는 게의 전쟁이다.
올해는 꽃게가 풍년이라 한 그물마다 1억 원이 넘는 게가 잡혀 매일매일 수십억 원 치의 꽃게가 몇 개월째 잡히고 있다고 하니.. 아직은 게가 인간을 이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꽃게가 얼마나 더 파이팅해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데 낙지는 게만큼의 근성은 없는 모양인지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
국립 민속박물관 조사관들이 조사할 17년까지만 해도 갯벌에 나가면 하룻밤에 낙지 반백 마리 남짓하게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젠 운이 좋으면 한두 마리 볼까 말까 하다.
어구를 세척하는 강 염산을 그대로 바다에 배출하는 어민들의 행태나,
쓰레기봉투값 1,2백 원을 아끼려고 음식물쓰레기를  비롯한 각종 생활쓰레기를 모조리 해안에 갖다 버리는 주민들 의식 수준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갯벌에 걸어 나가 잡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낙지라는 사실과, 쫀득하게 엉겨 붙는 낙지의 나긋나긋한 빨판을 생각하면 낙지의  말랑말랑한 근성이 아쉬울뿐이다.

섬 전체가 무단폐기된 꽃게사체로 뒤덮이는 장관의 일부


섬에 왔던 올해 봄이었다.나처럼 졸지에 도시에서 어촌으로 생활터전이 바뀐 일행들은 갯벌체험을 나서며 모두 낙지를 목표로 삼았다.

초심자의 행운은 해루질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한두 마리 볼까 말까 하다는 낙지를 그날 나는 여러 마리 잡았다.

놈들의 모습은 다른 갯벌의 생물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다른 생물들은 굴 소라 고둥 갱구 따위를 제외하곤 대부분 쏜살같이 움직인다.

낙지와 더불어 갯벌에서 가장 잡을만한 두 가지 중 하나인 돌게의 경우 때론 교활하고 잽싼 몸놀림으로 때론 은밀하게 돌 밑으로 숨고, 숨는데 실패하면 두 팔을 크게 벌려 몸집을 크게 보이게끔 허세를 부리다가 손을 뻗어 잡으면 필사적으로 집게로 물고 늘어진다.

가까스로 잡으면 사지를 파닥이며 저항하다가 조과통에 담기면 집게로 옆에 있는 다른 게라도 잡아물고 늘어져 한마리를 당기면 강강술래라도 하듯 줄줄이 엮여 올라온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이다.


한데 낙지의 모습은 그들 모두와 달리 대체로 여유롭고 나태하다.

내가 본 모든 낙지는 때론 낮고 얕은 물에 그저 얇게 흐느적거리며 떠 있거나 때론 느물 느물 끈적끈적 느린 호흡으로 돌과 돌 사이를 기어가거나 우주전쟁에 묘사되는 외계인의 거대한 문어형 로봇이 천천히 발을 움직여 이동하듯 느릿느릿 물을 토해내어 유영하는 모습뿐이었다.

손을 뻗어 놈을 잡으면 손 안에서도 느릿느릿 꾸물대며 움직일 뿐 달리 저항하지 다.  


그저 바다에서 인간의 손 안으로  공간만 바뀌었을 뿐 낙지라는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인간이 가진 무한의 탐욕으로도 낙지의 부동심만큼은 흔들지 못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그런 놈들을 잡기 위한 움직임도 그리 역동적일 필요가 없다.

그저 희소한 것을 발견한 기쁨을 누리며 천천히 손 안에서 느긋하게 꿈틀대는 생명의 움직임을 즐기면 될 뿐이다.

모두가 낙지잡기를  꿈꾸며 어두운 갯벌을 헤맸지만 이제 이 갯벌에서 낙지는 희소한 것.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운좋게도 나는 그날 낙지를 잡은 두 명 중 하나였다.

해루질이 끝나고 출발점으로 돌아와 일행들과 조과에 대한 짧은 담소를 나누곤 어망을 정리하는 시간.

새끼건 뭐건 가리지 않고 다 잡아들인 일행들의 조과를 곁눈으로 흘리며

나는  좁은 어망 안에 있는 낙지들 중 새끼 낙지들을 골라 조금 구경하고 물에다가 놔 주려 했다.

일행 중 어떤 이들이 웃음 띈 얼굴로 안타까워하며 외쳤다.

"아!! 안돼. 내가 먹게, 나 줘요!"

"맞아 우리 주세요~!"

계면쩍게 웃는 얼굴들로부터 안타까운 음성들이 쏟아졌다.

 나는 찰나 지간 멈칫했지만 이내 손을 마저 뻗어 물속으로 낙지를 놔주었다.

낙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천히 다리를 오그렸다가 폈다,  오그렸다 폈다. 반복하며 느긋이 물속을 헤엄쳐 갔다.

아쉬운 경탄성과 함께 안타깝게 뻗어오는 그 어느 이의 손길에 잡힐뻔한 낙지를 내가 다시 잡아 채 더 먼 쪽으로 던져 버렸다.


에게 낙지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한 뼘은 더 자랄 법한 어린 낙지이지 않은가!

그의 손에 낙지를 넘긴다면 그는 집으로 가 살아있는 낙지를 잘라 신경이 채 죽지 않아 꿈틀거리는 낙지의 소리없는 비명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곤 참기름과 소금을 버무려 입안에 넣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명의 최후를 입안에서 느끼는 잔혹한 유희를 즐길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더없이 덧없다.

그는 이 낙지의 어린 생명을 집어삼켜 한낱 잔해로 치환시킬 뿐이다.

500원짜리 라면 한봉을 끓여 먹어도 같은 결괏값을 낼 진데..

굳이 이 아까운 생명을 한낱 찌꺼기로 치환할 수는 없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 낙지가 이대로 돌게나 꽃게에게 잡아 먹혀 사라진다 해도 차라리 그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먹히고 죽어 바다에 잔해로 흩뿌려지면 그 안에서 순환하여 바다의 양분이 되어 게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플랑크톤이 되고 플랑크톤은 다시 산소를 만들고 최후에 형태를 바꾼 잔해는 마침내 모래가 되고 바다의 일부가 되어 윤회할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잡히고 참기름에 버무려 인간의 잔해가 되면 불과 몇시간 뒤  자신의 불완전성을 외면하는 인간의 오만한 손이 하얀 양변기의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려 버리는 무의미한  기다릴뿐이다.

그렇게 되면 낙지는 더 순환하지 못하고 헛되이 그저 사라질 테다!


이 많은 생각을 찰나에 떠 올리며 나는 낙지를 잡아 채 좀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뜨려 보냈다.

낙지는 이 급박한 사정을 알지 못했는지 아니면 누구도 차마 흔들지 못한  부동심을 발휘한 것인지 그저  유유자적 몸을 오그렸다 폈다 하며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번민에 휩싸였다.

40을 넘어가니 그런 생각이 잦다.

따지고 보면 미숙한 고뇌인데 나이를 먹어서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심화된다.

존재가치에 대한 고뇌다.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일화에서 잡스는 소비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에 시장조사가 필요 없다고 주장했는데..

같은 개념의 이야기를 제레미 리프킨은 잉여인간으로 묘사한다.

1%의 혁신가와 세상을 혁신하고 9%의 패스트 무버가 세상을 바꾸고 나머지 90%는 그저 소비할 뿐이라는 것..

그 90%는 이른바 잉여 인간... 오가닉일 뿐이다.

순환되어 한낱 퇴비로 사라져 가는..

무엇이 되지 못한 슬픈 존재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사실 '누군가'가 이룩한 경이로운 혁신의 증거다.

누군가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무엇인가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낸다.

하물며 저 멀고 먼 옛날의 무지한 원시국가의 인간도 금속을 불에 녹이고 정제하고 담금질을 하는 혁신을 이뤄 냈다.

누군가는 기어를 발명하여 힘의 형태를 변환시키고 누군가는 전기를 발견하고.. 누군가는 전선과 발전소를 또 누군가는 배터리를 또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이용하여 전동공구를 또 누군가는 그것으로 또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그 모든 누군가는 그렇게 혁신을 이뤄 냈다.


오만에 빠져 생을 영위하고 있지만

고찰해 보면 나는 한낱 청동기 시대의 대장장이보다도 열등한 존재다.

그저 낙지처럼 존재하다가 사라질..

아니 어쩌면 인간이라는 이유로 낙지보다 의미 없는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계 안에서 순환되지 않으니까..

낙지는 게들에게 먹혀 순환될 테지만 나는 그저 불길 속에서 태워질 예정이지 않은가..

저 바다의 무수의 조개들은 껍질이나마 남겼지만 나는 재가 되어 사라지리라.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진 그저 의식 없이 소비하고 찰나의 순간 동안 존재할 뿐이다.

아니 해안가마다 그득그득 버려진 압도적인 게의 사체와, 주우면 주울수록 무기력해지는 압도적인 해양쓰레기를 보면.. 소비에만 몰두하는 행위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유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더해..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아...

나는 무엇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다.

캄캄한 밤 얕은 갯벌 웅덩이를 떠 다니는 낙지처럼 부유하는 영혼을 의식하며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낀다

매일 밤 내 의식은 비고 빈 어둠이 가득한 공간을 헤매다 공허함에 몸서리친다.


그러던 어느 밤.

나는 한 가지 깨닫음을 얻었다.

2014년 그리고 2016년 어느 날.

난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을..

태어나 처음으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무엇'이 될 기회는 놓쳐버렸는지 어떤지 몰라도

처음으로 '무엇'으로 연결될 기회는 얻은 셈이다.

처음으로 자연계 안에서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존재가 되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참 의미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에게 커다란 빚을 진 셈이다.

때때로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난 새벽이면 어둠을  뚫고 뻗은 내 상처 가득한 거친 손으로 아들의 작고 뽀얀 손을 살며시 잡는다.

그리고 안한다.

내가 죽어도 괜찮지 않은가..

내 아이들은 살아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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