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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Dec 08. 2021

중독된 사랑

중국된 쌀랑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초봄이었다.

이웃한 중국어 교사가 강력 추천해 주었다는 중국쌀국수가 집 앞에 당도했다.

폭풍같이 몰아치는 아이들의 음성 속에서 실낱같은 바람처럼 스쳐 들었다. 마라맛이라나 뭐라나..

마라의 거센 유행 속에서 흔들림 없이 라멘과 라과 짬뽕만을 고집스럽게 사랑해온 나에게 마라 맛이란 탐험하고 싶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는데 그런 나와는 달리 아내는 고조된 음성으로 기대감을 노래했다.


박스테이프를 떼고 안을 살펴보자

험준한 여정을 뚫고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반질거리는 깨끗하고 촌스러운 포장지가 드러났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중국어가 잔뜩 쓰인 포장지의 투명한 부분으로 검은 액체와 노란 액체가 담긴 투명 봉지가 보인다.


멀고 먼 중국으로부터 넘실대는 황해의 거친 파도를 뚫고 다시 차를 타고 부산의 어느 도시로 갔다가 다시 차를 타고 처음 도착했던 인천으로 돌아온 뒤 다시 배를 타고 200km의 여정을 더 거친 뒤 다시 한없이 중국에 가까운 연평으로 이끌려 온 그 중국어 가득한 봉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 주입된 생각들을 토대로 중국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반사적으로 생기는 감정 때문일까..

그 쌀국수는 발코니의 낡고 어두운 창고에 들어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도록 잊혀진 채 먼지만 쌓여갔다.


나는 수시로 창고문을 열었지만 창고 선반 어둑한 구석에서 웅크린 국수 봉지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버릴 수는 없지만 또한 도저히 먹을 수도 없는 것..

정체를 알 수도 없는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고

봉지 뒷면엔 뭉뚱그려 놓은 애매한 레시피만 기재된 그 국수들은, 김수미식 대충 레시피를 배격하는 한편  수치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내게 어떤 기대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쌀국수는 그렇게 반년 정도의 시간 동안 내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했다.


너구리, 진라면, 신라면, 짜왕, 튀김우동.. 수많은 라면들과 소면 다발들..

스파게티니 링귀네 페투치네 리가토니.. 수많은 파스타면 다발과 듀럼밀들이

쌀국수의 옆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져 가도 쌀국수는 그 자리에 방기 되어 초라하게 굴러다녔다.

래 그 국수는 그래도 괜찮았다.

멸시받되.. 차마 내쳐지지는 않는 왕따 소년처럼 쌀국수는 그렇게 서럽게 방기 되어 있었다.

쌀국수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남았을까.. 가끔 짐작해 보았지만 굳이 애써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한편으론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의도적인 멸시를 쌀국수의 유통기한이 끝날 때까지 지속하리란 것을..


시간은 쌀국수를 끝없이 압박해 들어갔다. 쌀국수의 생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가거라 쌀국수인지 마라면인지"차갑게 손을 놓을 날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시간 동안

쌀국수는 그저 봉지 속에서 숨 막혀 생의 마감까지 침묵할 작정이었다.

쌀국수와 내 사이의 차갑고 먼 관계를 한 사람은 견디지 못했나보다.

어느날 아내는 내게 무겁게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젠 먹어야 할 것 같아"


작금에 아내의 직업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회복시켜주는 것.

 그녀는 쌀국수와 내 관계도 회복시키기라도 할 작정인지 말없이 물을 끓이고 면과 액상을 넣고 휘휘-저었다.

얼마 뒤 아내가 무언가가 게워낸 듯한 불그죽죽한 그릇을 한 사발 내 올 때까지도 나는 외면을 지속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식탁에 앉아 마침내 쌀국수를 처음 먹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맛이었다.

식초.. 아니.. 상쾌한 맛이 전혀 없이 강렬한 산미만이 느껴지는 면과 국수는 내 입과 혀를 정신을 차릴수 없을만큼 교란시켰다.

이 가공할 신맛은 어디서 나는 것인지 탐색해보니

결국 면과 국물 양쪽 모두다.

을 수용하는 내 모든 감각들이 길을 잃은 아이처럼 미각 피질 여기저기에 부딪치고 넘어졌다.

"혹시 여름의 더운 날씨 속에서 그만 운명하신 건가"짐작해 보기도 하고 "물에 씻지 않아서인가" 짐작해보기도 했지만 어먹을 중국어로 적혀 있으니 답을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사실 내 마음속 깊은곳에선

"중국식품이라 그런가봐."하는 생각이 봉긋 솟아 올랐다.

충격적인 첫 만남 이후 두 번 다시 쌀국수를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은 없으리라 짐작했다.


대략 한 달 즈음 지나서 나는 창고문을 열고 쌀국수를 꺼내 인덕션  위에서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는 물속에 담았다.

"버리면 아까우니까"

가닥 없는 언어를 내뱉으며 정체를 알 길이 없는 액상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면을 넣고 끓인 나 다시 혼란의 식사시간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두 달이 지난 뒤에도

"그럭저럭 생각보단 먹을만할지도.."

그렇게 세 봉지를 끓였다.

세 번째 쌀국수를 냄비에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이제 하나 남았으니 버려도 아깝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말이 무색하게도 얼마 뒤 다시  한번 물을 끓이고 마지막 봉지를 뜯으며 읊조렸다.

"그래도 의외로 먹을 수 있으니까"

의미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갖은 야채를 다듬어 쓸어 넣어 마지막 쌀국수를 끓이고 남은 봉지 쓰레기들을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쑤셔 넣으며 나는 이제 괴랄했던 오랜 인연이 다시는 없으리라 짐작했다.


이틀 뒤 점심시간 전까지는..

그날 점심은 오징어 짬뽕을 끓이는데 쌀국수가 생각이 났다.

불현듯 기갈을 느꼈다.

짜 빠진 중국쌀국수의 맛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갈증이 느껴지고 입이 바싹 말라왔다.

아아..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기름진 오짬의 면발을 후루룩 흡입하며 나는 세차게 부정했다.

나 차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징어 짬뽕은 이 기갈을 충족시키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오지어 짬뽕에는 산도, 향도, 검붉은 고추기름의 고소함도 없었으니...


그날부터 방황의 시간이 이어졌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욕망을 곁눈으로 어렴풋이 흘려보며 며칠 동안 수많은 라면을 스쳐 보냈다. 신라면 진라면 오징어 짬뽕...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봉지를 찢어발기고 물어뜯고 집어던지고 쑤셔 넣으며 어떤 라면이 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 탐색했다.


그리고 오늘 밤... 아내에게 라면하나 끓여서 둘이 나눠 먹을까 제안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나직이 읊조렸다.

"아아..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알.

먹을 수 없게 되고 나서야 나는 깨닫았소.."

고집스러운 내 입은 끝내..그리고 차마 지금도 그 쌀국수가 맛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내 마음은 그 맛을 기억하고 소리친다.

'졸라 맛있어!'

내 낮은 침 삼키는 소리가 내 단상 속에 끼어들 때면 내 미각의 기억엔 하나둘 불이 켜진다.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 켜지는 파란 블루라이트 빛을 안면으로 세차게 맞으며 오늘은 쌀국수를 주문하리라.

쌀국수 내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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