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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Dec 03. 2021

빵껍질 라이프

어느 날 같은 건물의 외지고 작은 상가에 대만 샌드위치 브랜드의 본점이 생겼다.

브랜드는 오리지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 1년 만에 87개의 가맹점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는데 생산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매장에서는 판매만 할 뿐이었는데도, 광고를 목적으로 하는지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빵껍질을 담은 쓰레기봉투를 복도에 전시해 놓았었다.

하필 그곳은 엘리베이터 입구 앞이라 매일 아침저녁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마다 우두커니 서서 그 빵껍질들을 보았는데  

그 빵껍질들의 잔해를 바라보면 가끔은 어딘가 쓸쓸한 감정이 들었었다.

빵껍질은 누구에게나 그런 취급을 당한다.

봉지에서 꺼내지는 즉시 어떤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 채 도마 위에서 무참히 썰려 저렇듯 쓰레기로 전락하고야 만다.

마치 존재자체가 무의미한것처럼..

문득 기시감과 함께 옛 추억이 떠 올랐다.

흔히 말하듯 가난과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 없다.

도저히 참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가난은 사람을 조급하게 하고 조급한 사람은 여유가 없고, 멀리 보지 못하기에  그릇된 판단을 하기 쉽다.

 그릇된 판단으로 20대중반엔 건설현장에서 중노동을 했다.

당시의 최저시급은 약 2,840원이었는데 하루 10시간을 일해도 28,400원밖에 벌지 못했다.

한달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300시간을 일해도 85만원이 고작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그 상황을 타개하고 내 목표를 위한 밑천을 가지고 싶었던 나는 최단시간 안에 타인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체력과 인내심만 있으면 그것을 바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벽돌 운반을 선택했다.

건설현장에서 가장 고된 노동이라는 벽돌 운반만이 도제기간없이 바로 기술자에 준하는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업체사장이 너무 악랄했다.

우리는 그자의 밑에서  고작 빵 몇 조각을 얻어먹으며 피라미드를 쌓았다는 고대 이집트의 노예처럼 일했다.

해가 있으면 폭염을 그대로 맞았고, 폭우가 쏟아지는 장마에는 아무도 없는 현장에서 비를 맞으며 500kg이 넘는 벽돌 운반수레를 옮겼다.

아침이면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곱은 손가락과 팔을 입으로 당겨 억지로 펴야 했고, 낮동안 마시는 7~8리터의 물은 한 방울 남김없이 땀으로 배출되는 고강도의 노동이었다.


매 순간 차라리 쓰러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힘이 들어서 밥 먹을 힘도 없어 밥대신 물을 윤활유 삼아 공장 양산빵을 삼키곤 했다.

사람들은 그나마 당도가 낮은 식빵을 자주 먹었는데.. 모두들 빵 테두리는 먹지 않고 버렸다.

나는 빵을 물과 함께 대충 삼키고 남는 시간 동안은 같이 일하던 미련한 사람들의 개인사를 캐묻곤 했다.

누군가는 '하루 벌어 하루 산다'며 비웃기도 하는 그들에게도 다들 꿈 하나씩 있었다.

그 꿈이 바로 인간으로 버티기엔 너무나 힘든 그들의 하루를 지탱하게 하는 지지대였다.

나 역시 "내 사업체를 가지는 꿈"을 생각하며 견뎠다.

우리의 운반량은 타 업체의 두배를  상회했는데..

덕분에 단 2명이 하루에 약 3.5만 장의 벽돌, 모래, 레미탈 등.. 하루에 약 90~100톤의 건축자재를 손으로 운반했다.

그렇게 일하면  업주는 건설업체로부터 일 32만 원을 받고 우리는 일 9만 원씩을 받았다.

2.5kg 정도 무게의 벽돌 한 장의 운반비용은 9원 정도.

0.1원 단위의 입찰경쟁이었기에 때론 7원을 받고 옮길 때도 있었다.

7원.. 아..건 참 가치 없는 일이었다.

가치가 없다 보니 그 악덕업주는 우리의 가치를 빼앗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가치를 충족시켰다.

노동력을 착취하는것으로도 모자라 수개월치 임금을 횡령했다.

급기야 4~500kg에 달하는 벽돌에 깔린 내 병원비조차 횡령했던 그는 마침내 일개 말단 노동자인 내 손에 의해 그가 거래를 맺은 모든 아파트 현장에서 쫓겨났다.

그만큼 가치가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응징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쫓겨나고 생긴 빈자리들을 눈 사이와 미간이 넓고 코가 길고 입이 합죽해서 소처럼 생긴, 또 소처럼 일하던 나의 동료 조 씨 아저씨가 이어받았다.

조 씨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 강렬한 중노동의 짧은 짬에도 그는 강렬한 햇볕 아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조끼에 상시 휴대하는 성경을 꺼내서 보았고 힘들 때면 온 현장이 떠나가라 찬송가를 불렀다.

지나가던 인부들이 "미친 예수쟁이"라 비웃어도 그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헌데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 모든 순간에 그는 말을 아꼈다.

소를 닮은 그의 인상처럼 그는 과묵하고 순박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가 도움을 청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고 이전의 악덕업주에게 착취당하던 만큼의 노동을 에누리 없이 그세게 베풀었다.

나는 때론 조 씨와, 때론 일꾼 김 씨와 일했다.

40대 중반의 김 씨는 해리포터와 거의 흡사한 동안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김 씨는 해리포터를 의식해서인지 동그란 철테안경을 끼고 다녔는데 지능이 좀 떨어지는 노총각이었다.

결혼은 언감생심 꿈도 안 꾼다는 그는 반지하 자취방에서 혼자 작은 티즈를 키우며 살았다.

그는 여름밤엔 강아지를 데리고 엄마가 알바를 한다는 노래방에서 에어컨 바람도 쐬고, 좋아한다는 노래 부르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하루의 낙이란 곰팡이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가득찬 반지하 자취방에서 저녁을 챙겨 먹고, 점심에 남겨서 가져간 빵을 맥주와 함께 간식으로 먹고 난 뒤. 개를 안고 몸을 웅크리고 누워 tv를 보다 잠이 드는 시간이었다.

그의 꿈은 엄마와 작은 노래방을 차려 함께 일하는 소박한 것이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 4시에 만났는데,

이른 시각에 나오는 조 씨는 믿기 어렵게도

늘 12시에 잠에 든다고 했다.

그는 신비롭게도, 매일 밤 기절할 것 같아도 졸지언정, 최대한 자지 않고 버틴다고 했고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아침에 눈떠서 또 이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라고 대답했다.

김씨와 내가 크게 공감하는 한편, 그런 일을 굳이 참으며 지속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소 같이 생긴 그는 소 같은 얼굴을 보기 좋게 일그러뜨리며 쑥스럽다는 듯 입을 떼어 "조금만 더 고생하고 귀농해서 소를 키우며 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일하는 것이 무서워서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버티는 끔찍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별 볼 일 없는 인생들의 별 볼 일 없는 작은 꿈들.

우리는 흡사 빵껍질같은 존재들이었다.


몇 년 전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 '조커'에서는 상담센터가 폐쇄되는 변화가 생기자 비루했던 조커의 상담사가 비로소 조커에게 냉정한 진실을 이야기하게 된다.

"누구도 당신같은 사람의 삶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아요"

어쩌면 조 씨는 물론 김 씨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 꿈 따위는 어쩌면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내가 캐묻기 전엔 말을  아꼈을 것이다.

매일 새벽 현장에 나가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의 장막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는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 서서, 전날 성의 없이 먹고 버려 바닥에 굴러다니는 바싹 마르고 부서진 식빵 테두리를 볼 때면 우리 인생이 이렇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질기고 맛없어진 구운 지 오래된 식빵 껍질 같은 삶.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바닥에서 소멸되어 가는 덧없는 존재.

때론 가슴 아프게 슬프고, 가끔은 노여웠다.


늦은밤 베이킹을 하면서 그 심상에 굳이 의미를 부여해 본다.

많은 사람들에겐, 질기고 텁텁해 버리고 싶고 어떠한 가치도 없는  빵껍질이 없다면 빵은 존재할 수 없다.

빵은 구조적으로 빵껍질(크러스트)과 속살(크럼)로 구분된다.

베이커가 성형을 하면서  텐션을 주면 껍질쪽엔 '가스를 가둬 주는 그물 조직인 글루텐'이  압축된다.

여러 레이어가 압축된 껍질은 오븐의 이글거리는 열기 속으로 내 던져져 뜨거운 열을 직접적으로 맞는다.

껍질은 이스트가 포도당을 분해하며 만들어낸 가스의 팽창을 막아주고 글루텐과 가스 사이를 채운  호화된 전분이 고화되어 구조가 형성될때까지 버텨준다.

또 수분이 증발하는 시간 동안 묵묵히 자신이 품은 속을 보호한다.


탄생하는 동안에도 크럼을 지켜온 크러스트는 완성 후에도 오븐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모진 세상의 공기에 노출됨과 동시에 시작되는 전분 퇴화라는 노화현상을 막아주 속살(크럼)을 보호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븐 속에서, 또 공기 속에서  가장 많은 시련을 겪어낸 빵껍질만이, 반죽 속 아미노산과 단백질 따위의 유기물로 마일라드 반응을 일으키고 당류를 캐러멜화 시킨다.

그 덕에 가장 복합적이고 다양한 맛을 품고 있다.

그윽하고 향긋한 빵 냄새 역시 껍질이 일으키는 이 반응들 때문에 생긴다.

즉, 질이 없으면 빵냄새조차도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빵껍질을 토막 내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빵껍질이 없으면 빵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고 빵의 정체성을 구현할 수조차 없다.

그래. 빵껍질은 보잘것없지 않다.

보잘것없는 취급을 당해서 보잘것없어 보일뿐이다.

빵껍질이 있기에 빵이..

촉촉한 샌드위치가..

우리 아이들이.. 

세상이 존재한다

빵껍질 같은 삶을 살던 우리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순 없지만...

이 춥고 적막한 밤.

오븐에서 꺼낸 빵껍질에 정성껏 버터를 바르며 짧은 기도를 해 본다.

어느 농장에서 조 씨가  내일 아침 줄 소여물을 생각하다가 아침을 두려워하지 않는 곤한 잠 속으로  편안히 빠져들기를,

어느 작은가게 따뜻한 난로 앞에서 김 씨가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엄마와 맥주 한잔 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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