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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Dec 02. 2021

빵.인간을 구하다

그 빵은 빵이 아니었고 그 빵맛은 뻥이었다.

어릴적엔 성당을 열심히도 다녔다.

성당에 늘  존재했지만 한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그것'의 실체를 처음 인지 한 것은 언젠가부터 같이 미사를 보게 된 사촌 형 때문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사촌 형은 매주 주말마다 미사 도중 벌어지는 어떤 의식에 참석했다.

그 의식을 치르는 시간이 되면 형은 복도로 나가 줄을 서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신부님이 손에 든 작은 항아리에서 꺼낸 그것을 비밀스레 받아 입에 넣고 돌아와 과장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것을 음미하곤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맛은 어떤지를 물으면 형은 '세상에서 가장 끝내주는 맛'이라며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세상 제일의 맛이라니..대체 어떤 맛이란 말인가.. 나는 그저 형의 입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지의 맛과 질감을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 뒤부터 나는 주일 성경학교에 나가 기도문을 외우고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수련의 끝에는 그 '끝내주는 맛'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수련에 임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만화 속에 나오는 마법사라도 된 것처럼 흰 반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빨간 빵모자를 눌러쓰고  빨간 망토를 두른 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첫 영성체라 불리는 의식을 치렀다.

의식의 끝에 신부님은 왕이 중세기사에게 작위를 수여하듯 물을 찍어 바른 손으로 의식을 마무리해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것을 맛 볼 기회를 얻었다.

처음 그것을 먹은 날. 나는 형이 그동안 나에게 거짓말을 해 왔다는 사실을 게 되었다.

그것의 맛은 고작  동네 문구점에 파는 전분을 기반으로 한 불량식품 계열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망했었는지 어떤지 감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첫 영성체의 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맛볼 수 없었다.. 죄를 저지른 몸으로는 그것을 내 몸안에 모실 수 없는데 나는 매주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달리 용돈을 받지 못하던 나는 성당 헌금으로 받는 몇백원을 중 일부를 불량식품을 사 먹는데 쓰곤 했었는데 불량식품이 '그것'보다 맛있고 양도 많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 어린이의 죄를 쌓아갔다.


 죄의식은 내 양심통장에 착실히 쌓여갔다.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하느님이 두려웠지만 보이지 않는 시선은 견딜수 있는 법이었다.

그러다 신이 내 중첩된 죄의 무게를, 다른 아이들의 죄와 저울질하여 하느님이 나를 벌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한계의 순간을 맞이하면 가득 찬 휴지통을 비우듯 고해실로 가서  고해성사를 했다.

내 작범죄를 든든히 백업해주던 그 작은 박스는 굉장히 편리한 곳이었다.

미사전에 미리 가서 그 작은상자에 불이 켜지면 들어가 그동안의  범죄행각을 말하면 신은 내 죄를 사면해 주었고 죄를 용서받았음을 알려주는 신부님의 음성을 듣고 그곳을 나서면 무겁던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날은 죄가 없어 깨끗해진 몸으로 '그것'..즉 '성체'를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것을 나누는 의식은 늘 미사 의식 중간에 거행되었다.

복사라 불리는 신부님의 조수인 내 친구가 제단에 매달린 종을 치면 영롱한 종소리가.. 데앵~하고 성당의 높고 넓은 천정으로 울려 퍼졌고.. 그 소리의 여운이 다 사라지기 전에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엄숙히 읇조렸다


"예수는 빵을 들어 찬양한 다음. 빵을 쪼개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셨다.

예수는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올리고

제자들에게 주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마셔라.

이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한 내 피니,

사람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내가 흘린 것이니라.

너희는 나를 기념할 때 이것을 행하라! 하셨다."


그렇다. 내가 매주 마음속으로 불량식품과 저울질해 봤을 때 백전백패하던 그것은 예수님의 몸이었다.

아니 사실은, 예수의 몸 상징하던 빵을 변형 시킨것이라고 했다.

어린시절 나는 항상 그게 궁금했다.그 작고 폭신하고 하얀 과자가 빵이라니..?

내게 빵이란 갈색이고 두툼하고 안에 팥이나 크림이 든 커다란 덩어리들의 총칭이었기에

더욱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빵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은 나중에 자라 베이킹을  뒤였다.


역사적으로 빵의 발명은 발효시킨 빵의 탄생으로 본다.

실무현장에서도 발효를 거친 것을 빵으로,

발효되지 않은 것은 과자로 분류한다.

따라서 성당의 '그것'은 엄밀히 빵이 아니다.

하지만 고찰해 보면 발효란 외부요인에 의해 작용해 그 형태와 성질이 바뀌는 것을 의하고 예수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던 시점은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고 다시 부활하기 전이었으므로  발효되어 그 성질과 형태가 변화한  밀가루 음식보다는 발효되지 않은 밀가루 음식이 부활 이전의 예수를 상징하기에 더 적합하다.

그런데 참 얄궂 일이다.

농경문명의 상징과도같은 빵이, 어쩌다 유목민의 왕인 예수의 상징이 되었단 말인가..!!!??


인간은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부를 축적하고 문명을 번성시킬 수 있었다.

농경은 고통스럽지만 씨앗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에 가장 확실한 생존수단이었다.

씨앗은 밀이 되고 밀은 가루가 되고 가루가 음식이 되고 그 음식이 다시 한 단계 더 진화하여 빵이 되었다.

의 발명 이전의 빵은 빵은 빵이로되 빵이 아니었다.

진정한 빵을 최초로 발명한 집트인들

나일강이 가져다 준 풍요를 바탕으로 빵을 발명했다.

나일강은 반년 간 천천히 범람하며

아비시니아 고원의 비옥한 진흙을 퇴적시켜 주었고 이집트인들은 자연이 쟁기질을 하고 비료와 퇴비를 뿌려 준 땅에 씨를 뿌리고 수확만 해도 풍요로운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파라오는 그 안정된 풍요에 숟가락만 얹고 스스로 신이 되어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너무나도 비옥했던 이집트는 훗날 로마 황제의 사유지가 되어  로마 국민의 1/3을 먹여 살리는 곡식창고로 기능했다.

파라오가 누리던 풍요를 로마 황제가 가져와 무소불위의 권력의 근간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환경 덕분에 다른 민족들은 생존을 위해 남김없이 반죽을 구워 먹던 시기에

이집트인은 반죽도 남아돌아 남겨 두었다.

수화된 밀가루 반죽에 대기중에 떠 다니던 '젖은 밀가루를 좋아하는 효모'들이 들러 붙었다.

효모는 밀가루 내부의 당과 단백질을  분해하여 성질을 변화시켰다. 생명활동의 결과로 가스를 발생시켜 형태도 변화시켰다. 시간이 더 지나자 밀가루 반죽은 점점 시큼해졌고, 사워도우가 되었다.

최초의 베이커는 집으로 돌아와 그 부풀어 오른 시큼한 반죽을 발견하고 맛을 보았을 것이다.

뜻밖에도 상한 음식의 그것이 아닌 크리미하고 상쾌한 산미의 사워도우를 맛보고 기대감에 부풀어 베이킹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븐안에서 드라마틱하게 부풀어 오르는 변화를 관찰하게 되어 마침내 빵을 발효시키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인들은 빵을 발명했다.

발효는 아직까지도 영화나 소설에서 신비화되는 이집트인들의 마법적 이미지의 시초가 되었고

빵의 발명 이후, 부풀린 빵은 이집트를 통치하는 기반이 되고 이집트인들의 삶이 되고 급기야 모든 인간의 식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런 농경국가 이집트에 유목민족이던 유대인이 요셉을 따라와 정착했다가 그만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오욕의 세월을 견디던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은 모세다.

모세는 바다를 갈라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그날을 유월절로 정하고 발효시킨 빵을 먹지 말라 명했다.

모세가 정한 빵에 대한 핍박은  그들 민족을 노예로 부린 농경민족에 대한 증오심이 발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모세뿐 아니라 모세와 유대교의 신 '야훼'도 이 농경 문명의 상징을 철저히 증오했다.

야훼는 발효된 음식을 일절 제물로 받지 않았으며, 유월간 발효된 빵과 술을 먹은 유대인에게는 잔혹한 죽음을 내렸다.

기묘하게도 고대 문명의 수많은 신들 중 오직 야훼만이 농사를 낮잡아 보았다.

야훼는 에덴동산의 아담을 쫓아내면서도 "네 얼굴에 땀을 흘려 빵을 먹으라"하며 저주했고,

 동생 아벨을 죽여 인류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는 카인은  농부였다.

그런데 애초에 인이 동생을 질시하고 끝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계기는 야훼의 노골적인 차별이었다.

야훼는 유목민인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고

농부인 카인의 제물은 늘 찬밥취급했기 때문이다.

또,아벨은 성실하고 선량하기 그지 없는데 반해  카인은 행실이 불량하게 묘사되는데  야훼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수밖에 없다.

애초에 유목민의 삶의방식은 절대신이 정해놓은 환경에  순응하는 것.

주어진 풀을 따라 가축을 먹이며 떠도는 것이다.

신을 따르는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반면 농경민의 삶은 신의 뜻을 거스를 수 밖에 없다.

주어진 씨앗에 만족하지 못하여 개량하고

주어진 땅에 만족하지 못하고 땅을 개간하고 가꿔 비옥하게 만주어진 물에 만족하지 못해 물을 저장한다.

주어진 날씨에 굴복하지 않고 맞선다.

절대신에게  모든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유목민과 달리 농경민은 절대신에게 맞서야 살아남고 번성하는 것이다.

그러니 신의 입장에선 건방진 농사꾼 카인을 미워할 수 밖에..

훗날 세계를 지배하게 된 로마인들은 숱한 유목민족들을 말에서 끌어내리고, 지팡이를 빼앗아 쟁기를 들려 농사를 짓도록 강제했고 유대인 역시 예외는 아니라, 유대인은 농경민족에게 핍밥 당하는 저주의 역사를 다시 반복하게 된다.


손에서는 지팡이를, 품에서는 양을 빼앗기고 말에서 내려져 지팡이 대신 쟁기와 보습을 들고 땅을 일구던 유대인들은 유목민의 정체성을 말살당하고 강제로 농사를 지으며 이집트에서의 굴욕을 복기한다.

그뿐 아니라 혹독한 노동으로 얻어지는 것은 모두 착취당해 늘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렸다.

이집트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농사는 그야말로 저주 그 자체였던 셈이다.

당시 로마 지식인들의 기록을 보면..

기아를 신화 속 공포쯤으로 묘사하는데..

현실 속 피지배계층들.. 즉 유대인들은 육체적, 정신적 기아에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바로 그 암흑의 시기에, 구원자- 청년 예수-등장한다.

예수는 스스로 야훼의 아들임과,

빵임을 자처하며 구약시대에는 양립할 수 없었던 두 가지를 동시에 주장했는데 실제로도 예수는 빵.. 혹은 농경과 닮았다.

신약성서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를 필두로 한 복음전도사들은

예수의 생을 태양년과 태양의 이동과 일치하도록 일대기를 정리하였으며

삶의 여정은 밀과 같은 한해살이 식물과 관련지어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이며 마구간 역시 농가의 상징이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잉태되었다는 상징 역시 작물의 생태와 유사하다.

식물의 수정에 대해 알지 못하던 고대인들에게 작물의 결실은 수정 없이, 유일신과 유사한 태양만으로 잉태되는 신비한 생명같이 보였을 것이다.

생명이 스러지고 난 뒤 남은 씨앗은 식물의 주검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 씨앗을 다시 땅에 심었을 때 혹은 땅에 떨어진 씨앗 위로 식물이 스러져 죽음의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다시 푸르게 자라나 올라오는 것은 흡사 죽어 묻힌 뒤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예수의 부활과 흡사하다.

빵 5개, 물고기 2마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전설 역시 적은 양의 곡식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발효 제빵기술과 닮았고,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직전 머문 시련의 겟세마네는'기름을 짜는 장소'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농민들에게 고통의 상징이었던 곳이다.


예수의 살과 피라는 빵과 와인 둘 모두는 사실 농경의 최종 결과물이다.

예수의 피라던 와인 역시 발효의 산물이므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와 닮아있다.

발효를 뜻하는 fermentation은 원래 끓어 오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술의 발효 역시 썩은 줄 알았던 죽은 과일에서 새로운 생명 -효모-가 끓어 오르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과 닮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당수의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유가 안정적으로 양조 재료를 공급 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 주장은 상당히 예수와 닮았다.

피가 살을 만들 듯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와인이 예수의 육신을 상징하는 빵을 만드는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국 농경의 상징들과 닮은 예수는 빵을 저주로 여긴 유대인들에 손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인간의 죄를 씻고 새로운 계약을 맺어 인류를 구원했다는 예수.

어쩌면 그가 맺었다는 새로운 계약은..

야훼가 농사와 결부시킨 저주를 푼 것일지도 모른다.

혈당때문에 빵먹기를 주저할때면 예수의 음성이 들리는듯 하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으라!"


예수는 구세주와 빵을 자처했고 결국 예수와 빵은 인간을 구원했다.

나아가 인간은 빵으로 타인을 통치하고 빵으로 타인을 지배하고 빵으로 더 멀리 더 넓게 번성했다.빵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빵을 위해 살았으며 빵으로 인해 살아 남았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내가 곧 빵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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