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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Nov 30. 2021

매운맛을 강요받는 아이들

매일같이 세상이 맵다는 참교육을 당하는 아이들

품 안에서만 키우던 아이들이 어느새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교육의 장소임과 동시에 부모로부터 벗어나 시작하는 작은 홀로서기의 장이 된다.

아이의 작은 홀로서기를 지켜보며 어느 정도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부모로서의 자연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하교 후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며 불안함을 제거하려 한다.

그런데 아이는 상세한 이야기를 잘하지 않으려 들지도 않고 혹은 표현이 미숙하기도 하기 때문에 아이의 학교생활은 막연히 짐작해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이유는, 교사와 공립기관인 학교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받아야 할 공교육 기관은 신뢰를 일방적으로 무너뜨리기도 일쑤다.

오늘 아침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아침식사시간 동안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큰아이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는 맨밥만 먹었어."

깜짝 놀라 이유를 물어보니 반찬이 모두 매운 것뿐이라 밥 이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일이 엄청 자주 있다길래 수소문해 보니 학교 홈페이지에 급식 사진이 올라온단다.

무거운 마음으로 급식 카테고리에 게재된 매일매일의 급식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한장 한장 급식사진을 넘길수록  분노가 누적되어 석달치 급식을 전수조사한 뒤에는 깊어진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4일 연속 나온 6,7세 유아 급식

분노를 참으며 최근 3개월간의 급식 사진을 꼼꼼히 체크하며 통계를 내 보았다.

9,10,11월 이렇게 최근 3개월간의 급식에서 제공된 찬은 총 219찬(소스와 국물류 포함)

그중에서 매운맛으로 만들어진 찬은 총  152가지였다.

전체 찬의 70%가 매운 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날은 '매운맛만으로' 구성된 날도 있었는데 이런 날이 3개월간 전체 급식일 53일 중  48%에 해당하는 24일이나 되었고, 심할 때는 연속 5일간 매운 음식'만' 제공되기도 했다.

캡사이신의 통증에 무뎌지지 않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 이틀 중 하루는 아예 굶고 온다는 결론이 나온다.

6,7세 유치원생과 1.2학년 저학년의 학생들 중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은 '사실상' 급식을 제공받지 못한 셈과 같다.


무딘 나보다 섬세한 엄마들이 이걸 좌시해 왔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아 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지난 10일. 한 시민단체의 학부모들이 인권위를 상대로 '매운 급식은 사실상 아동학대에 다름 아니다'라는 내용의 진정을 냈다.

이들의 진정을 두고 입장을 표명아동인권 관련 시민단체 회장의 발언을 보면 우리사회가 아동의 인권을 바라보는 인식수준이 얼마나 미개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명했다.

"매운 급식이란 매운맛을 맛볼 기회를 제공한 것일 뿐이며, 아동에게 매운맛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편식을 강요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진정인들의 행태야 말로 아동학대다. 자전거 타는 것도 넘어지고 다치며 배우듯 음식도 마찬가지.. "

덧붙여 그는 인권위 진정서에 첨부된  고춧가루 범벅의 음식들을 가리켜 "저건 사실 케첩일 수도 있다"는 이해하기 힘든 발언도 했다.

기가막힐 노릇이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이전에도 이런 문제제기가 꾸준히 있어 왔으, 그에 대한 기관의 답은 '우리 음식의 주를 이루는 매운맛을 참고 적응하는 것이 좋다'는 식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인권의식의 문제다.

혹은 고춧가루가 주를 이루는 한식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만들어낸 왜곡일 수도 있고

또는 '매운맛'이라는 표기가 불러일으킨 착시일 수도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매운맛은 ''이라 이름 붙어 있을 뿐 사실 통증의 다른 이름이다.

다른 맛과는 달리 미각 수용체가 아니라 통각 수용체가 감지한다.

공교롭게도 지난 11월 4일 노벨상 시상식에서는 미국의 데이비드 줄리어스와 아뎀 파타푸티언이 고추를 먹으면 왜 통증이 수반되고 입과 속이 뜨거운지를 밝히기 위해 사이신의 작용기전을 연구해 온도와 촉각 수용체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렇다 매운만은 통증이란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이 정도는 먹을수 있어야지 한국사람"이라는 식의 미신적 신앙과 결이 다르다.

우리 음식의 매운맛을 담당하는 고추에는 매운맛의 근원이 되는 캡사이신 성분이 들어있다.

캡사이신이 입에 들어가면 약 43도 이상의 온도의 음식물을 섭취할 때와 동일한 통증이 유발된다.

또 다른 문제는 마늘, 양파, 고추냉이 등의 휘발성 매움과는 달리 고추의 매움은 비휘발성이라는 데에 있다.

고추는 식도를 통해서 소화기관으로 이동하여 3시간에 걸쳐 80%가 혈류에 흡수되지만 20% 정도는 흡수되지 못하고 소화기관의 모든 경로에 걸쳐 통증을 가하고 지속시킨다.


그러므로 통증을 가하는 식단제공하며..

되려 매운맛을 맛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식의 모 아동인권단체 대표의 무식한 발언은,

통증을 참지 못하는 것을 한낱 편식으로,  

그 통증을 호소하는 아동을 반찬투정쟁이로,  무분별하게 가해지는 통증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보호자는 아동학대범으로 전락시키는 교묘한 정치적인 화법이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매운맛을 미각의 일부라 치부하는 식문화에서 비롯된 왜곡된 상식이 빚어낸 끔찍한 참사다.

상식이 없다면 상상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으니 공감능력이 없고 그러니 저런 궤변을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늘어 놓는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그리고 현장이 바뀌지 않는 것, 이런 문제제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까닭을 고찰해 보면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이 사회 구성원 모두 가운데에 가장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찰해 보면 이것은 어디서 많이 본 형태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노동자,하위계층을 망라한 약자들에 대햐 차별과 강요,일방적인 희생들이 그것이다.

약자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 다수 혹은 강자를 위해 소수 혹은 약자가 침묵하고 희생되어야 했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그 시절엔 성희롱, 성추행 역시 사교적인 행위 혹은 친근함의 표시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었고 바뀌어 가는 중이다.

결집이 용이해지고 목소리를 내는 환경이 개선된 약자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결집도 안되고 목소리를 낼 수도 없다.

아니.목소리를 내는 방법도 아직 모른다.

하여, 그매운 급식만 가득한 식판 앞에서 매일같이 절망하고 주린 배를 공장에서 찍어낸 과당의 간식으로 달래며 침묵할  따름이다.

그런 아이들을 향하여 무려 아동인권단체를 대표한다는 자가 교만스레  그 아이들의 고통침묵을 한낱 편식과 반찬투정이라고 되려 호통을 치는 억울한 일이 벌어져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이 사회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철저한 약자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한다. 

매운 음식을 제공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매운 음식만 제공하는 것'을 멈추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이기심을 근원으로 한 파렴치한 차별이며 아동학대다.

말없이 굶주릴 것을 강요하는 신체적 학대이며 밥을 먹지 말라는 물리적 방임이다.

"유난 떨지 말라", "우리 식문화"라며 통증을  강요하는 모두가 공범이다.

한편으론 참 슬픈 의문이든다.

고춧가루범벅의 식단을 강요하면서 그  당위를 실체없는 '우리 식문화'에서 찾는다면 

우리의 식문화는 단지 고춧가루의 통각이 동반하는 엔돌핀 분비에 기대고 있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우리 식문화와는 반대로 우리 사회 시스템은 약자를 위해 다수가 배려하는 방향으로 구축되어 있다.

장애인이 거주하지 않더라도 가장 편리한 주차구역을 장애인 우선주차구역으로 항상 비워 두어야 하는 법이 좋은 예이며

아이가 다니지 않더라도 항상 30km 이하로 다녀야 하는 어린이 보호구역 지정 교통법도 그러하다.

최근 정부는 보행자를 보호하겠노라고 전체 주요 도로의 주행속도까지 종전 60km에서 50km로 하향 조정한 바가 있.

보행자가 다니지 않는주요도로의 속도마저도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10km하향시켰지만,

어린이 보호구역의 제한속도 30km는 종전의 30km를 유지하고 있는것을 보면 어린아이들의 안전은 항상 후순위인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학교밖 도로는 최소한  약자를 보호하기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도 있다.

그동안 약자의 희생을 강요한 학교안 급식은 이제라도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을 지향해야한다.

이 모든 사태는 공감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장착하는것이다.

강자의 입장이 아니라 회에서 가장 미숙하고 약한존재의 입장을 고려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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