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고 불러 볼래?"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설거지를 하던 그녀가 나를 내려보며 자상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쪼뼛거리며 서서 한참 망설였다.
-엄마-
그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내는 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속으로 입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엄마가 아닌데 왜 엄마라고 부르란 거지?"
그녀는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재차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의 엄마가 될 거야"
자상한 표정과 목소리가 네댓 번 정도 채근한 뒤에야 더듬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끄집어 내어 발음했다.
"엄마"
말은 힘없이 흩어졌다.낯설고 부끄러웠기 떄문이다.
부끄러운 마음에 마루로 달려가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다.
힐끔거리며 살펴보니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그대로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가 만들어 낸 창백한 빛이 물들인 차가운 마루바닥이었지만 왠지 모를 따뜻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한동안 내겐 엄마가 없었다.
네 살.
밤바람이 제법 따뜻하던 그 어느 밤 엄마는 집을 나갔다.
나는 좁고 낡은 단칸방에서 엄마의 무릎을 베고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졸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을 등진 검은 얼굴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알아보려 애를써도 도무지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얼굴이 속삭이며 채근했다.
"어서 자.. 어서 자야지.."
불안한 맘으로 자다 깨다 자다 깨다..자다...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을까.
땀에 젖은 몸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땐 엄마가 없다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버지는 늘 그랬듯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나는 누나를 깨웠고 일곱살 먹은 누나는 엉엉 울며 내 손을 잡고 어두운 밤거리를 울며 헤맸다.
오렌지색 조명이 비추는 어딘가 쓸쓸한 어두운 길을 따라 아치 모양의 언덕길을 내려오며 누나와 함께 엄마를 불렀다.
나는 한참을 헤매다가 다리가 아파져 누나에게 칭얼거렸고 누나는 작은 몸을 숙여 나를 업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경계에 이를 때까지 둘이 그렇게 울며 엄마를 찾아 헤맸다.
세계의 경계인 골목 어귀에는 포장마차와 50원을 주면 탈 수 있는 스프링에 연결된 장난감 말이 대여섯개 매달린 리어카가 있었다.
그 앞 보도 난간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데 포장마차에서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와 핫도그를 한 개씩 쥐어 주었다.
그 시절엔 이런일이 흔했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별 질문없이 그저 "불쌍한 것들" 탄식하며 혀를 쯧쯧 찼다.
우리는 보도블럭 경계석에 앉아 설탕과 케첩을 입 가장자리에 묻혀가며 핫도그를 먹고 다시 길을 헤매며 울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돌아오기까지 어린 누나는 용감한 척.나를 지켜 주었다.
엄마가 돌아올거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서른살이 될때까지 "어서 자" 채근하던 그 검은 얼굴의 공백을 채우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중 하나다.
그날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누나와 나 둘 뿐인 시간들이 이어졌다.
건설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일 혹은 연애 때문에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에 한 번 정도 우리가 '큰 아줌마'라 부르던 여자가 와서 차갑고 무섭게 우리를 단속하고 간단한 집안일이나 밥을 해 주고 갔다.
큰 아줌마는 청소거리를 만들면 화를 냈고 때문에 나를 발코니에서만 놀게 했다.
성질 더러운 큰아줌마가 두려웠던 나는 낮동안 차가운 발코니 바닥에서 놀며 누나가 올 때까지 혼자 지냈다.
길고 지루하고 외로운 하루를 의미하는 오전의 옅고 눈부신 햇살이 쓸쓸하고 진한 빛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왔고 그러면 비로소 놀이터에서 놀수 있었다.
끔찍하게 긴 오전과는 달리 동네 아이들과 정신없이 노는 오후시간은 금새 흘러갔다.
해는 순식간에 짙은 핏빛으로 하늘을 물들였고 그 시간이 되면 의례히 아파트로 올라가 창문도 없는 발코니 난간에 매달려 오지 않을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때론 땅거미가 지도록 마지막까지 놀이터에 남아있었는데 그 시간까지 남아있는 아이들은 우리뿐이었다.누나는 그걸 정말 싫어했다.
내가 발끝으로 땅을 툭툭치고 이젠 재미없어진 그네에 매달려 짜증을 부리고 누나도 더 이상 버티기 무서워지면 우리는 5층 집으로 올라갔다.
어둠이 내리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날은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다.
그럴때면 누나와 함께 무슨 뜻인지 알 수도 없는 인디언 숫자를 세는 영어동요가 나오는 카세트 전집을 연달아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불렀고 그러다 지치면 잠이 들었다.
큰 아줌마는 아버지가 준 돈이 너무 적어서인지, 횡령을 했는지 알수 없지만 먹을 것을 잘 주지 않았다.
우린 늘 배가 고파서 놀이터에서 불을 피워 여치나 메뚜기를 구워 먹는 국민학생 형들에게 기웃거리거나 땅바닥에 버려진 과자 따위를 주워 먹기도 했고 바닥에 버려진 껌을 뜯어먹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누나가 달려와 등짝이나 머리를 때리고 얼른 뺏어서 버렸다.
맞아.나는 그 더러운 껌을 빼앗기고 한참을 울었다.
그런 어느 날.아버지는 서울 말씨를 쓰는 날씬한 아줌마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다음주부터 같이 살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된 친엄마는 그녀가 친엄마의 동네 지인이었고 아이와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으며 남몰래 눈이 맞은 둘이 함께 살기 위해 친엄마를 쫓아낸 것이라 증언했다.
우리로썬 그 사실을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새로운 엄마를 맞이하고 의존하게 되었을 뿐.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내게 생긴 새로운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가끔씩 집을 비웠지만 우리의 환경은 예전보다 나아졌다.
나아가 단지 결핍을 채운 존재 자체에 무언가 위안을 느꼈다.
환경설정은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유지가 되었지만 정신적 위안이나 안도감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큰 아줌마는 한동안 집을 드나들며 새엄마의 집안일을 도왔다.
하루는 누나가 학교에 간 사이.
큰 아줌마와 새엄마가 김치를 물에 씻어 상에 놓고 셋이서 밥을 먹었다.
김치를 맛보고 나선 매워서 먹지 못하겠다고 버텼는데 큰 아줌마는 씻은김치가 대체 왜 맵냐고 나를 야단쳤다.
나는 그게 억울하기도 하고 매운 혀가 아리기도 해서 울었다.
그러자 새엄마는 내가 반찬투정을 한다며 머리를 때리다가 회초리를 들어 모질게 때렸다.
엉엉 울며 맞다가 눈물을 삼키며 김치를 먹었다.
<맛>이라 이름 붙은 통각을 내색없이 수용할것을 종용당한 셈이다.
그게 너무 억울했다.
그들의 생각이 어떠하든 내게 그것은 정말 아픈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겪은 강요와 체벌이었다.
"엄마라고 불러봐"
자상한 목소리로 은근히 권하며, 환히 웃던 모습은 어느새,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수시로 매질을 당하거나 체벌을 받았다.
정서적인 학대도 빈번히 있었다.
제때 양치를 하지 않았다고 가위로 '아가리를 찢어버리겠다'며 입안에 커다란 주방가위를 넣고 쩔꺽거린 경험들도 기억난다.
그럴때면 누나는 까무잡잡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곤 손을 비비며, 거대한 주방가위가 입속에서 벌려져 "어바바"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잘못했다고 빌었다.
정말 누나의 '아가리'가 귀밑까지 찢어질까봐 무서웠다.
새엄마는 옆집 사는 엄마는 자기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탈수시켜 버리기 일쑤라고 너도 탈수시켜 버리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옆집 아이처럼 탈수기에 넣고 돌려지진 않았음에 감사했지만 내게도 가히 압도적인 학대가 빈번히 가해졌다.
그것은 물고문이었다.
다섯 살 아이의 잘못이란 게 고작 어떤것이었을까?
채 기억하지 못한 그 잘못을 다그치며 그녀는 욕조에 물을 받곤 했다.
촬-촬-촬-촬-
물 받는 그 소리가 공포스러워서 벌거벗은 몸으로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며 울곤했다.
욕조에 가득히 물이 받아지면 그녀는 나의 작은 몸을 욕조에 담그곤, 눌러 밟아 물을 먹였다.
코와 입으로 매운 수돗물이 잔뜩 역류하고 귓속에는 부글거리는 거품소리와 발버둥 치느라 철벅거리는 물의 소음이 고막을 아프게 찔러댔다.
코와 입으로 물을 배가 부르도록 잔뜩 먹고 나면 욕조 밖으로 꺼내어 져 젖은 몸에 매질을 당했다.
그녀는 이후로도 몇 번인가 나를 더 물고문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어서 빨리 욕조 밖으로 꺼내어져 매를 맞기를 원했다.
매를 맞는 것이 물을 먹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끔찍한 경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것 같다.
그 무렵 내가 가장 즐겨 찾던 놀이터는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가 아니라 쓰레기 더미와 건축 폐기물이 있는 아파트 옆 공터였는데 나는 그곳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 벽돌을 쌓곤 했다.
뭔가 단단한 접착제라도 있으면 돼지 삼 형제 이야기에서처럼 그 벽돌을 쌓아 집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벽돌집을 지어 그곳에서 누나랑 둘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몇 줄 쌓아 올렸다가 살짝만 밀어도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벽돌로는 집을 만들 수 없었다.
나는 내 작은 키보다 낮은 벽돌벽 안에서 어디선가 주운 라이터를 이용해 종이나 검불 따위로 불을 붙여 쬐며 위안을 얻다가 시간이 되면 집에 돌아가곤 했다.
밤에는 컴컴한 방에 누워 벽돌집의 지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늘 고민했다.
물론, 늘 그런 순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면 나는 필시 죽게 되거나 정신병원에 갇히고 말았을테니.
새벽이면 수도에서 긴 간격을 두고 한방울씩 떨어지는 수돗물처럼 학대는 간헐적이었다.
때로는 평온하기도 했을것이고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특히 나는,
조금씩 그리고 확실히 파괴되어 갔다.
한두 해가 흐르고 난 뒤 아버지의 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새로운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어느덧 일곱살, 누나는 열 살이 되었다.
그 즈음의 누나와 나는 잘 길들여진 개처럼 순종적이 되었다.
당시는 일곱 살 정도는 여탕에 드나들 수 있는 시대였고 우리는 주말마다 욕탕에 가서 때를 밀었다.
하루는 새엄마가 자신은 탈의실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잠시 놀다 오겠으니 온탕에서 몸을 불리라고 지시하고 갔다.
동네 아줌마들의 권유로 고스톱을 치게 된 그녀는 우리를 담가 둔 사실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꼼짝하지 말고 몸을 불려라".. 는 말 한마디에 정말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고통스러워 졌다.
가물거리던 누나가 일어서서 있자고 했다.
일어서면 혼난다고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너무 어지러워져서 마침내 일어섰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는 기절해서 물속에 엎어졌다.
온탕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나를 누나가 울면서 불러온 때밀이 아줌마가 건져내고 물을 토하게 했다.
정신이 들고나니 나는 욕탕 밖에 있었고 목욕탕에서 씻던 아줌마들의 얼굴이 둥글게 모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엄마에게 들키면 혼난다".. 며 다시 필사적으로 온탕에 기어 들어가려 했는데 아줌마들이 팔다리를 잡고 극구 말렸다.
괜찮다고 했다.
아줌마들이 안 혼나게 책임져 주겠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라 앉혔다.
어느 아줌마가 바나나우유를 가져와서 내게 주며 계속 권했지만 그 역시 계속 거절했다.
"엄마한테 혼난다" 이유가 그랬다.
그때 새엄마가 아줌마들을 헤치고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말했다.
"더우면 나오지 그랬어~아유 애들이 좀 둔해서 그래요" 이야기했다.
그 말이 너무너무 억울했다.
나오면 혼나기 때문에 있었던 것뿐이니까.
"또 주둥아리가 댓발은 튀어 나왔어!"
돌아오는 길에 새엄마가 야단을 쳤다.
바보처럼 미련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가 망신을 시켰다는 것이다.
여느 일곱 살 아이들에게선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그 사건은 내가 얼마나 학대당하며 살았는지를..
새엄마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 혹은 그녀가 그 집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초기의 그녀는 어두운 밤길에 나를 버리는 상황극을 자주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엄마를 부르며 울며 동네를 헤매곤 했다.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나이가 되자 그녀는 거꾸로 자신이 집을 나간다며 으름장을 놓곤 했다.
십수년을 지겹도록 들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라고 했는데 내가 미친년이지!내가 이 놈의 집구석을 나가 버려야지"
"너네 친엄마는 죽었어! 나마저 너희를 버리면 너희를 키워 줄 미친년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대체 그 말의 어디가 두려웠던 걸까.. 우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상황극은 수시로 일어났다.
새엄마는 담배를 처음 피우던 날도 우리를 앉혀 놓고 으름장을 놓고 줄담배를 피웠다.
"니네 아빠때문에 내가 뒤져 버릴려고.담배 피운다."
참 우습게도 그게 무서웠다.울고불며 싹싹 빌었다.
대체 그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 꼴을 당해야 했던 것일까..?
그땐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와 어떤 대화도 나누는 법이 없었고 어떤 체벌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가끔 보이고 마주치면 의례적인 인사만 하는 사이.
<아빠>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뿐인 사람'이었다.
한번 샌 바가지는 계속 새는 법..아버지는 수시로 외도를 했고 한번은 다방 마담과 제대로 바람이 나 집과 세단을 사주고 밖으로 나 돌았다.
한번도 새엄마를 존중해 준 법이 없었다.
새엄마 역시 아버지로부터 모욕당하고 배신당하고 정서적으로 학대당했던 셈이다.
그 학대는 고스란히.. 아니 더욱 증폭되어 내 어린 몸과 마음에 쏟아졌다.
아버지 역시 간접적으로 그 학대에 동참한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그분은 서른넷에 인연을 끊으려 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아버지때문인지 새엄마에겐 어떤 목표가 생겼다.
어떻게든 우리를 성공시켜 자신의 삶의 보람을 찾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늘 우리를 앉혀 놓고 공부를 시켰다.
그녀에겐 참 실망스럽게도 그녀는 내가 다섯 살때 나를 돌대가리로 분류하고 낙인을 찍어 버렸다.
그 시초는 이렇다.
그녀는 내게 과일로 덧셈 뺄셈을 가르쳤다.
"사과 하나에 사과 하나를 더하면 둘이야"
"귤 두 개에서 귤 하나를 빼면 하나야"
그게 좀처럼 이해가 안 갔다.
납득이 가지 않아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과 하나는 늘 그렇듯 8조각도 6조각도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사과 두 개는 2개가 아니라 16개도 될 수 있었다.
귤은 여러 조각이 뭉쳐진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있었고 귤 두 덩어리에서 한 조각만 뺄 수도 있었다.
그럼 여전히 귤은 두 덩어리였다.
그런 생각을 이야기하며 반론을 제기하고 수긍하지 않자 머리를 쥐어 박혔다.
"살다 살다 너 같은 돌대가리는 처음 본다"
나는 늘 돌대가리였고 그래서 새로운 동네에서 생긴 그룹에서도 우리보다 훨씬 어린 아기들과 비교당하며 모욕당했다.
"준석이 좀 봐.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완전히 어른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는 애야! 너 같은 건 가서 준석이 똥이나 빨아먹어"
그 동네를 벗어나기까지 6년 동안 수없이 들었던 그 말이 나는 너무너무 너무 싫었다.
상상만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나는 옆집 다섯살짜리 똥이나 빨아먹어야 하는 모자란 존재.
천하에 둘도 없는 돌대가리, 별명은 말로 해선 안 듣고 때려야만 가는 팽이였다.
그녀는 내게 노래도 지어주고 기분 좋을때면 내게 불러주곤 했다.
"팽이 같은 사람~ 때려야만 가네~"
그랬다.
사람이 아니었다.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모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렇다.
<니 새끼가 사람새끼냐?>
자식들 생일엔 전화 한번 하는 법이 없으면서도 자신들의 생일날 오후에 전화하면 듣는 말.
<니 새끼가 사람새끼냐?>
굶어서 뼈만 남은 자식의 얼굴을 보며 생일 선물 안 사왔다고 하는 말.
<니 새끼가 사람새끼냐?>
취직한 직장에 출근해서 일하는 업무시간인지라 심부름을 못 하면 듣는 말.
<니 새끼가 사람새끼냐?>
참 서럽고 억울했다.
"사랑한다."
그 흔한 한마디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어떻게 생각해?"
평생을 통털어 부모로부터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나란 존재와 내 생각은 늘 정의되었다.
우리에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새엄마..
하지만 그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 나보다 내 생각을 훨씬 잘 아는 신과 같았다.
내 생각이 A라도 그들이 B라고 말하면 나는 B가 맞다고 수긍 해야 했다.
"넌 지금 이런 생각을 했을거야!"
"넌 이런 놈이야!"
그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이란 세 가지뿐이었다.
"네"
" 잘못했어요."
"다음부터 안 그럴게요"
그 이외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나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다.
항명이란 있을 수 없었다.
어딜!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제가 한 게 아니고"라 말하는 것조차도 '변명을 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예컨대 "맛있다" 말할 수 없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맛없는 것도 있기 때문에 감히 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니에요"말할 수 없다. 건방진 말대꾸다.
감히!
"갖고 싶다"
인간의 속성중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강력한 욕망이다.
하지만 그 역시 내 평생에 단 한 번도 말해보지 못한 말이다.
왜 일곱살 어린아이는 "갖고싶다"말하지 못했을까..
갖고싶다는 말을 하지 말라 말한적만큼은 없건만 그건 어째서 내게 금기어가 되었던걸까..의문스럽다.
새엄마와 아버지는 신혼 때 우리를 방학 때마다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맡겨놓고 놀러 다니곤 했다.
나에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존재였던 할머니와 함께하는 그 시간만큼은 내겐 참 행복한 날들이었다.
여덟 살 때 친구들이 새로 나온 닌자거북이 장난감을 갖고 놀았는데 그게 너무너무 부러웠던 나는 할머니에게 갖고 싶은 게 있으니 시장에 가자고 졸랐다.
시골 읍내 오일장에 닌자거북이가 있을 턱이 없었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나는 할머니를 조르고 졸라 오일장에 갈 수 있었다.
할머니가 답답해하며 대체 뭘 갖고 싶은 거냐 채근했지만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닌자 거북이가 갖고 싶어요"
왜 그 말을 못 했을까?
그곳에는 나를 억압하는 누구도 없었는데..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고 겨우 용기를 내서
"고무 같은 걸로 된 거.. 그런 거 있어요"
끝내 나에게 설명을 듣지 못한 할머니는 오일장을 한참 헤매다가 결국 고무줄을 몇 봉지 사 주셨다.
"이거라도 사 줄까?"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할 수 없이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햇살을 맞으며 필요하지도 않고 갖고 싶지도 않던 길고 검은 고무줄과, 노란 고무줄 몇 봉지를 들고 할머니 몰래 눈물을 삼키며 읍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끅끅대던 내 숨죽인 흐느낌을 눈치라도 챘는지 할머니는 정류장 앞 500년 묵은 느티나무 앞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구멍가게에서 딸기맛 크라운 산도나 땅콩 맛 캐러멜 따위를 사서 나를 달래 주셨다.
세월이 지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웬일로 선물을 사준다며 큰 마트에 갔을 때 늘 간절히 갖고 싶었던 레고를 사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레고 진열대를 보며 "이런 거 살래?" 묻는 아버지에게, 마음과는 반대로 "갖고 싶은 거 없어요. 그냥 과자 살게요"라고 말했다.
결국 그날 나는 생뚱맞게도 과자 선물세트 박스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갖고 싶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기에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느 새부턴 가는 정말로 갖고 싶은 게 없어졌다.
오랫동안 내게 물욕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잊힌 욕구가 되었다.
그 가혹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무엇도 아니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오랜 기간 모욕당하면서도 모멸감은 지속적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발가벗겨져 복도로 쫓겨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곤 했다.
복도로 누가 나올라치면 입을 막고 숨죽여 계단을 오르거나 내리며 피하고 차마 피하지 못하면 웅크려 몸을 가리고 얼굴을 파 묻었다.
인간의 인격이란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혹은 내 나름대로의 방어가 내 인격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도 도망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환경 속에서 나는 내 나름의 저항 방법과 생존방법을 찾았다.
첫 번째는 머리를 비워 두는 것이었다.
새어머니는 끝없이 나를 모욕하고 조롱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꿈은 포기하지 못했다.
참 기가 막히게도 그녀는 내게 홍정욱의 7막 7장을 읽게 하며 학습을 독려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내가 5학년 때부터 과목별 과외를 시켰다.
"너 같은 구제불능 돌대가리는 학원 가면 쫓아가지도 못해. 옆에 앉혀놓고 백개 알려줘도 하나 입력될까 말까야"
하지만 내게는 강력한 방어기제가 이미 체화되어 있었는데 옆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듣는 척만 하면서 듣지 않고 버티는 것이 그것이었다.
대신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유일한 장소인 머릿속에서 할수 있는 다른 것들을 했다.
나는 한두 시간이 아니라 열 시간도 앉아서 듣는 척 대답만 하면서 공상을 할 수 있었다.
몇몇 과외선생들은 내게 애원했다.
"제발 듣는 시늉만 말고 들어줘 좀!"
하지만 나는 끝끝내 듣지 않았다.
그것이 좋았던 점은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벌을 받으며, 벌거 벗겨져 복도로 쫓겨나서, 베란다에 갇혀서 수많은 벽과 바닥을 오랜 시간 동안 쳐다보았다.
그 안에는 참 여러 가지 완벽한 형태의 형상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벽을 보고 앉아 습관적으로 그 안에서 사람의 얼굴을 찾고 동물의 모습을 찾고 갖가지 사물의 형태와 그림을 찾아 연결하곤 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에도 수많은 그림들이 있었다.
이 기억으로 인해 큰 공감을 얻었던 장면이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데어데블에는 킹핀이란 빌런이 나오는데 갤러리를 찾은 그는 벌로 하얀 벽을 바라봐야 했던 유년기를 기억하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빈 캔버스를 충격에 휩싸여 바라보다가 매입한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그림의 제목은 "눈보라 속의 토끼"
겪어본 사람은 그 제목이 가진 이중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오직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그 무수한 벽속의 그림들 속에 점 혹은 얼룩처럼 숨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으니 말이다.
두 번째 방어는 책을 읽는 것이었다.
책은 내게 좋은 공상 거리를 제공했고 정신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 해 줌으로써 영적인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5, 6세 때는 돼지 삼형제를 읽고 공터에 나가 벽돌을 쌓으며 홀로 사는 것을 꿈꿀 수 있었고,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도 없는 무인도를 찾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정말이지 매일 밤 눈을 감으면 자동재생되는 장면이 있었다.
배를 만들고 먹을 것과 도구들을 챙겨서 무인도로 떠나는 공상.
매일밤 자리에 누우면 머릿속으로 그 여정을 준비하거나 여정을 시작했다.
기묘한 것은 지옥에서 살면서 지옥에 사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내게 늘 주지시켜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멍청하고 게으르고 나약한지를..
또한 세상엔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얼마나 강하고 영리하고 성실한지를..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응석받이였고 그저 팔자 늘어진 인간이었기때문에 오랜시간동안 나는 내가 지옥에서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철저히 파괴되어 있음을.. 정신적으로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음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무엇을 모르는지조차도 몰랐다.
난 그저 내 머릿속의 상상계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체였다.
때문에 실체는 없고 상상만 있는 세계.
그 안에서만 비로소 숨 쉴 수 있었다.
마흔 둘..이 만큼의 세월이 흘러서야 나는 내 삶을 좀 더 냉정히 바라보게 되었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건 나약한 핑계에 불과해" 말하며 때론 외면하고 때론 나 자신을 채찍질하곤 했지만
그것은 핑계도 변명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인과의 흐름 속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부모가 내게 입력한 입력값은 늘 정확한 결과들을 낳았다.
그중에서 유난히 치명적이었던 결과는 중학교때 출력되었다.
약한 짐승은 눈에 띄는 법이었으리라.
악랄하기로 소문난 중학교에 입학한 첫날 나는 바로 사냥당했다.
내 주변을 둘러싼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패거리들은 중학교 등교 첫날.
내 짝을 죽어라 괴롭혔다.
그 폭력적인 분위기가 두려운 한편 불편했던 나는 용기를 내서 "그만해 주면 안 돼? 친구끼리 그러면 안 되잖아" 이야기했다.
아직까지 똑똑히 기억난다.
그들은 잔인하게 웃으며 정확하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 인간이라고 다 똑같은 인간인 줄 아냐?"
타깃은 바로 나로 변경되었고 즉시 잔혹하게 짓밟혔다.
한 6개월을 그들에게 죽어라 맞고 괴롭힘 당하고 맞지 않기 위해 자잘한 심부름을 해줘야 했다.
고작 중1에 불과한 그들은 여선생님들을 교탁 앞에 세워 두고 "나도 한번 먹어보게 대줘".. 라고 외치며 성행위를 묘사하듯 허리를 흔들며 노골적인 성희롱을 서슴지 않고 해 댔다.
그들은 여교사를 앞에 두고 낄낄거리며 여러가지 성행위를 흉내내고 수업시간에 보란 듯이 여교사를 바라보며 바지를 내리고 자위행위를 해 댔다.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은 그들을 체벌할 거라 믿었던 여교사들이 얼굴을 붉히고 못 보고 못 들은척하거나 자리를 피할 뿐 달리 그들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지나가는 여자 초등학생들을 발가벗기고 손가락이나 도구를 사용해서 여자아이들의 성기를 가지고 노는 악마적인 범죄도 서슴치않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학교에서 가장 강한 아이도 그 패거리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나는 더욱 절망하게 되었다.
그런 절망 속에서 나는 두 차례에 걸쳐 담임선생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담임은 처음엔 "친구끼리 친하게 지내야지~"하곤 내 요청을 묵살하더니 다음에 거듭 구조해 줄 것을 요청하자 가해자들을 함께 불러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휘봉으로 나를 매섭게 때리기 시작했다.
"네가 제일 나빠!. 어디서 친구끼리 고자질이야 고자질이!"
세상에..친구라니..!
그 아이들의 비웃음이 귓가에 환청처럼 들렸다.
'친구?인간이라고 다 똑같은 인간인줄 아냐?'
하굣길엔 선생에게 내가 맞는 걸 키득거리며 구경하며 무릎 꿇고 있던 그 물건들이 몰려와 다시 나를 짓밟았다.
"우리 아빠가 변호산데"
"우리 아빠는 의산데"
"우리 아빠가 육성회장인데"
"울 엄마가 선생들한테 얼마씩 갖다 바쳤는지 알아? 병신아"
그제야 나는 왜 선생이 도리어 나를 체벌하고 내 절박한 요청을 무시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절망했다.
그 다음날 나는 책상에 볼펜으로 큰 글씨를 깊이 새겼다.
"개 같은 내 인생"
내 마음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대는 책상을 긁는 소리에 몰려온 놈들은 그 글씨를 들여다보고선 깔깔거리며 웃었다.
"개새끼니까 개처럼 맞아봐라"
철제의자를 들어 후려쳐댔다.
세상은 참 잔혹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내 세상은 온통 가시덤불로 가득차 있었다.
내겐 달아날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다음 날 나는 세상에서 내게 가장 공포스러웠던 존재를 처음으로 무시하고 학교를 빠졌다.
한번 죽어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고 무서웠다.달리 방법을 몰라 공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때웠다.
이틀을 그렇게 나가지 않자 되려 나를 체벌했던 담임이 우리 부모에게 연락을 했다.
우리 부모는 내 예상과는 달리 깜짝 놀라서 그날로 바로 등교를 중단시키고 아버지가 소유한 집들 중에서 때마침 완공된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가 줬다.
아버지의 부가 내 삶을 구제한 유일무이한 순간이었다.
고2 기말고사를 치고 나서야 새엄마는 내가 완벽한 돌대가리이고 지능이 너무 떨어져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모든 과외를 다 끊었다.
나에게 모든 관심이 끊어졌을 때야 비로소 생각이란 게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고3이 되고 5월이 되었을 무렵..
일찍 집에 들어와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 처음으로 미래라는것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인지 모른다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최소한 내가 정말 지능이 떨어지는 돌대가리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수능까지는 6개월남짓.. 나는 나 자신의 학업 상태를 점검했다.
아니..사실 점검할 것이 없었다.
12년간 수업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한심함을 넘어 놀라운지경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초 연산을 제외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내 실력대로 모의고사를 쳐 봤다.
모르는 문제는 아예 마킹하지 않았더니 언어를 제외한 모든 게 0점이 나왔다.
수업 한번 들어본 적 없는데 기묘하게도 지문만 보면 즉시 답이 보이는 언어만이 만점에 가깝게 나왔다.
나머지는 0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파도 하나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상태와 같던 내게 필요한 것은 나침반과 지도였다.
어차피 늦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천천히 며칠 동안 시험일까지의 스케줄을 시간 단위로 쪼개서 계획했다.
그다음은 쉬웠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 갇히는 것이었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시간과 공간의 방'에라도 들어간 듯 선생님의 수업 스케줄과 세상의 흐름과는 별개로 나는 내 스케줄만을 집중해서 소화했다.
모의고사를 쳐도 얼른 1번만 찍고 나와서 내 공부를 했다.
그렇게 무언가에 몰두해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모든 책에는 코피가 얼룩이 졌고, 하도 코피를 쏟아 코를 슬쩍 문지르기만 해도 코피가 났다.
새엄마는 그 무렵에 내게 가장 잘 대해 줬다.
친엄마라면 이렇지 않을까 싶으리만치.
수학만은 독학이 불가능해서 과외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새엄마는 동네 부자 엄마들에게 소문난 고액 과외교사를 섭외해서 내가 요구한 3개월간 과외를 시켜 줬다.
나는 교사가 정석을 두어번 반복해서 풀어주는것을 구경하는것으로 6년치 수학공부를 끝냈다.
나머지는 6년 치 학업을 교과서만 보고 6개월 동안 독학했고, 그해 겨울 수능날 400점 만점에 340점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암기과목은 전부 만점이었다.
그날 나는 19년 평생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돌대가리가 아니었다.
지능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기쁨은 잠시였다.
애매한 성적에 맞춰서 간 대학은 내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엇이 될지도 몰랐다.
끈 떨어진 연처럼 그저 바람 부는대로 힘없이 날아다니다가 바닥에 떨어져 비에 젖고 찢어진 채 나 뒹굴었다.
무엇보다 갑자기 닥쳐온 선택의 자유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을 걸친 부모로부터 오직 계절별로 두어벌.
소위 말하는 "입고 벗고"할 옷만을 지급받은 채 살아온 나로선 한낱 옷도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 무렵은 실로 혼돈의 시기였다.
혼돈은 급격한 정신적 성장의 결과였다.
나는 서서히 정신적 성장에 따른 결과인 반항이란 걸 제법 하게 되었고 하루는 새어머니와 언쟁을 벌였다.
내가 덩치가 커지고 운동량과 근육량이 늘어난 뒤부터는 신기하게도 거의 맞을 일이 없었지만 새어머니 특유의 독설은 여전했다.
한날은 어머니의 독설에 반항기 어린 대꾸했다가 뺨에 번쩍-불이났다.
처음으로 두 눈을 치켜뜨고 재차 때려오는 손을 잡아 막았다.
"그만 때리세요!"
-말했다-
놀랍게도.
새어머니도 크게 놀라는 듯했다.
때문에 그 말다툼은 거기서 종료되었지만 해결되지 않은 마찰은 얼마 뒤 새어머니의 독설로 재개되었다.
그날 나는 난생 처음 발가락 끝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폭발적인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온 몸을 질주했다.
나는 정신없이 내 뺨과 몸을 주먹으로 두들겨 팼다.
급격한 떨림과 함께 두 손과 두발이 저려왔고 귀에는 울리는 이명을 들으며 혼절해 버렸다.
깨어나자 새어머니는 너무 놀랐는지 내 기분을 달래주고 그 이후로 상당기간 내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신기한것은 그날을 계기로 무언가에 물꼬가 트이기라도 한 듯,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같이 일하는 아저씨의 갈굼을 참다가 혼절하기도 하고 진상 손님의 악다구니를 참으며 듣고 서 있다가 혼절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무렵에서야 나는 내가 인간이란걸 인지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한계치를 느끼게 된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밤만 되면 정신없이 뛰거나 공터나 공사장에 가서 벽돌을 맨주먹으로 부수고 벽이나 전봇대 따위의 기둥을 맨주먹과 무릎, 팔꿈치 따위로 때렸다.
내안에는 늘 폭발할것만 같은 분노가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때때론 누군가가 내게 시비를 걸어주거나 폭력을 써주길 원했고, 운이 좋게도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 오거나 욕을 해대며 모욕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두말하지 않고 바로 주먹부터 날렸다
앞으론 두 번 다시 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아냈다.
오랜 시간 하얀 벽속에서 갖가지 형태나 그림을 찾는 일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나는 나름대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미대를 가기로 결심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신청한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
이 역시 훗날 만난 친어머니로부터 거짓말이고 군대가기 싫어서 수를 써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듣긴 했지만, 아버지의 주장에 의하면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이었고 그에게 군대란 "남자라면 반드시 그리고 스무살이 넘으면 최대한 빨리 가야하는것"이었다.
이미 결심을 굳혔던 나는 군입대를 연기하고 그 결심을 용기를 내어 더듬거리며 말했고 그날 아버지의 손에 잡히는 것들로 닥치는대로 두들겨 맞았다.
아무리 설명하려 시도해도 아버지는 전혀 듣지 않았고 그에게 내 결심은 그저 "군대 가기 싫어하는 인간쓰레기의 거짓말"일뿐이었다.
"너는 인간 새끼도 아니고! 내 새끼도 더는 아니야! 당장 짐 싸서 나가!!"
그렇게 아버지는 소리를 질렀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아...
참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 한마디를 내 뱉고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유, 청소년기를 걸쳐 있어 왔던 수많은 체벌의 시간 뒤에 숨죽이고 두려워하던 절망의 감정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희망을 느꼈다.
방으로 들어와 가슴 두근거림을 느꼈다.
다음날 짐을 싸고 있는데 새어머니가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와 "아직도 안 나갔어"차갑게 이야기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말없이 그리고 주저없이 달랑 동전 1,600원을 들고 집을 나왔다.
그날, 잔뜩 흐린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비 오는 정류장에 서서 비를 맞으며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서야 비로소 내가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났음을.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비로소 '무엇'이 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로웠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나는 그 지옥같은 집으로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그후로 22년.점하나 없던 내 손과 팔은 이렇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무수한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인내심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새끼"라는 16년간의 평가가 무색하리만치 인내하고 살았다.
갓난아기와 같던 내겐 3개월간의 굶주림을 시작으로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모든 역경과 고난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힘든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나약한 것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판단하지 않았다.늘 잘못된 것은 나였다.
그 반대의 생각은 나약한 나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다.
허세의 시대였던 그 시절에 누군가 내게 "최선이나 노력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유치한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답했다.
"지쳐서 쓰러지거나 혹은 죽기 전까지, 한계까지 하는 것"
아직 쓰러지거나 죽지 않았으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것이라는 열등하고 기괴한 망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타인들이 내 노동의 대가를 횡령하고 착취해도 속절없이 인내하고 참다가 폭발적으로 분노하는 것 외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순종적인 모습과 폭발적인 분노의 양극단을 달리는 내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다.
내 몸과 시간은 자유를 얻었으나, 내 의식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20대에 집을 나와서 살면서도 나는 그 보이지 않는 관계의 프레임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대 직후엔 무일푼으로 사회에 나와 빚을 내고 들어간 자취방에서 살았다.
곧 복학을 하면 낮에는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해야했기에 그 점을 고려해서 어렵게 고른 자리에 취직을 했다.
약 한달간 라면 몇봉지로 버티며 일했는데 한달이 코앞인 시점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현장에 잡부 하나가 급한데 몇일 좀 올래?"
당연히 거절했고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단답으로"알았다"전화를 끊었다.
하루종일 새엄마와 누나의 남편이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언제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이냐.좀 도와줘라"
"니가 그러고도 사람새끼냐?"
내 사정을 설명하려 시도하자 바로 잘라 먹고 말한다.
"니가 뭔일을 해? 하루 벌어서 집에서 놀다가 돈 떨어지면 또 나가서 하는 그런 별볼일 없는 일이겠지?그딴게 일이냐?"
아쉽게도 저 평가가 내 행동에서 기인되었다면 좋겠지만 평생을 그랬듯 그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망상에 불과했다.
그들의 폭력적 망상과 계속되는 시달림에 또 분노가 폭발했다.
늘 그랬듯 폭발의 방향은 스스로였다.
때마침 다가 온 관리자에게 지금 그만둬도 월급을 받을 수 있냐 물었더니 못 준다고 했다.
지금은 한시간 일하고 말없이 도망가도 급여를 줘야 하지만 그 무렵엔 그런일이 아니 그보다 더한 일도 흔했다.
그날 아버지 건설현장에서 신호수로 일하고 일당 4만원을 받아왔다.
몇일을 이야기해서 급여를 포기하고 직장을 그만뒀는데 다음날 사람을 구했으니 안 나와도 된다고 했다.
4만원.."사람새끼냐"소리가 듣기 싫어 휴일 한번 없이 일해서 번 월급 70만원과 바꾼 돈이었다.
그 무렵의 일자리는 급여를 이월시키는 곳이 많았던지라 어렵사리 다시 구한 일자리에서 일하면서도 다시 두달을 더 굶주리고 자취방 월세와 빚을 갚는라 이틀에 라면 하나정도를 먹으며 다시 한달 더 굶주렸다.
네달만에 25kg 체중이 줄어버린 굶주리던 그 시기에 아버지 생일이 되었다.
밥 먹으러 나오라길래 나갔더니 새어머니가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니?얼굴이 뼈만 남았구나?아니 대체 밥은 먹고 다니니?"
그런 말이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럴리가 없었다.
꿈에나 나올법한 대사다.
대신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생신인데 선물은?"
병장 월급 만원 남짓한 군대에서 이제 막 제대했고, 혼자 살면서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선물이 웬말인가 앙상하게 마른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부아가 치밀어 오르는데 쿵-아프게 내 머리를 쥐어 박더니 말한다.
"스물넷이나 되서 아버지 생신인데 빈손으로 오는 인간 쓰레기가 어디있어!?니가 그러고도 사람새끼냐?"
아..지긋지긋한 그말..
'사람새끼'
맞다.아니다.여전히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맞는사람도, 때리는 사람도..
그런데도 관계를 왜 차마 끊지 못하고 살았을까..?
그건 아마도 내 의식은 여전히 그 관계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내 가족인걸'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결과를 무수히 만들어 냈다.
그분들의 말처럼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 정도는 복에 겨우리만치 힘든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난 내 삶이 더 서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고통이나 상황은 철저히 개인적임과 동시에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겐 숨쉬듯 당연한 것들이 내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평생의 대부분을 '좋은 삶'을 꿈꿔본 적이 없다.
그저 아주 아주 평범해지기만을 원했다.
그만큼 '평범'이란 내겐 너무나 멀고 높은 가치였다.
친밀한 친구들과 지인들이 늘 주변에 있었던지라 한 번도 인지해 본 적 없지만 지금와서 회고해 보니 나는 늘 인간이 싫었다.
누군가는 이유없이 나를 멸시하고 혹은 이유없이 내 권리를 박탈하고 혹은 내 급여를 횡령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고 혹은 내 노동력을 착취했다.
나는 늘 그랬듯 순종하며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폭발적으로 분노를 쏟아냈다.
그럴때면 그들은 한번도 예상못한 내 극단적인 반응에 놀라거나 당황하기 일쑤였다.
현명하게 해결할 방법도 내 권리를 현명하게 주장할 방법도 딱히 몰랐던 시기였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래. 맞다. 비겁한 변명이 아니다. 그저 진실일 뿐.
인간은 내게 상처를 주는 적이었기에 피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같다.
그래선지 친구라 해도 연락을 먼저 해 본적이 거의 없다.
그런 내가 가진 친구란 내가 늘 외면해도 내게 와 주거나, 챙겨주거나 연락해 오는것에 지치지 않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직접 내가 손을 내밀어 친구를 선택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고 그들이 내게 왔다가 사라져 갔다.
장사를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을 모으거나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알아서 다시 오겠거니 생각했다..
20대의 마지막해가 시작되던 날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내가 적극적으로 원해서 만들어진 내 삶의 유일한 인연이다.
삶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아내는 내 뜻대로 얻었다.
아내는 나를 아무 조건없이 맹목적으로 사랑해줬다.
아내를 만나 가족과 물리적인 거리를 벌리고
심리적인 거리까지 벌어지고 나서야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내 삶을 재평가해 보게 되었다.
아직도 그 평가와 해석은 진행 중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과거를 떨쳐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과거를 똑바로 인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내를 만난 뒤 몇 해가 지나 나는 생의 첫 식당을 열게 되었다.
역시 약한 짐승은 눈에 띄는 법인지 접근해 온 사기꾼에게 피보다 아까운 돈 수천을 날려먹었지만 가까스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면 첫 오픈을 하는 날 새벽.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의 옆에 쓰러져 누워서 그녀의 네번째 손가락에 가게 열쇠고리를 끼워줬다.
그리고 말했다.
"자기와 결혼하기 위해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어."
아내가 뒤척이며 졸린 눈을 살짝 뜨고 다시 감더니 웃으며 나를 안아줬다.
청혼을 해서인지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를 원했다.
하기사 나완 달리 아내는 정상적인 삶을 살았고 살아오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없이 살자"
대충 뜨뜻미지근 한 말로 얼버무리고 흘려 넘겼다.
얼마 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여행이 끝난 다음날 결혼식을 할 예정이었다.
아내를 처갓집에 바래다주던 여행 마지막 날.
아내가 고백했다.
"나 임신했어"
당황했다."일단 고민해 보자."말했다.
이어 생각했다.
'아이라니.. 불가능 해"
짧은 침묵 뒤에 말했다.
"생각해 보기로 해"
어둑한 가로등 아래에서 아내의 배를 만지며 "잘 자 꼬맹아"했더니 아내가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생각해 볼 거라면 이름으로 부르지 마"
결혼식이 끝나고 돌아온 뒤, 며칠 동안 우리는 서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며칠사이에 뒤로는 독신주의 친구를 만나 "요즘 세상에서.. 그리고 내 처지에 아이를 가진다는 건 태어날 아이에게 죄를 짓는 일"이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공감했다.
조만간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오후에 집 밑의 커피점에 팥빙수를 먹으러 갔다.
가닥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팥빙수를 먹다가 마침 엊그제 읽었던 책에서 인상깊던 이야기가 생각나 말했다.
"죽어갈 것들에겐 이름을 붙이지 않는대. 살아갈 것과 살아있는 것에게만 이름을 붙인다는 거야.
하여, 이름은 곧 생명이라고.."
그 순간 내 맘속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점과 점이 연결되었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팥빙수가 담긴 스푼을 놓고 목놓아 엉엉 울었다.
커피점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나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울기만 했고
그동안 직원들이 휴지며 물티슈며 가져다주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그리고 내가 맘대로 맞춰버린 합리성과 내 비겁한 변명과 두려움에 이름도 가져보지 못하고 죽을 아이가 너무 가엽고 슬펐다.
내가 채 인지하지 않고 있었을뿐. 아내는 그 아이를 원해서 잉태했고 아이가 잉태된 순간부터 그 아이는 내가 생을 바쳐 지켜야 할 존재란 것과 나 따위의 목숨과 삶은 그 아이의 생명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닫았다.
그날 0.5mm에 불과했던 아이에게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날 그 아이는 내게 무엇이..
나도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되었다.
재작년 아내는 직업의 형태를 바꾸기로 결심했고 과중한 업무량과 육아시간을 쪼개서 공부해 원하는 것을 얻었다.
발령 덕분에 하루아침에 생활환경이 인천에서 200KM 떨어진 섬으로 바뀌었다.
거리도 멀지만 하루에 배가 한번만 뜨는 열악한 조건이다.
이번엔 내가 육아를 할 차례.
그 기간을 보내며 하루하루 나름대로의 의지를 다져 왔는데, 기약한 시간이 임박해 가고 나 혼자 육지로 나가야 할 시간이 닥치자 그 의지가 실 끊어진 연처럼 툭-끊겼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스스로도 영문을 모를 정도라 그게 무엇인지 한동안 나름 탐색해 보았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하며 대체 이 시간을 유예시킬 까닭은 무엇인가 추적해 보고 가장 내밀한 곳까지 수색해 보고 고찰해 보았다.
이 글도 그 탐색의 일환이다.
나름대로 정의한 원인은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은 내게 가장 힘겨운 일이란 것이다.
42년 묵은 내 삶은 21년전 어느날 부슬비 내리던 회색의 하늘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갈 곳을 몰라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나 자신을 관조해 본다.
남들은 성년으로서의 삶을 시작할때 가까스로 유청소년기를 시작한 그날.
시간의 폐허에 선채 문득 고개를 숙여 보니 산산조각난 자아의 파편이 흩어져 있다.
어설피 손으로 그러 모으면 약한 모습의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와서 그걸 흩어 버린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얼기설기 조각을 이어 붙여 형체를 완성했다.
조각이 빠져 있고 금이간 누더기로 삐걱대며 움직여 팔 다리의 놀림을 과시하며 으스댄다.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거리를 활보한다.
그 어설픈 형체로 아내를 만난 셈이다.
아내를 속인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라도 아내의 상처는 감싸 줄수 있었고 아내는 운좋게 내가 늘 갈망하던 가족이 되어 주었다.
아들이 태어난 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
내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아이들에겐 단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주고 싶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내 마음을 전해주고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늘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정작 아이들이 내게 사랑과 신뢰를 주고 있었다.
가족은 어설픈 내 형체의 빠진 조각과 깨진 금을 메워주는 존재였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나를 살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내 존재의 빈틈을 채워주는 것이다.
하여, 내가 아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무엇이 될 수 있고, 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보다 나은 존재를 꿈꿀 수 있다.
그 실재를 느끼는 것은 너무 달콤하여 도저히 포기하기 어려운 일이다.
결국 내가 이기적이라 아이들과 함께 있는 행복을 포기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주는 사랑과 아이들이 내게 의지하는 기쁨을 버리지 못한다.
그 두려움이 가위가 되어 내 의지를 잘라 버린것은 아닌가..정의했다.
지금껏 오직 본인의 욕구를 위해 살던 아버지의 영향 덕인지 돈과 부를 경원시 하며 살았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돈은 땀 흘려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랑스레 떠들었다.
그런 나와 달리 아들들은 부자를 좋아한다.
인간의 본능이다.
며칠 전 큰아들은 잠자리에 누워 어떻게 하면 부자나 훌륭한 사람이 되냐고 물어왔다.
"기회를 잡아야지"대답했다.
"기회는 어떻게 생겼어? 기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알아봐?"묻는다.
"기회를 알아보려면 지혜를 가져야 해. 그래서 늘 노력해야 해. 그리고 기회가 보이면 놓치지 않고 잡아야지" 대답했다.
어둠 속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한순간 아들의 눈이 커지며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입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열띤 음성으로 속삭였다.
"아빠! 그럼 기회를 잡아!"
헛웃음을 허허 흘리는데 아들이 재차 물어왔다.
"근데 기회가 뭐야?"
영화 캐스트 어웨이 이야기를 해 줬다.
재작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봤던 그 영화에는 '기회'가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무인도에 표류해 홀로 살아가던 주인공 척은 평생 동안 좁은 세상에 갇혀 안전하게 죽을 수 있었다.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가진다는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말이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고통이다.두려움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가며 겪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다.
척은 더 나은 삶을 추구했다.
주어진 운명대로 살다 죽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섬은 너울성 파도가 몰아치는 해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강하고 높은 파도는 마치 주어진 삶처럼 그의 의지를 꺾고 절망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척은 얇고 너덜너덜한 판자 두 개를 줍게 된다.
척은 그날부터 주저하지 않고 뗏목을 다시 만든다.
어설프게 얼기설기 똇목이 엮어지자 척은 그 얇고 보잘것없는 판자 두 개로 돛을 만든다.
해안에서 그 쓰레기를 보았을 때. 자신의 팔힘만으로는 넘지 못했던 파도를 넘을 돛으로 판자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바람은 원하는 방향으로 불어줄까?
판자는 정말 돛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돛이 된다한들 파도를 넘을 힘을 내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파도란 이름의 불가능을 넘어선들 대양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있을까?
아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은 판자를 돛삼아 파도를 향해 노를 젓는다.
인생에서 주어진 삶을 벗어날 수 있을만한 기회란 그 해변에 떠내려와 나뒹굴던 '너덜너덜한 판자 하나'와 같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 해 줬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아들의 눈빛과 음성이 잊혀지지 않았다.
"기회를 잡아!"
그 목소리가 슬며시 나를 떠민다.
두려움이 의지를 끊었지만 용기로 의지를 이어 붙이고
보잘것없는 뗏목이지만 노라도 저어봐야 한다.
내가 버리지 못한 만큼 내 아이들이 더 많은 기회를 상실할 수도 있다.
아이들이 없는 삭막한 상실감 속으로 걸어 들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
내가 없어도 살아갈 아들들을 위해서
보다 나은 연결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