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거리의 어둠 속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천막 아래옹기종기 모여 있는 드럼통 테이블과 등받이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들 사이를 방정맞게 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젊은이들이 둘러앉은 테이블 앞에 서서 하모니카를 시끄럽게 대여섯 번 뿌뿌-불어댔는데 불고 나서는 손을 내밀어 오백 원을 요구했다.
우린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는데 노인은 이내 우리에게 와서 똑같이 하모니카를 뿌뿌 불더니 오백 원만 달라고 했다.
나도 어렵지만 어려운 사람과 천 원 정돈 나눌 수 있단 생각에 돈을 꺼내는데 친구가 먹이를 위협받는 맹수처럼 내게 으르렁거렸다.
"xx 그거 넣어놔라! 니그거 주기만 해봐라!"
친구는 황당해서 엉거주춤하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더니 노인을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노인은 겁을 먹은 듯 안색을 굳히더니 다른 테이블 쪽으로 사라졌다.
이유를 묻는 내게 친구가 답했다.
"하다못해 학교종 땡땡땡이라도 연주했으면 모르겠는데 저딴식으로 해서 돈을 버는 건 용납 못한다. 저건 불로소득이다. 불로소득은 죄악이다. 차라리 바닥에 버려라. 그럼 돈 줍는 노동이라도 할 테니까."
다른 친구도 같은 의견을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날 도와준 고마운 친구들이란 좋은 감정이 이성을 가렸지만 집에 돌아와서 자려고 누우니 떠오르는 그 밤의 일이이해가지 않았다
내가 노인에게 주려던 건 하모니카 소리의 대가가 아니라 동전심에 의한 적선이었으니까..
수년 뒤15년 즈음..내 아이와 함께 살 집을 사려고 했을 때도 두 친구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피땀 흘려 번 돈, 불로소득에 미친투기꾼들한테 갖다 바치고, 막차 타는 멍청한 투기꾼들하고는 같이 망할래? 우리가 한국 최고의 회사에서 맨날 배우는 게 저런 거다 인마!지금 집 사면 망한다. 돈은 니처럼 땀 흘려서 버는 거지 도박이나 마찬가지인 투기로 버는 게 아니잖아"
나보다 똑똑한 친구들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나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불로소득의 대표적 수단 중 하나인 증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본인들의 자산은 숏포지션으로 주식을 투자하거나 코인에 밀어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 다니기 서러워서 가족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려는 게 왜 투기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려운 경제용어를 들어가며 전재산을 날릴 거라며 며칠 동안 겁을 주는데 겁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집은 3년 만에 5억이 올랐고 친구들이 집 살 돈으로 배팅하라던 코인과 주식은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다.
다행히 들어가서 살지도 못하는 투기를 하지 않았던 난 한강은 가지 않았다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가끔 있다.
어느 여름 비 오던 날만신창이가 되어 가게 공사를 하고 있는 내게 커피를 사 주겠다고 찾아온 처남과 처남댁.
그때 자신들이 시도하는 다양한 투자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처남댁에게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처남댁. 저는 돈은 땀을 흘려서 버는 것이라 생각해요"
처남댁이 나를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 장면은 끝을 맺는다.
가끔씩 그 장면이 떠 오를 때면
그게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생각일까 궁리해 본다.
친구들이었을까? 아니면 아버지였을까?
대화가 거의 없던 아버지가 가끔 한 격언 중에는 늘 그런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돈은 땀 흘려서 버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이 그랬듯이 정작 아버지도 자본가였다.
이것은 마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죄다 귀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고 정작 나처럼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이 내 마음속에 녹아든 것일 가능성도 있다.
우리 사회는 불로소득에 대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강도 떼라는 뜻의 불한당이란 말이 그 적개심을 잘 나타내 준다.
땀을 흘리지 않고도 살아있으면 강도라는 것이다.
칼을 들고 위협을 가해야만 강도더냐.
타인들이 노동을 해서 얻는 소득을, 땀을 흘리지 않고 가져가는 불로소득자 역시 강도다.
농경민족에게 불한당이란 지주요
숭고한 <땀>으로 돈을 버는 자는 소작농이다.
아..!! 그러고보니내 꿈은 소작농이었던 것이다!
밤낮없이 일하며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하고 싶은게 지주의 땅뙈기를 부쳐 먹는 삶이었다니 충격적이었다.
작금에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어처구니없는 모순이었다.
나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치기 어린 마음으로 "나는 장사꾼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사업가가 될 거야" 떠 벌리고 다니지 않았던가
오직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모순된 관념들을 기준으로 많은 것을 판단하고 재단했던 미숙함의 발로였지만 내 맘속에서 장사꾼과 사업가는 다른 의미로 분류되었다.
장사꾼은 당장의 이득에만 치중하는 자.
비유하자면 수렵인과 사냥꾼이었다.
사업가는 농부처럼 훗날의 큰 이득을 위해 기업의 가치를 일구어 내는 자라 생각했다.
내 무의식의 분류에서 장사꾼의 형태는 <땀으로 돈을 버는> 노동자다.
실제로 자영업자의 대다수는 고용시장에서 도태된 자기 고용 노동자로 분류되는데
과거의 내 무의식 속 관념과 부합한다.
반면 사업가는 자본가다.
나는 농부의 마음으로 농사짓듯이 브랜드 가치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농장 시스템을 관리하는 지주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땀흘려 농사를 짓는 건 소작농의 몫이다.
과거 농경사회는 <상>을 <농>보다 아래의 것.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천시했다.
사업가.. 즉 상인은 스스로 땀을 흘리지 않는 존재. 즉 불한당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업가도 일을 하지만, 사업가의 노동은 소득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자본에 불과하다.
외형은 비슷할지언정 이 개념을 가지고 노동에 임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분명히 크다.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사업가는 반드시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노동 역시 자본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사업이란 자본을 사용해서 하는 것이고
사업가는 자신이 가진 인적자본, 지적자본 등을 총동원하여 재화를 벌어들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무렵의 나는 자본가의 업에 종사하고 성공한 사업가를 꿈꾸면서도 그 수단으로 노동만을 사용하고 노동자의 영역에 머물렀다.
대중의 이해 영역밖에 있는 장인정신에 매몰되었다,
자신이 하는 업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물론 머리로는 이미 다 알고 있던 것들이다.
그런데 머리로 안다는 것은사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논리적으로 맞는 어떤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에 동의가 되는 것을 혹은 남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을 스스로는 '알고 있다'라고 착각한다.
소프트뱅크와 유니클로 ceo가 쓴 레이 크록 전기의 추천서에는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 써져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것만이 <아는 것>이다"
결국 뻔히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을 무수한 시행착오와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