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와 개똥벌레

by 도토리아빠


1999년 고3 초여름, 교과서에서 신경림의 갈대라는 시를 읽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났을까 스스로 이해가 안 가서 고민해 봤는데 아마도 이 구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몰랐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갈대를 보면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간 뒤에는 학교 근처에 있는 습지에 종종 바람을 쐬러 가곤 했다.

드넓은 습지에는 그 넓은 대지를 빈틈없이 가득 메운 갈대가 있었다.

가냘프고 연약하고 빛바래어 볼품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하기도 헷갈리는 그 식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나의 모습 같았다.

그 볼품없는 식물도 석양의 빛에 물들면 황금빛처럼 보이기도 했고 바람이 불면 제법 그럴싸한 아우성을 쳐댔다.

나는 그 무렵에도 또 더 나이를 먹어서도 내가 갈대와 같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의미는 변했다.

어릴 적의 나는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들며 숨죽여서 우는 갈대였는데

나이를 먹은 나는 바람만 불면 이때다! 하고 열심히 몸을 흔들며 옆에 있는 갈대들 머리끄덩이를 움켜잡고 옆에 있는 갈대에게 마찰열이라도 일으켜서 이 못마땅한 갈대밭에 불이라도 질러버릴 꿍꿍이를 가진 갈대가 되었다.


오늘 밤 편의점에서 흘러나온 황가람의 반딧불이란 노래를 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는 그 노래를 들은 나는 문득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게 무슨 청승이란 말인가.. 별인 줄 알았지만 나는 반딧불에 불과해 엉엉.. 우는 듯한 절규도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이미지는 마치 불어오는 바람에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소리 죽여 울고 있는 갈대처럼 느껴졌다.

한심하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갈대에 대한 심상이 문득 떠 올랐다.

그러고보니 언젠가부터 가족의 존재는 분노를 사그라들게 만들었고 나는 더 이상 갈대에 대한 심상을 떠 올려도 나 스스로와의 어떤 동질감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저께 아들들과 집 근처에 있는 파티용품 대여점 앞을 지나다가 드라마 베터콜 사울에 나온 것과 비슷한 바람풍선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들에게 나는 말했다. "아빠의 단기목표는 저 바람풍선 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드라마 베터콜사울에서는 양아치 변호사 사울이 엘리트 변호사인 형의 세계에서 형의 세계관을 따라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울의 삶은 뜻대로 잘 풀리지 않고 그 스스로도 자신이 그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의식하는 듯한데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그 알록달록한 바람풍선을 보게 되며 각성하게 된다.

알록달록 천박한 옷을 입고 촌스럽고 경박한 춤을 쳐대며 시종일관 과장된 미소를 띤 그 인형을 보고 나 역시 각성하게 되었다.

그래.. 이거다.. 이게 장사꾼이 가야 할 길이다. 그 방식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모두가 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또 아무나 할 수는 없는 것.

나는 그날 결심했다. 바람풍선 같은 장사꾼이 되기로..


장사꾼은 체면 따윈 신경 쓰면 안 된다.

매장에서는 자존심의 정의도 바뀌어야 한다. 장사꾼의 자존심은 고객의 만족도, 고객의 재방문율 신규고객의 수 등이고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나 자신조차 버려 버리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땡-하고 영업시간이 시작되고 파워 온! 바람이 내 몸에 차 오르면 아파도 화나도 슬퍼도 지쳐도 춤을 추는 거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알록달록 환상적인 색채의 상품을 양손에 들고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거다.

여기예요 여길 봐주세요. 이리 오세요. 필요 없겠지만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요. 한번 써 보면 다시 오고 싶도록 최선을 다 했으니 한번 느껴 보세요. 고맙습니다. 또 오세요.


그 짓을 반복하고 더 더 더 잘하게 되면, 나는 서서히 역경을 이겨 내게 되고 내 자식과 내 아내의 팔자가 바뀌게 되고 내 운명이 바뀌게 되고 마침내 바람풍선은 바람을 타고 날아 올라 저 높은 하늘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바람풍선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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