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맛 교향곡 Jan 30. 2021

자신의 '상실'과 직면하는 것-[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가슴속 응어리가 깊게 남아 다시 한번 읽었다. 두 번째로 읽으니 작품의 한국어 번역 제목인 [상실의 시대] 또한 매우 잘 지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몸과 사회적 책임은 어른이 되어 버렸지만 마음은 아직 미성숙으로 남아있는 사람들, 즉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가슴속 공동과 상실을 느낀다. 그것을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로 느낀다. 그리고 깨닫는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러한 모순을 가슴 에 안고 살아갈 운명이라는 것을.



  내가 고등학생이던 무렵, 나는 스무 살이 되면 마치 천지가 다시 창조된 양 아예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으로서 입시의 억압은 '대학 가면 다 해결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대학생이 되니 다른 것은 별로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 수업을 가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과제 등을 한다. 시험기간에는 시험을 준비한다. 특별히 달라진 점이라곤 합법적으로 음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정도이다. 이는 대학생에서 대학원생이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원생이 되면 전공에 대한 이해도도 뛰어나며 한 사람의 지성인으로서 역할을 나름 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원생의 나는 대학생의 나처럼, 그리고 고등학생의 나처럼 잘 모르고, 지도를 필요로 하며, 미래의 대한 걱정으로 밤 설치고 있었다.



  정작 역설적인 것은 소위 '인생의 단계'를 거칠 때마다 오히려 과거를 회상하며 즐거움에 빠진다는 것이다. 대학생의 나는 고등학생의 나의 풋풋함을 그리워했다. 대학원생의 나는 대학생의 나의 낭만과 로망을 갈망했다. 군인이 된 나는 민간인이었던 나의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마 예측건대 전역 이후의 나는 군인이었던 나의 일부분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작품의 주인공인 와타나배 또한 그러하다. 와타나배는 절친인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던 나오코와의 관계를 이어가면서 자신들이 아직까지 스무 살을 넘기지 않은, 열일곱 살의 시절 그대로인 것 같다고 말한다. 아니, '같다'가 아닌 십대 후반인 것이 '맞다'라고 표현한다. 기즈키가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와타나배와 나오코는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저 버렸다. 몸은 이십 대가 되었지만 마음은 기즈키가 죽었을 때 그대로 성장을 멈추어 버린 것 같이. 그들은 몸의 성장과 마음의 미성숙이라는 부조화 속 상실을 채우길 갈망하지만 이는 원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잡을 수 없이 날아가 버리는 반딧불이처럼. 



반딧불이가 사라져 버린 다음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속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눈을 감으면, 그 작고 희미한 불빛은 짙은 어둠 속을 갈 곳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았다. 나는 어둠 속으로 몇 번이나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p.100)



  이러한 상실들은 성욕의 형태로도,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의 형태로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갈망의 형태로도,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외로움의 형태로도 나타낸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소설의 말미 그러한 모순과 그리움에 사무친 나오코는기즈키를 따라 죽음을 선택하지만 결국 진정한 의미로 죽어버린 건 홀로 남겨진 와타나배였다. 나오코는 죽음의 방식으로 상실의 모순을 해결했과 기즈키와 함께하게 되었지만 와타나배는 평생을 모순을 안고, 그리고 먼저 떠나간 둘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p. 111)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젊은이들이 겪는 상실의 각 형태는 표상한다. 발랄한 대학생 미도리는 사회적 책임과 선입견을, '엄친아'인 나가사와는 출세와 성공을, 그의 여자 친구인 하쓰미는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대한 기대와 절망을, 그리고 레이코는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각자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여러가지 상실에 대응하여 와타나배와 나오코는 각자 다른 탈출구를 모색해 버리고야 만다. 나오코는 스스로의 삶을 끝냄으로써 모순 자체를 거부하고, 와타나배는 덤덤하게 살아나가는 것을 선택하여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결국 하루키가 말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상실, 무력감,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안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하던, 17살에 죽어버린 절친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와타나배와 나오코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불완전함과 상실을 떨쳐낼 수 없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떠한 상처가 아물어도 새로운 고통을 경감시켜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주인공인 와타나배가 그랬듯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사무쳐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서평은 영내 진중문고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양질의 책을 제공한 국방부에 감사를 표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로 오르는 사다리- [코스모스-가능한 세계들]을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