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부생 티를 벗었을 무렵,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책이었고, 내용 자체도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기에 하룻밤 사이에 읽고 덮었다. 주인공이 해변에 놀러 갔다가, 태양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로 사람을 쏘아 죽이게 되고, 그것에 대하여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책에 대한 기억이라곤 한 살인자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태양 때문에'사람을 죽인 살인마가 어찌나도 저리 뻔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분노 말이다. 그것 이외에는 딱히 남는 것이 없는 경험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인생의 쓴맛을 나름 느꼈으며, 자신의 위치와 삶의 의미를 진솔하게 돌아보는 경험을 가졌다. 그리고 군 입대. 입대 이후 진중문고로 선발되어 보급된 카뮈의 [이방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서사하고 있었다. 이런 책이었나? 를 연발하며 단숨에 독파했다. 이후 소장하고픈 욕구가 들어 교보문고에서 구매하여 줄까지 치며 읽었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뫼르소(Meursault) 마을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화이트 와인의 명산지이다.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산미와 견과류 향이 풍부한 와인을 양조하는 마을로, 가장 낮은 등급인 마을단위의 와인도 구매하려면 이제는 상당한 비용을 들여야 할 정도이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도 마찬가지로 '개성'이 매우 강하다. 소설의 1부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저자는 우리에게 뫼르소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직접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단지 일반적으로 슬픔과 연관되는 반응을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서술할 뿐이다. 어머니의 관을 들여다보며 마지막으로 부모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장례식을 앞두고 밀크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꿈뻑꿈뻑 피워댈 뿐이었다고 말이다. 장례식을 마치고는 바로 그의 여자 친구와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가히 일반적 의미에서의 슬픈 반응이라고는 읽히지 않는다.
일요일은 다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해야 하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5
이후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던 와중, '태양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를 들어 한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소설의 2부는 재판의 과정을 다룬다. 재판은 재판장과 검사, 그리고 변호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쇼에 불과했다. 재판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 듯했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뫼르소의 살인사건은 이후에 있을 존속살해 사건과 엮여 처음부터 단죄의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사건의 본질인 '사람을 권총으로 죽였다'는 것보다, 이전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태도를 보였는지를 추궁당한다. 마치 사람을 죽여서 재판받는 것이 아닌 어머니의 죽음 앞에 슬퍼하지 않아 재판받는 듯 말이다. 검사는 그의 영혼이 타락했다고 말하며 자비를 베풀지 말 것을 배심원들에게 주문한다. 그들에게 피고인 뫼르소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것이 불과하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 장례를 치른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죄로 기소된 것입니까? - p.124
재판은 무엇인가가 뒤틀려 있었다. 나는 로스쿨에서 형사재판의 본질은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그것이 법률상의 구성요건요소에 해당하는지, 위법성과 책임조각사유는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배운 바 있다. 작품 속의 재판은 사실관계도, 구성요건요소도, 위법성과 책임도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것은 뫼르소의 영혼이 타락했다고 외치는 검사와, 그러지 않다는 변호사의 함성뿐이다. 심지어 피고인인이자 당사자인 뫼르소의 목소리도 등장하지 않는다. 뫼르소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할 때마다 변호사가 그를 제지했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임에도 형사재판이 아니고, 단죄임에도 단죄의 대상이 결여되어 있었다. 부조리한 재판이었다.
뫼르소 자신도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변호사가 자신과 말을 맞추어 살인 동기에 대하여 일정한 핑계를 둘러댈 것을 제안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짓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또한 그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무관심해 보이며, 애인의 사랑에 감응하지도, 출세의 기회를 붙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마치 잘못 만들어진 와인처럼, 뫼르소의 개성은 사람들이 보기에 과해도 너무 과했다.
느끼건대 카뮈가 [이방인]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부조리'와 '모순'속 의미가 아닐까. 태어남과 죽음, 정의와 악, 그리고 자신과 타자까지 우리의 삶은 서로 다른 개념들의 이항대립적 구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그 자체로 크나큰 부조리로 다가온다. 소설에서의 뫼르소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이 시작하기 전, 뫼르소의 태도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질책일 받지 않았다. 정작 재판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그가 슬픈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형에 처해버리고 만다. 재판 과정에서는 피고인도, 단죄의 대상인 죄 자체도 없었다. 뫼르소의 태도는 삶에 무관심했다. 또한 사회 또한 그에게 무관심했다. 이처럼 혼돈 속 삶이 그와 반대 개념인 죽음-처형에 의해서던 자연적인 죽음에 의해서던-에 의해 끝나버리고 말 운명이라면, 결국 우리의 삶은 살아갈 가치가 무엇인가 하고 카뮈는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는 것이나 예순 살에 죽는 것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경우든 당연히 그 후에는 다른 남자와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그런 일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아무튼 가장 분명한 것은 지금이 됐건 이십 년 후가 됐건 언제든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 p.145
결국 뫼르소는 처형당하고 만다. 모순으로 점철된 뫼르소는 다시 생각해도 [이방인] 그 자체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고, 출세에 연연하지 않으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단지 태양이 뜨겁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재판을 마치 제삼자의 재판인 양 바라본다. 그런 이방인에게 사회는 지극히 부당한 재판으로 처형을 언도한다. 자신도 모순으로 가득하고 사회도 모순으로 가득하다면 우리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
뫼르소는 바로 그 모순이야말로 삶의 의미 그 자체라 주장한다. 생명이 꺼져가는 와중 '약혼자'를 만든 그의 어머니처럼, 뫼르소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삶에서 느꼈어야 할 해방감을 느꼈다. 그는 처형에 이르러서야 "세계가 가진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이 열렸다.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모든 고통을 씻어 주고 무든 희망을 비워준 듯, 온갖 징조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가 가진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 나와 세계가 무척 닮아 마치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 p. 156
결국 카뮈(뫼르소)가 주장하는 삶의 의미란 이런 것이 아닐까. 세상은 개성 강한 우리들에게 온갖 부조리를 들이밀 것이다. 마찬가지도 우리들 자신도 모순투성이인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하기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고 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딛고 살아내는 것이 삶이며, 그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