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上

원주에서 첫날

by vanitas
IMG_5154.jpg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본 '뮤지엄 산'의 풍경

1. 뮤지엄 산

연초에 세운 작은 계획 중 하나. 혼자서 여행 다니기. 그 시작으로 원주라는 도시를 골랐다. 나에게 '원주'라는 도시가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뮤지엄 산'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과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꼭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었다. 붐비는 사람을 피하고 싶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원주행 버스를 탔다. 전날에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버스에서 내리 3시간을 잤다. 덕분에 집에서 원주까지의 여정이 한달음으로 느껴졌다.

셔틀버스가 오기까지 시간이 약간 떠서 롯데리아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매장 안에서는 미스에이, 원더걸스, 투애니원의 음악이 번갈아 나왔다. 이제는 잘 볼 수 없는 가수들의 철 지난 유행가들을 듣고 있자니, 그 음악들이 처음 나왔을 때의 흥얼거리던 내가 생각나면서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참 야속하게도 잘도 돌고 돈다. 영원히 인기 있을 줄 알았던 가수들도 시간이 지나면 TV에서 사라지고, 이렇듯 나 같은 사람에게 옛 기억을 되새김질해줄 수 있는 값비싼 여지를 마련해주는 것도 새삼 기분이 묘하다. 지금 내가 변변해도, 변변찮아도, 언젠가는 고꾸라지고 언젠가는 올라갈 수도 있는 그러한 인생의 언덕길을 우리는 모두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버스가 왔다.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뮤지엄 산까지 가는 오크밸리의 셔틀버스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최악의 선택이었다. 안내방송도 없고, 버스 기사님의 안내말도 없다. 그저 자기가 알아서 내리라는 식이다. 덕분에 30분 정도를 길 한복판에서 버렸다. 그래도 잘 도착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지금 생각하면 이야깃거리가 있는 거지만, 그때에는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뭔 소리는 못하고 혼자서 은근히 허공을 째려보기만 하였다.

미술관, 제임스터렐관, 명상관까지 합쳐 3만 원 초반대의 금액을 지불하여 티켓을 샀다. 현재 미술관 내부의 호수가 공사 중이어서 할인을 받은 금액이었다. 할인 같은 건 안 받아도 되니 호수가 있었으면 하고, 아쉬웠다. 호수가 없으니 알렉산더 리버만의 작품은 그저 새빨갛고 미술관 외관의 조경을 망치는 고철더미 같았다. 모든 것은 상생이 중요하다. 제 아무리 멋진 것이라도 홀로 있으면 그 멋이 제대로 발휘가 안된다. 계절, 공기, 날씨를 비롯한 모든 것이 다 중요한 요소다.

미술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도 좋았지만, 더욱이 훌륭한 것은 건축이다. 곳곳에 아주 재밌는 공간들을 숨겨 놓아,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삼각 코트'라고 불리는 삼각 모양의 공간 안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그 날따라 눈이 와서 더욱이 운치가 있었다. 바닥의 자갈을 밟는 소리가 공간의 벽면에서 핑퐁 하고,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그 공간 안에 자연의 소리와 그것에 감탄하는 나만이 있었다.

제임스터렐관은 무척이나 좋을 뻔했으나, 같이 관람에 참여하게 된 어떤 분의 좋지 못한 태도로 흥이 깨졌다. '고요히 느끼고 사색하는 것'이 중요한 체험 코스에서 작지 않은 목소리로 질문을 한다거나, 전시 통솔자를 닦달하듯 부추기는 태도는 그저 무시하고 관람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의 과민함을 책망하다가도, 그의 비매너적인 행동에 계속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어쨌거나 제임스터렐은 분명 기민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였다. 공간과 시각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본질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다. 관람자에게 그가 작업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떠한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지 그것에 대한 대답을 조용히 찾아가는 여정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해도 늦지 않는다. 조급해하지 말자.

명상관은 안도다다오가 뮤지엄 산을 잘 관리했다는 명목하게 무상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명상관의 체험은 나와 선생님 두 명뿐이었다. 프로그램의 전문성은 높지 않았으나, 둘이서 그 공간을 전부 향유했다는 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돔 형태의 공간 안에 중앙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틈새의 선으로 바깥을 엿볼 수 있게 한 건축 디자인은, 전부를 보여주지 않아도 아주 약간의 풍경 만으로도 사람을 풍요롭게 명상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체험 후에 타 주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충분한 휴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있다는 선생님과의 짧지만 유쾌했던 담소를 나누고 나니, 나도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직도 생각나는 파마머리의 젊은 선생님. 그분이 앞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잘 걸어 나가길 멀리서나마 소원하고 싶다.


2. 아사히 맥주, 안주는 편의점에서 파는 돈코츠 라멘과 메론 크림빵

숙소로 가는 길에 맥주와 주전부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갔다. 에어비앤비에 묵혀 두었던 쿠폰을 사용해 고른 숙소였다. 쿠폰을 사용해서 그런지 몰라도 묵었던 사람들의 후기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난감한 구석이 있었다. 각종 털로 가득한 출입문과 욕실, 먼지가 가득 쌓인 주방. 내 집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지나갈 것들이라 그냥저냥 치우고 잘 자긴 했지만 좀 그랬다. 숙소에 당도하기 전 담배를 피우던 고등학생 무리들에게 꺼지지 않은 담뱃재를 맞을 뻔 한 일과 택배 기사님의 당혹스러운 문자, 예산도 정해 놓지 않고 가격 흥정이나 해보자는 막무가내식의 외주 전화. 기분이 나아지려고 온 여행길에 왜 이리 안 좋은 일들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지. 운세 어플에서 오늘 운세가 정말 안 좋다고 나와서 애써 무시하고 출발한 여정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그 날은 최악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맥주를 내리 세 캔을 까 들이부었다. 씨유에서 사 온 돈코츠 라멘과 메론 크림빵은 참 맛있었다. 맛있는 걸 먹어서 그나마 좀 위안이 되었다. 그러고 술에 취해 스케치북에 글과 낙서를 휘갈기다가 여덟 시도 안돼서 잠이 들었다.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다음 날 일곱 시까지 내리 잤다. 오래간만의 꿀잠이라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난감했다. 내가 그동안 불면에 시달렸던 이유가 집이 불편해서였는지, 나에게 충분한 골치 아픈 일이 없어서였는지. 둘 중 어느 쪽의 이유라도 유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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