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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 Mar 26. 2016

#6-2. 파비안, 뻔한 사람들의 흔한 이야기

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구, 비와 바람의 소나티네)

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6-2. 파비안, 뻔한 사람들의 흔한 이야기    



  다음 날, 오랜만에 향긋한 티셔츠로 아침을 시작했다.      



"초벌 빨래만 열 번, 헹굼만 수십 번을 했어. 도대체 얼마나 오래 빨래를 안 한 거야? “     



  아무리 빨아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채취를 어떻게 제거한 것인지 궁금해서 물었다가 괜히 볼멘소리만 얻어맞았다. 비누와 샴푸 온갖 향기 나는 제품으로 세탁을 한 그녀에게 왠지 미안하고 고마웠지만,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답답한 부분도 있었다.      



“나 솔직히 말해도 돼?”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물었다. 흔쾌히 물어보라고 하려니, 왠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종일 걷느라 너도 힘들었을 텐데 기꺼이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주어서 너무 고마웠어. 

그런데, 사실 나를 위한 일이었기도 해.

내가 비누나 샴푸 냄새를 되게 좋아하거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솔직함은 나를 당황스럽게 하기 충분했다. 내게서 풍기는 채취가 부끄럽거나 창피해 서가 아니라, 내가 편하고자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에 부끄러워 당혹스러웠고 동양인들에게서는 자주 보지 못했던 직설적인 화법에 놀랐다. 동양인들은 그것이 서양인들에만 국한된 행동인지 원래 그들의 문화인지 알 수 없지만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고 공손하여 늘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런 그들이 자칫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것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터라, 방심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파이터처럼 순간이지만 정신이 아득했다. 

  흩어진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떨어져 있던 두 개의 톱니가 맞물려 움직이는 것처럼, 그제야 그녀의 성격과 사연 배경들이 하나로 보이고 완전해졌다. 지난 내 경험에 비추어 그녀도 격식과 예의로 무장된 다른 아시아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편견을 거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서양이나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녀는 이제 이상한 사람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호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되었다. 적어도 공혜란이라는 이 사람은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불어왔다. 신선한 아침 공기처럼 모든 것이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이 상쾌한 기분에 갓 뽑은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완벽할 것 같았다.      



“저기 카페 앞에 이안이랑 사람들이 있는 거 보니, 저 카페 문을 열었나 보다. 

우리도 커피 한 잔 할까?”


“커피 한 잔 좋지. 하지만, 나는 오늘 많이 걸어야 해. 오랜 시간을 모닝커피에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


“오늘 걱정은 내일로 미뤄도 좋아. 가자.”


          

  이안을 포함해 어제 함께 저녁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던 사람들이 카페에서 이미 아침을 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침부터 수다 꽃을 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안의 시선이 자주 산만하게 분산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쫓아보니, 그 시선 끝에는 언제 들처 멨는지 뚱뚱한 배낭을 멘 토끼가 뚱뚱하게 부은 얼굴로 다시 시계를 보며 불안해했다. 배낭 때문인지 불안함 때문인지 엉덩이를 의자 끝에 겨우 살짝만 걸친 그 모양은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우리가 오늘 함께 걷기로 했었나.’     



  순간 착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운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녀가 벌떡 일어났고 테이블 위에 2유로를 턱 올려놓고 가버렸다.    


  

“너는 정말 끝도 없이 쉬는구나. 우리 지금 도착한 게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거야.

오늘 출발하긴 하는 거니?”



  내가 무어라 변명할 사이도 주지 않고 그녀는 그대로 가버렸다. 이안과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리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길을 나섰다. 첫걸음은 함께 시작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제 페이스대로 하나씩 둘씩 멀어져갔다. 그리고 이안은 영국의 아들에게 보낼 엽서를 붙이기 위해 중간에 다른 마을을 들린다며 내게 인사를 하고 갈림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가 내게 이상한 말을 했다. 


     

“파비안, 너는 센스가 좀 없는 것 같아. 

그녀는 너랑 걷고 싶어 했어. 그래서 너를 줄 곳 기다렸고 그런데 네가 모르고 수다만 떨고 있으니 그녀가 화가 나서 혼자 가버린 거 아니야. 네가 달래 줘야 해. “     



  이안은 파울로 코엘료를 닮았다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그런데, 정말 파울로 코엘로 친척쯤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란과 내 사이에 이야기를 황당무계하게 만들어냈다. 소문들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의 말은 모두 그에 의한 100% 추측이며 허구였다. 이안의 말에 어떤 악의적 의도가 담겨있지 않다는 것은 묻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동네 처녀와 총각 짝을 맺어주고 싶은 동네 노인의 오지랖쯤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그렇게 떠나버린 란이도 이안의 그 말도 내 머릿속에 그리 오래 남아 있지 않고 사라 질 것은 뻔했다. 그것이 내가 불필요하게 화가 나거나 감정의 동요가 없었던 이유였다. 그렇게 이틀 만에 다시 혼자 걸었다.  

      

  불과 이틀간의 동행이었는데 말없이 다문 내 입술이 새삼스레 어색했다. 오후가 지나고 저 멀리 언덕에 개미처럼 배낭을 이고 올라가는 란이 보였다. 그녀가 이미 언덕 위에 점이 된 것으로 보아 완만해 보이는 저 언덕은 꽤 가파를 것이며 끝까지 올라 넘어야 하는 것이 보였다. 경험 상 그녀는 언덕을 넘고도 쉬지 않고 움직일 테니 언덕을 올라 따라잡긴 좀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마침 허기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마을 어귀에서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루카를 마주쳤다. 루카와 점심을 함께 하며 밀린 소식을 주고받았다. 루카스는 휴가가 끝나서 벌써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나탈리는 걸음이 빨라서 벌써 우리보다 2,3일은 앞에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루카는 3주가 되어가도록 숙소에서 잠을 잔 것이 단 두 번뿐이라고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면 즐길수록 그는 란이처럼 외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했다. 그리고 곧 돌아가면 아내와 아이에게 더 잘할 수 있을 자신도 생겼다고 했다. 같은 상황, 비슷한 외로움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식사 후 다시 길을 나서는데, 루카가 정해진 루트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왜 그쪽으로 가는 거지?”


“대충 봤는데, 이쪽은 초록 초록한 지루한 산이고 이쪽은 해변을 끼고 산책로가 있더라고. 그리고 그 길을 조금 더 따라가면 다시 카미노 길과 맞닿게 되어 있어. 루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길이야. 네가 전수해준 방법이잖아. 스스로 길을 즐기는 방법. 너도 갈래?”     



  그를 따라나섰고 얼마 가지 않아 우리는 길을 잃었다. 무엇 때문인지 공사 중인 팻말이 보였고 길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돌아가기엔 이미 먼 길을 와버렸고 무시하고 계속 걷자니 조금 위험해 보였다. 루카는 그런 모험에 꽤 설레어했다.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판타지 모험이라 여겼고 주저 않고 계속 해변 길을 따라나섰다. 그런 모험은 나도 지금까지 충분히 경험해보았고 무엇보다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는 것이 불안했다. 숙소가 아니더라도 비박을 할 수 있는 작은 공소라도 찾아 오늘 일정을 마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시 만날 인사를 하고 우리는 거기서 헤어졌다.

  루카와 헤어지고 나서 한두 시간 가량 길을 잃고 헤맨 것 같다. 독일에서 가져온 휴대폰은 아주 오래된 구식 휴대폰이어서 충전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시계도 없어서 시간이 언제쯤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변이 어두워지는 정도로 대략적인 시간을 추측할 뿐이었다.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다가 종소리를 들었다. 눈을 감고 종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집중했다. 바람은 북쪽에서 불어왔고 바람이 내게 부딪히고 난 직후 소리가 살짝 커졌다가 다시 약해지는 걸로 봐서 내가 맞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걷다 보니 잃어버린 노란 화살표가 나타났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 이 길에 계속 머물면 언젠가 숙소든 성당이든 나오게 되니 말이다. 

  화살표를 따라 조금 더 걸으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담한 성당의 작은 종탑도 보였다. 하지만, 성당 앞으로 바(Bar)가 두 개나 있고 슈퍼와 약국, 벤치까지 놓여 있는 걸 보니 이 작은 마을의 중심지인 것이 분명했다. 늦게까지 사람들이 머물 것이고 일찍부터 사람들이 오갈 것이 분명했으며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덧 가느다란 줄기가 되어 있었다. 주저 없이 알베르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안도 있었고 못 보던 사람들도 몇몇 보였지만, 그녀는 없었다. 대충 정리하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아까 바가 있던 그곳이 동네의 중심부가 맞았고 이 동네는 걸어서 1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크기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내게 동네 꼬마들이 달려와서 스페인어로 무슨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성당을 가리켰다. 아이들이 하는 말에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단어들은 ‘우나 치까(una chica: 한 여자)', '아키(aquí: 여기)', '하뽀네스(japonés: 일본의)' 정도였다. 그녀가 성당에 있다는 것일까? 일본 사람이라고 칭할 만한 동양인은 란이 말고는 없을 테니까, 아이들은 란이가 성당에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성당은 미사 중이어서 들어가지 않았고 대신 맥주와 포도주를 사서 숙소 옆에서 이안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둑 해지기 시작하고 그녀가 숙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이 함께 포도주 한 잔을 하자고 권했지만, 피곤하다며 곧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한 듯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숙소에 점등이 되었고 모두 침대에 몸을 뉘었다. 벌써 누군가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오늘은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보다 빗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밤이다.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한 비의 저주는 내게까지 닿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나는 기분이 나쁘지도 않고 여전히 비를 좋아하니까. 비는 그냥 비일 뿐이니까. 

  한 사람에서 시작한 코골이는 곧 여러 사람의 합주로 변주되었고 빗소리는 곧 변주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비가 멈춘 것인지 혹은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는지 모르겠다. 의식은 살짝 깨어 있었지만 분명 나도 잠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숙소 어디선가 짧고 강렬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악!”     



  변주를 울리던 코들은 일제히 멈추었고, 숙소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그제야 다시 빗소리가 선명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썩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침낭 소리, 헛기침 소리만이 있었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잠결에 헛것을 들은 것인지, 출처가 어디 있는지를 찾느라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그대로 아침이 밝았다. 내 마지막 기억의 끝은 하나 둘 다시 시작된 코골이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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