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푸르던 어스름이 새벽이슬을 맞으며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하면, 온갖 산새 소리가 창문 틈으로 햇살보다 먼저 스며든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새소리는 참새 소리가 전부였는데, 산속에 있는 이 마을에는 참새 이외도 수많은 새들이 함께 지저귀며 아침을 불러들인다. 스페인 북쪽의 어느 작은 마을, 그리고 이 작은 알베르게에 불과 열댓 명이 사이좋게 침대 하나씩 차지하고 밤을 보냈다. 몇몇 되지도 않은 사람들의 국적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의 언어로 안부를 묻는다. 발을 가리키고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나머지 손가락을 쭉 펴내 보이면, 어제 아프다는 발이 괜찮냐는 걱정이고 두 손을 모아 한쪽 얼굴에 대고 옆으로 까닥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 간밤에 잘 잤냐는 안부인사가 된다. 모두 다른 소리로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하나의 멜로디가 되는 것처럼 몸짓과 표정으로도 같은 마음으로 뜻이 통하여 하나의 마음 된다.
먼저 일어난 이안이 출발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던 나의 안부를 묻는다.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안처럼 먼저 다가와서 웃어준다. 웃음 하나로 커다란 선물을 받는 것처럼 가슴 깊이 따뜻해지고 감사했지만, 그들의 대한 기대치가 없기에 그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서운함을 느낄 일도 없었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나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내어준 만큼 어떤 기대를 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짐을 다 싸 놓고도 쉬이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벌써 1시간째 파비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 그가 혹시나 아침에 숙소로 다시 들르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와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오늘은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으므로 언제 올지 모르는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를 기다리며 마냥 숙소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순 없었다.
모두를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숙소를 몇 번이나 구석구석 확인했다. 잊은 것이 없는지, 누군가 흘리고 간 것이 있으면 챙겨뒀다가 다음 숙소에서 만나면 건네줘야지 했건만, 오늘은 휴지 한 장 잊지 않고 꼼꼼하게 챙겨 모두 길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숙소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길을 나섰다. 겨우 하루를 함께 걸었을 뿐인데 몇 년 정들었던 친구가 말없이 떠나버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도 정이 들었단 말인가.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았음에도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성당을 찾아 오늘 가야 할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는 대부분 성당이나 회관 처마에서 노숙을 했었고 일찍부터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니 어제 그가 성당에서 노숙을 했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성당에서도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내 발길은 성당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창살에 걸린 피노키오 인형이 나처럼 청승맞아 보여서 다각도로 몇 번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끝내 발길을 돌리면서 같은 길도 괜스레 몇 번 더 찍어 본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 데 어디선가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탁탁탁’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곳을 찾았으나, 동네 어르신이 지팡이의 도움을 받으며 곧 나를 지나쳐갔다. 바보 같은 미련을 털어버리고 배낭을 고쳐 멨다. 더 긴 시간 혼자였고 고작 하루를 걸었는데, 그사이에 익숙해졌단 말인가. 다시 씩씩하게 언덕을 올랐다. 금방 또 다른 지팡이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도 지체 없이 돌아봤다. 이번엔 아침 빵을 사러 나온 동네 할머니인가 싶었는데 할머니 대신 그가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반갑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으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넸다. 의아한 듯 그도 질문같은 인사를 했다.
“오늘 너는 꽤 이른 출발인데?”
“오늘은 꽤 늦게 출발하네?”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닌데, 아까 보았던 피노키오 인형이 떠올라서 인지 나도 모르게 코끝을 어루만졌다. 다행히 그를 찾느라 늦게 출발한 것을 들키지 않은 것 같다. 그날 우리는 하루를 더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제법 많은 책을 읽었으며, 그래서 신의 존재보다는 그 신을 믿는 인간의 신앙 법에 회의를 느껴 종교 활동이 무의미하다고 했으며, 사랑을 믿지 않고 결혼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님 지독한 상처가 그를 부정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사랑에 대한 견해와 입장의 거리는 쉽게 좁혀질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달랐다. 그럼에도 그와 함께 걷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 시간에 머물고 싶게 했다. 사랑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시선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며 걷는 동안은 조금도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며칠 전과 다르게 1시간에 4Km 정도를 걸을 수 있을 만큼 평균 속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맛본 빨간 특제 소스의 맛이 며칠 동안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며 내게 남은 것이 있느냐 그가 물었다. 내게서 고추장 튜브를 확보한 그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부엌부터 확인했고 이안과 함께 포도주와 찬거리까지 모든 준비를 해두었다. 대충 씻고는 곧바로 혼자서 8인분의 리조또를 만들어 냈다. 샐러드와 포도주를 곁들여 만족스러운 저녁 시간을 보냈고 나는 파비안의 티셔츠를 대신 세탁해주었다. 호사스럽게 느껴질 만큼 여러 사람과 웃고 떠들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그에게 고맙기도 했고 흥에 취해 그가 오늘도 빨래하는 것을 잊은 것 같아 자처해서 그의 티셔츠를 세탁했다.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쫓으며 그들의 생각을 염려하느라 제대로 그 속에 섞이지 못했는데, 겨우 이틀 만에 그 앞에서 내 생각이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그의 자유로움이 전염병처럼 내게 스며든 것인가 하는 착각이 이렀다. 그런 그에게 티셔츠가 아니라 바지며 등산화까지 기꺼이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길을 나섰고 아침이 익숙하지 않은 내게 그는 자연스럽게 모닝커피를 제안했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 내가 그의 패턴에 맞추어 이틀을 함께 했더니 그것은 어느새 그에게 당연한 아침의 시작이 되어 버렸다. 나는 어서 빨리 걸어보고 그날 내 상태를 점검하며 얼마나 걷고 몇 번을 쉴지 알아보고 싶었는데, 이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그는 늘 하던 대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오전 10시가 넘었는데, 언제까지 그는 아침을 즐길 것인지, 기다리자니 답답했다.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함께 출발을 했지만, 암묵적으로도 함께 걷자고 서로 의견을 합친 것도 아니었다. 그도 자신의 방법대로 즐기는데, 나라고 굳이 그에게 나를 맞추며 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내가 마신 커피 값에 팁을 얹어 2유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길을 나섰다.
“너는 정말 끝도 없이 쉬는구나. 우리 지금 도착한 게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거야.
오늘 출발하긴 하는 거니?”
조금 짜증이 섞이긴 했지만, 꾸물거리는 그가 답답해서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렇게 내뱉고 길을 나서면서 내내 조금 후회스러웠다. 그를 알게 되면서 이상하리만치 그가 편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내 생각들을 쏟아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를 다시 마주치면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이런 내게 섭섭함을 표현하고 멀어졌던 친구들 생각이 나서는 아니었다. 꿈을 꾸고 깨어난 것처럼 당연하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걷는 것이 낯설진 않았지만, 혹시 그가 뒤따라오는 것은 아닌지 자주 돌아보며 확인했다. 어제처럼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온종일 혼자 걸어 숙소까지 도착했다. 의아했던 것은 혼자 걸었음에도 그와 함께 걸었던 날처럼 늦게 도착했다.
오늘 머물러 가려고 했던 마을에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작아도 너무 아담한 마을이었다. 숙소 일람표를 확인해보니 몇 키로 앞에 다른 숙소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이미 시간도 늦고 날씨도 꾸물거리기에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저 멀리 이안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안을 보니 정오쯤 산 중턱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근한 불편함에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를 끌고 숙소로 향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듯 함께 숙소로 향하면서도 이안의 말이 머릿속에 윙윙거렸다.
“몰랐어? 그 아이도 남자야. 그는 널 안고 싶고 입맞춤하고 싶은 거야.”
“이안, 그건 말도 안 돼. 우린 고작 이틀을 함께 걸었고, 무엇보다 그는 나보다 9살이나 어리다고. 내게 그는 애송이 정도가 아니라 꼬꼬마 아기와 다름없다고.”
“그렇지 않다면, 그가 왜 오늘 너를 피했겠어.”
“그러지 마. 이안. 아기 같은 그와 나를 엮는 소설은 그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어.”
“란! 너야 말로 남자를 잘 모르는 거 같은데.”
“그런 소리 듣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나 먼저 출발하는 게 좋겠어.
인연이 닿으면 이따가 숙소에서 보자고.”
갑자기 소름이 끼치면서 싫었다. 그는 나보다 9살이나 어린 꼬마다. 내게 그는 아기나 마찬가지다. 내가 초등학교에서 열심히 구구단을 외고 있을 때, 그때 그는 겨우 뒤집기 성공하며 부모님에게 재롱을 부리고 있었을 것이며, 내가 대학생활의 신세계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초등학교에서 막 구구단에 입문했을 텐데, 그야말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조합이었다. 내 과장된 웃음과 다르게 이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이안의 입장에서 그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느낌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안의 말이 불편했다.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 하여도 굳이 들어서 좋을 것 없는 오지랖이고, 온전히 이안의 추측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는 그렇게 함부로 말해선 안됐다. 서양인 특유의 개방적인 면인지 본디부터 거침없이 말하는 성향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전혀 흥미롭지 않은 가십이었다. 그의 말을 좀 더 강하게 잘라냈어야 했는데,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숙소라고는 정해져 있고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도 하나뿐인 길 위에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 것은 동쪽에서 뜬 해가 서로 저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나를 발견하고 숙소로 잡아끌던 이안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한다.
“파비안이라면, 바로 전 마을을 지나자마자 나오는 숲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데?”
이안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편한 이유를 명확하게 모르겠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일까, 이안이 타인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인가, 아니면 능글맞은 웃음 때문일까? 큐브처럼 표정이 뒤섞이고 있는데 이안이 보였던 그 길에서 파비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안과 같은 숙소에 머물면서 또 어떤 말을 할지 들을 자신이 없었다. 얌전히 듣고 웃으며 농을 주고받을 만큼 능청스럽지 못한 내가 어쩌면 얼굴을 붉히고 화낼지도 모른다. 걸어서 산책으로 고작 몇 분이면 마을 전부를 돌아볼 만큼 작은 이 마을에는 이안을 피해 내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작은 바 두 개는 이미 다른 순례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슈퍼 앞 벤치에선 동네 할아버지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남은 건 숙소와 굳게 문이 닫혀 있는 성당.
성당 처마 밑에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오가는 것들이 보인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새에게 모이를 주는 동네 꼬마,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는 동네 어르신들, 슈퍼에 장 보러 나온 동네 아줌마, 그리고 간간이 그 사이에 섞인 나와 같은 순례자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굵어졌다. 아직 스페인의 갈리시아(Galicia) 지역으로 진입하지 않았지만 곧 아스투리아스(Asturias) 지방으로 진입해서 인지 아니면 벌써 10월이 되어서인지 날씨도 전 같지 않았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며칠 동안 파비안, 그 꼬마 때문에 끊임없이 생각을 하느라 놓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 파비안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알아내야 한다. 이안의 말대로 그가 자리를 잡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것은 아닌지, 내가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거라면 왜 내어주고 싶은지, 부글부글 머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닫혀 있던 성당 문이 열렸다. 행여 누군가 나를 볼세라 얼른 성당으로 몸을 피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즐거운 마음에 새어나온 웃음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 터져 나온 황당함이었다. 대학 때, 공부를 그만두고 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적이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이 팔려 맥없이 쓰러지고 일도 그만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는 모두 모르는 사람들뿐이었고, 학과 특성상 혼자서만 공부를 잘한다고 잘할 수 있지도 않았다. 악마에게 지독하게 데어 사람들이 모두 악마처럼 보였던 때라 쉽게 누구에게 다가서지 못하던 때였다. 누구에게 다가서지 못해 다가오는 사람들만 사심 없이 받아들였다. 걔 중엔 호감이 가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악마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던 때라 다가온 사람들과도 완전히 친해지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학교에서 소문난 꽃뱀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줏대 없는 갈대가 되어 있었고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곳을 닦아내는 헝겊에 비유하기도 했었다. 그때 내 머리 속에서는 악마의 생각만 가득했고 악마가 찢어놓고 간 마음을 꿰맬 여력도 없던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 잘못이었다. 내 상황이나 속을 알 리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행동은 쉽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지금 내가 또 오해 사기 쉬운 행동을 하지 않았나. 그로 하여금 이안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돕지는 않았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마음이 정말 이안의 말과 같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이들을 피해 학교 뒷산에서 시간을 보냈듯이 지금은 성당 구석에서 또 나를 돌아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안이 내게 악마와도 같았다.
오후 늦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조그만 마을을 흠뻑 적시고도 밤새 내렸다. 밤새 굵어진 빗방울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간밤에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잠이 확 깨었다. 그 비명소리는 다름 아닌 내게서 나온 소리였다. 내 비명소리에 나도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분명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빗소리는 서서히 낮아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빗소리와 함께 곧 내 옆과 아래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까지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우주의 한 가운데, 어쩌면 한쪽 끝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것 같았다. 땅과 하늘엔 경계 없이 암흑뿐이었고 미세한 소리도 없는 진공 상태에 가까웠다. 상황이 파악도 되기 전에 저 멀리 아치 모양의 출구가 보였고 거기서부터 작은 빛이 세어 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걸었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었다. 빛은 점점 멀어져갔고 발버둥 칠수록 내 몸도 서서히 어둠 속에 잠식될 뿐이었다. 어둠은 발끝에서부터 가슴까지 천천히 나를 삼켰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을 비틀고 때리며 사력을 다해 고함을 쳤다. 부지불식간에 턱까지 숨이 차올랐고 마지막 비명소리와 함께 어둠이 나를 토해냈다.
모두에게 너무 미안했다. 코 고는 사람 한둘 있을 법한 숙소에는 어둠보다 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미 눈은 떴지만 정신은 현실과 어둠의 경계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 순간, 어둠을 가르고 떨어지던 반가운 그 소리. 빗소리는 방울방울에 음향 확장기를 달고 자신이 떨어지고 있음을 사력을 다해 알리듯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똑똑똑. 투툭투둑. 후두두두두둑.
악마의 저주가 있고 난 뒤로, 빗소리에 반가움을 느꼈던 것은 처음이었다. 선명한 빗방울 소리와 함께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는 오감을 긴장시켰고 이렇게 밤을 지새워야 하는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어디선가 시작되는 반가운 코골이. 다들 다시 깊은 잠에 빠지게 되어 다행이지만, 모두들 나처럼 어둠 속에서 빗방울을 세었을 생각을 하니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내게 끔찍했던 어떤 것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치도록 반가운 무엇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꿈일지도 모른다.
파비안과 나는 며칠을 더 함께 걸었다. 함께 걸었지만, 언제나 나란히 걷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걸었고 반대로 아침에 나는 의욕이 넘쳐 속보하듯 급하게 걸었으며 정오가 되면 서서히 기력을 잃고 오후에는 시작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걸었다. 오전엔 주로 내가 앞장서서 걸었고 그 속도는 정오를 기점으로 점점 비슷해졌다. 걸음걸이가 비슷한 동안은 나란히 걸으며 온갖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후가 되어 체력이 떨어지면 그가 앞서 걸으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수시로 확인하며 걸었다. 오후가 되면 그와 나 사이의 일정 간격을 벌이지 않고 유지하는 것으로 페이스를 조절했다. 기다려 달라 말 한 적 없고 함께 걷자 제안도 하지않았으며 걸음 속도를 일부러 맞추지 않았지만, 그 끝은 묘하게 같은 지점이었다. 자연스러운 동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수투리아스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어느새 계절도 바뀌어 있었다. 이글거리던 스페인의 태양도 주춤하기 시작했고 길 위의 흙색 양탄자도 오색의 낙엽 길로 바뀌었으며 먹구름도 자주 비쳤다. 벌써 10월도 며칠이나 지나 있었다. 아수투리아스 지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안개와 이슬이 빈번했지만 갈리시아 지방처럼 수시로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이슬 하나 없이 건조한 사막의 메세타와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리는 갈리시아 지방이 적당히 뒤섞인 운치 있는 지역이었다. 갈리시아 지역으로 걸음이 옮겨갈수록 날씨도 조금씩 음침해지고 볕도 사그라지고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밤비 이후로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조금씩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매우 세차게 쏟아부었다. 걸어야 하는 길도 그날따라 유독 평탄하지 않았다. 산길은 금방 진흙길이 되었고 산길이 끝나면 속도를 무시하고 달리는 대형 트럭이 난무한 고속도로 옆으로 몇 시간씩 걸어야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어도 쏟아지는 빗속을 걷기에 충분히 힘든 날이었다. 몸도 으슬으슬 추워지고 있었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이 절실히 필요한 오후였다.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질 때쯤, 작은 카페가 하나 나왔다. 내 마음은 쉬지 않고 숙소까지 달리고 싶었지만, 파비안은 또 그곳에서 쉬어가고 싶어 했다. 그와 싸워 내 의견을 관철시킬 자신이 없었다. 몸도 좋지 않았고 기분 나쁜 빗속에서 매 순간 기억을 가르며 걸어야 하는 일에도 지쳐있었다. 결국, 그와 이곳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친절한 카페 주인이 따뜻한 차를 내왔고 몸이 좋지 않았던 파비안은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타협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몸이 좋지 않다니까, 갈리시아 수프 같은 국물을 조금 만들어 줄 수 있대.
그리고 여기 숙소 진짜 좋아. 별 3개짜리 호텔인데 우리 둘이 합쳐서 40유로도 안 해.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게 어때? 코 고는 사람도 없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는 꽤 신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이 꼬마와 같은 침대에 누워 동침을 한단 말인가. 이 아이랑 내가 연인이라고 하여도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이다 결정할 법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제안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내가 보수적인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사는 한국에서 보통 성인 여자들은 이런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 않는 것이 분명했다.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때마침 이안이 카페 앞에 나타났다.
“조금만 더 가면 다음 마을 숙소가 나오는데, 너희 둘 벌써 지친 거야?”
“아니야. 우리도 여기서 조금만 쉬다가 금방 갈 거야.”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이따 보자고.”
이곳에 묵어가자고 쉽게 제안했던 그는 애초에 기대가 없었던 것일까, 내 생각을 읽고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랬던 것일까, 잠깐 복잡했던 마음이 이안과 대화를 듣고 곧 안심이 되었다. 이안이 떠나자마자 때마침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굵은 줄기로 내리기 시작하는 이 비는 우연일까. 이제 모든 것은 내 결정에 달렸다.
망설이자니 해가 떨어질 때까지 시간이 여유치 않았다. 이 빗속에서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면 넉넉히 한두 시간은 더 필요했다. 고민하는 내게 가볍게 방을 구경만 하라는 주인의 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아늑한 방은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상술에 능한 주인은 망설이는 내게 5유로를 더 할인해준다고 제안했고 그 제안에 결국 이 숙소에 짐을 풀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듯 결제를 마치고 나니 그때부터 현실적인 걱정들이 시작되었다. 카페 위에 단지 몇 개의 호텔방을 꾸며놓은 이 숙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청결하고 따뜻했다. 그런데, 맙소사! 방에 딸린 화장실은 반투명 유리였다. 당황한 내가 뒤늦게 방을 바꾸거나 환불을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홀린 듯 너무 쉽게 결정한 일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게다가 더블침대를 보는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머릿속이 터질 듯 나는 이렇게 복잡한데 그는 순수한 표정으로 방 안을 뛰어다니며 들떠 있었다. 세탁에 소극적인 그가 그동안 묵힌 빨래를 모두 하겠다며 세탁기를 보자마자 흥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그야말로 암흑 상태였다. 차라리 그가 애인이라면 이렇게 심란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멍해있는 사이 그는 어느새 샤워도 마치고 빨래를 한 곳에 모아놓고는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를 알게 되고 그가 직접 기타를 손에 잡은 것은 처음 보았다. 당장 오늘 밤 이 더블침대를 어떻게 나누어 잠을 청할지 내 걱정은 태산 같은데, 그는 태평하게 기타 줄을 튕기고 앉아 있었다. 기타와 그를 내 보내고 나도 일단 샤워를 마치고 빨랫감을 정리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파비안과 나의 옷가지들은 세탁기 안에서 열심히 뒹굴고 있고 그도 침대 옆에서 뒹굴거리며 기타를 튕기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며 수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어떤 고민도 없이 태평할 뿐이었다. 속으로 이렇게 고민하고 걱정하는 내가 무안할 만큼 그는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나 혼자 너무 많은 생각으로 앞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일, 오늘은 여기서 저 아이와 묵어 갈 수밖에 없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를 이젠 무를 수도 없게 되었다.
잠들기 전, 며칠 전 이안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이안이 그러는데, 네가 나를 안고 싶어 한다던데?”
그는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이안이 그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그와 함께 걷고 싶어 투정을 부리며 2유로를 던져 주고 떠났었다며 그 날 일을 상기시켰다. 아무 생각 없이 2유로를 주고 먼저 길을 나섰던 나와 단지 길을 잃어 나와 하루 걷지 못했던 그를 두고 이안이 혼자서 러브스토리를 완성해낸 것이다. 파비안과 나는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이안과 파비안이 불편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는 이안이 어떤 나쁜 의도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고 애써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나도 그쯤은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상황이 그다지 반갑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에 대한 내 오해가 풀려 오늘 밤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을 쉬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우리는 따뜻한 수프를 얻어 몸을 녹였고 어쩌면 그 따뜻함에 내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세상에 우연하게 벌어지는 일은 없다. 우연한 인연도 상황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느끼는 그 우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퍼즐 조각처럼 부서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퍼즐 조각은 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조각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만든 퍼즐 조각은 세상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가 미래에 내 그림을 완성할 수도 있고 또는 나로 인해 만들어진 조각이 다른 사람의 그림에 꼭 필요한 하나의 조각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흩어져있던 그 조각들이 적당한 어느 날, 필요한 자리에 맞춰지는 그 순간, 그것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른다. 오늘 이 우연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그와 함께 걷는 순간부터 부서진 하나의 퍼즐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