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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 Sep 01. 2016

#14. 파비안,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구, 비와 바람의 소나티네)

14. 파비안,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마지막으로 울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문득 오래된 기억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퍼부어 쏟아지는 빗물처럼 거침없는 이 슬픔을 해결하고 싶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것들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게는 너무도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기에 정리하고 규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가버린 기차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두 발은 걷는 법을 잊었고 두 눈은 여전히 그녀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혹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기차가 멈출지도 몰라.'

'기차가 망가져서 멈추면 그녀 혼자 열차 안에서 심심할 테니 여기서 기다려보자.'     


  내가 이곳에 멀뚱히 서 있는 이유를 말도 안 되게 억지로 쥐어짜고 있었다. 멍청하게 기차가 사라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술에 취하 듯 슬픔에 취해 얼마나 오래 그곳에서 넋을 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그쳤고 기차도 몇 번이나 오고 갔다. 한 번씩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가 사라지고 이윽고 선로 쪽 백열등에서 노란빛이 새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태운 열차가 되돌아온다고만 한다면 이렇게 며칠 밤도 지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쯤 그녀는 마드리드 시내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열차에서 내리며 벌써 나를 잊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설레고 있을지 모른다. 아찔한 망상은 끝없이 가지를 뻗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봐. 자네는 어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가? 이제 오늘 들어올 열차는 화물차뿐인데......"     


산티아고 기차역

  친절한 역장의 스페인어는 알아들을 수 있지만, 대답할 실력은 되지 않아 머뭇거리자 티켓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리곤 이어 역내에서 노숙은 안된다고 타일렀다. 움직이기 싫다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역장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역장의 얼굴에 고맙다는 엉뚱한 말을 던지고 쫓겨나듯 역 밖으로 나왔다. 친절한 역장이 어쨌든 내 몹쓸 상상의 가지를 끊어주어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역 밖으로 나와서야 비가 그친 것을 알았다. 아직 어둑어둑해지진 않았고 내 앞으로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지만 또다시 역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신이 있다면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면서 그녀를 다시 내놓으라고 떼쓰고만 싶었다.          


  주변의 공기에서 쌀쌀함을 느낀 다리가 마지못해 걷기 시작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움직이긴 했지만, 그녀를 잃은 내 걸음도 방향을 잃었다. 목적 없이 휘청이는 발걸음은 깊은 슬픔에 묶여 그녀의 환상만 졸졸 찾아다녔다. 수많은 사람들 중, 그녀와 똑같은 배낭을 멘 사람들의 뒷모습이 도드라져 보였 길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만 보아도 루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빗속에서 울던 그녀를 선명하게 떠올렸다. 그녀가 떠났어도, 내 옆에 꼭 붙어있는 기억들이 아무리 생생하여도, 기억은 붙들고 늘어질수록 다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추억이 질척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지나치게 믿었고 오만했다.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이었다. 아름다움을 기계에 담아내고 스치는 생각을 종이에 붙잡아두는 것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흐르는 물처럼 지나면 다시 잡을 없는 추상적인 것들을 담으려고 시간을 허비하느니, 하나라도 더 가슴에 담고 눈에 새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했다. 그 결과, 지금 내 손엔 그녀의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쌀쌀해진 날씨를 걱정한 그녀가 남기고 간 팔목 장갑 한 켤레가 전부였다. 장갑을 낄 만큼 춥지 않았지만 장갑을 끼고 얼굴을 감쌌다. 다행히 아직 그녀의 향기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것들은 얼마간 그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내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일시적인 위로는 당장에 막힌 숨통을 조금 트여줄 뿐, 내 슬픔을 조금도 덜어내지 못했다.



  그립다.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떠올려도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잊힌 것들이 더 많았다. 마지막에 나를 따라 울던 그녀의 슬픈 눈망울만 각인되어 웃는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다. 그녀가 웃을 때 코끝을 찡그리는지, 미간을 찡그리는지. 웃을 때 그녀의 볼에 있는 보조개가 오른쪽이었는지, 왼쪽이었는지.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가르마가 주로 왼쪽에 있었는지, 오른쪽에 있었는지. 산티아고 직전에 갑작스러운 통증을 호소했던 그녀의 발은 오른쪽이었는지, 왼쪽이었는지. 확실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눈물만 떠오르는 나는 갑자기 바보가 되었다. 이런 것들보다 더 슬픈 건,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꽁꽁 감싸고 있는 답답한 이 아픔의 순간이 지나면 그녀의 웃는 모습이 다시 떠오를까? 무언가를 억지로 기억하려고 애쓰며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어떤 것이 희미해지는 게 이렇게 슬픈 것인지 미처 몰랐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만큼 아팠다. 아프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통증이 내 가슴을 움켜쥐고 나를 자책하고 있다.   


'왜 나는 흔한 이 메일 주소도 묻지 않았나?'    

     

  기억은 오래될수록 추억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기억보다 추억을 남긴다. 단편적인 기억 조각들로 이루어진 추억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도, 그때 그 시간도 아니다. 그때의 공기, 그때 그곳의 분위기, 단지 그때를 추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립다 하여 반드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도 아니다. 추억이 예쁜 것은 그 때문이고 나쁜 기억을 추억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행복한 기억이고 아름다운 추억이라 해도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이 추억이 되는 건 싫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마른 가지에 좀먹듯 조금씩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추억이 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산티아고 구석구석 그녀의 환영이 없는 곳이 없었다. 교회의 종탑이 보이는 거리 왼쪽에 우리가 즐겨먹었던 케밥 집에 그녀가 앉아 있었고 산티아고 성당 뒷골목엔 우리가 좋아하는 산티아고 케이크와 진한 에스프레소를 파는 카페에서 그녀가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다. 엽서와 기념품을 샀던 상점에서 그녀는 벌써 50번째 엽서를 샀고, 방금 그녀는 상점 뒤의 우체국에서 51번째 엽서를 부치고 있었다. 산티아고 최고의 브라우니를 파는 디저트 가게와 문어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 완주 증서를 받는 순례자 사무소와 안내 사무실, 갈리시아 산 생맥주를 파는 술집과 그녀가 좋아하는 모히또를 파는 바(Bar)까지 온통 수십에 달하는 그녀의 환영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 동안은 산티아고에 다시 오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성당 뒷골목에 그녀와 함께 갔던 카페 야외 테라스에 자릴 잡고 앉았다. 그녀와 내가 앉았던 그 테이블에 그대로 앉아 그녀가 좋아하는 산티아고 케이크를 주문하고 내가 마실 에스프레소 대신 그녀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어차피 무엇을 목으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그녀가 마주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럼 넌 여기 이 카페에 종일 앉아 있다가 어제처럼 근처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 쉬던가.

나는 지금 길을 떠나고 다음 마을에서 그 사람들과 묵으면 되겠네.

우리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그들은 또 새로운 소설을 쓰겠지.

어떤 이야기든 아름답지 않고 끔찍할 것이고 그들의 퇴폐 소설은 거기서 끝나도록 두는 게 낫겠어.”     


  언젠가 그룹 사람들 때문에 티격태격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그녀의 불편함에 조금 더 공감해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알베르게로 갈 것을 뒤늦게 엉뚱한 카페에 앉아서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왜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눈치도 센스도 찾아볼 수 없는 나란 남자, 답이 없다.      


“날 좋아하기는 해?”

“널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없어.

지금껏 여러 여자 친구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적 없었고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어. 그런 마음이 든 적도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그게 나빠?”               


  그것은 나빴다. 언젠가 그녀가 물었던 질문에 교묘하게 빠져나갔던 일이 불쑥 떠올랐다. 사람을 만나고 함께 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내 경험과 내 기준으로 말도 안 되게 터무니없는 말을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없다니! 그럴듯한 말장난이었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교묘하게 피하기만 했던 것일까? 그 말이 가진 책임을 피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해본 적 없던 말이었기에 어색하고 이상했었다. 한 번도 강하게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라 맞게 느끼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 들어줄 이가 없는데 허공에 미안함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바람이 좋아.”

“응. 알아. 나도 바람이 좋아.”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것도 알아?”

“응. 그것도 알아!”

“진짜? 어떻게?”

“몰라. 그냥 알아.”     


  그녀가 좋다. 어디서부터 불어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바람을 닮은 인생이 좋았던 것처럼 나도 분명 그녀가 좋다. 거대한 폭풍우를 품었던 그녀의 지난 시간들도 좋고 그로 인해 그녀가 심미안을 갖게 된 것도 좋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여린 어깨를 품을 줄 알며 어떤 아픔이든 깊숙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녀가 좋다.


  그녀의 삶에 그때의 거대한 폭풍들이 없이 그저 평범하게 살았다면, 그녀는 이곳으로 떠나왔을까? 그리고 우리는 만나 졌을까? 첫 번째 카미노에서 아슬아슬하게 엇갈렸던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그때도 우린 지금처럼 서로의 마음을 갈망했을까? 이런 생각들을 그녀에게 전할 수 있었다면, 그때의 어리석은 내가 좀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또 달라졌을까?


  "만약에, ~ 라면"이라고 가정하며 상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지금 카페 앉아 수많은 가능성을 담아 상상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단지, 내 감정에만 충실했다. 내 감정에 충실했지만, 또 솔직하진 않았다. 그것이 후회와 아쉬움으로 번지고 곧 만약이라는 가정을 만들어 무수히 많은 가지로 뻗어갔고 상상의 열매를 맺었다.


 처음에 그녀가 지나는 바람인 줄 알았다. 그다음엔 그녀가 잠깐 내리고 떠나는 비구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그냥 한 번 내리고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잠깐 내리는 비로 알고 생각 없이 맞았다가 흠뻑 젖어버린 것이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

  그녀의 환영을 좇던 두 발이 이번엔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가득한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 중앙에 이제는 그녀도 없고 그녀가 좋아하던 거리 악사의 음악도 없었다. 더 이 비도 내리지 않았고 쓸쓸한 바람만이 커다란 날숨처럼 광장 안으로 불어왔다. 광장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간 바람은 그녀의 환영과 함께 곧 사라졌다. 더 이상 좇을 환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광장엔 잿빛 하늘을 닮은 어리석은 이의 회한 뿐이었다.

“너는 이 길이 끝나면 뭘 할 거야?”

“계획 같은 건 없어. 이 길이 끝나고, 글쎄,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의 도시 부르고스(Burgos)에 들렀다 갈까 해. 내키면 부르고스부터 프랑스 길 한 번 더 걸을 수도 있고.”

“나도 부르고스 참 좋아했는데, 그럼 부르고스부터 다시 산티아고까지 걸을 거야?”

“부르고스에 있는 알베르게를 시작으로 계속 걸어서 알베르게마다 들를 거야.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몇 주간 머물면서 봉사자로 일해 보고 싶어.”    


  언젠가부터 그녀가 어떤 것에 대해 물으면 나는 대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와의 대화는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내게 다음 목적지나 해야 할 임무를 주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버스 터미널을 향해 걸다. 오전 그녀와 함께 떠나온 곳으로 혼자 돌아오니 그녀의 부재가 더욱 깊게 느껴졌다.

  나처럼 쓸쓸하게 혼자 있는 사람, 아직도 산티아고에 도착한 기쁨이 가시지 않아 활기찬 사람들, 헤어짐 앞에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여자, 나는 언젠가 그들이었고, 그들도 나였다. 이 버스 정류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눈빛만으로 그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다.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그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은 공감 능력치를 하나 더 얻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다.           


  부르고스로 가는 버스를 겨우 한 자리 구할 수 있었다. 버스표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지퍼를 채웠다. 버스 정류장에 남은 그녀의 환상은 기차역에서 보다 조금 덜 슬펐다. 덜 슬픈 그녀의 환상 옆에 조금만 더 머물고 싶었다. 정류장 한쪽 구석에 배낭을 내리고 란이가 두고 간 나무 지팡이와 내 나무 지팡이를 어루만졌다. 내 손길이 닿은 지팡이는 요술 램프처럼 몽글몽글 그녀의 기억을 보여주었다. 첫날,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an)을 지나 두 번 째인가, 세 번째였던 산마루터기 어디쯤이었다. 늦은 여름까지도 한창 탐스럽게 피어있던 흰 물싸리 옆에 앉아서 지팡이로 쓸 나뭇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얼굴을 찌푸린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으레 그렇듯이, 어쩌면 당연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부엔 카미노.”

“어? 어! 부엔 카미노.”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축 늘어져 걷고 있던, 잔뜩 찌푸린 그녀의 얼굴은 나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반가운 기색은 아닌 듯했고, 매우 이상하고 몹시 신기한 호기심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뭐해?”

“지팡이 만들어.”

“지팡이? 그 조그만 맥가이버 칼로?  

“맥가이버? 그가 이 칼을 발명했나? 이건 그냥 스위스제 만능 칼이야.”

“그 조그만 걸로 다 다듬으려면 오늘 종일 걸리겠다.”

“종일 걸리면 어때? 지팡이 만들다 해 떨어지면 여기서 별보다 잠들면 그만이지.”          


  맥가이버가 발명했냐고 묻는 내게 한 번, 해가 지면 여기에 자리 펴고 그냥 잔다는 말에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 눈을 커다랗게 뜨며 갸우뚱했지만,  다시 묻기도 귀찮다는 듯 가버렸다. 나조차도 완전히 잊고 있던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또, 동화 같은 알베르게로 가던 날 지팡이 끝에 매달려 질질 끌려오듯, 꽁무니를 졸졸 따라오던 그녀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다시 볼 수도 없는 사람이 대책 없이 자꾸 떠오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에 관한 기억을 자꾸만 끄집어내는 것은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입이 웃기 시작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면 칼바람이 나를 치고 지나가도 따뜻했다. 란이는 그랬다. 얼핏 보면 방금 깎아 뾰족하게 심이 솟은 새 연필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뭉뚝한 몽땅 연필처럼 친근하기 짝이 없었다.                


  오후 3시까지 멍청하게 정류장 한쪽 구석에서 시간을 보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버스에 오르고 좌석에 앉아마자 잠이 들었다.  자꾸만 사라져 가는 추억의 꼬리를 움켜잡고 눈을 감았다. 보고 싶던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 본 적이 없었는데 꿈속에서 우리는 다정히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때처럼 끝없이 이야기하며 서로를 보고 웃고 끝도 없이 걸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끝에 나무가 하나 솟기 시작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저속 촬영한 영상이 눈앞에 펼쳐지듯 낮과 밤이 초단위로 바뀌었고 나무는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저 하늘 끝 어딘가까지 뻗어 있었다. 이상하였지만 꿈에서 우리는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고 아무 느낌 없이 그 나무 옆을 지나쳐갔다. 길 위에서 수없이 지나쳐갔던 흔한 나무라고만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나무에서 커다란 벌레 한 마리가 그녀와 내 사이로 툭하고 떨어졌다. 툭하고 떨어진 벌레는 별안간 수천, 수억 조각으로 찢어져 눈으로 구별하기 힘든 크기에 작은 벌레들도 분열되었다. 수억 개의 벌레가 된 그것들은 그녀와 나를 좌우로 힐끔 보더니 일제히 내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이 내 몸을 뒤엎으며 눈과 귀, 코를 막는 건 부지불식간이었다.      


  답답함에 눈을 뜨고 잠에서 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목부터 온 몸을 타고 꾸물꾸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까의 꿈이 이어지는 듯 몽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곧 극심한 가려움으로 이어졌다.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겉옷과 웃옷을 모두 벗고 찬찬히 몸을 살폈다. 굶주린 빈대들이 온몸에 들러붙어 흡혈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올라오기 시작했다. 빈대(bed bugs)는 왼쪽 발목을 시작으로 종아리를 타고 짧은 시간 순식간에 왼쪽 어깨까지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어냈다. 정류장 한쪽에서 잠이 들었을 때 빈대 습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부르고스에 도착할 때까지 9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끔찍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환상도 끔찍했고, 모기가 주는 가려움보다 수십 배로 끔찍한 가려움은 지독했으며, 그 와중에서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 참혹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 미친 사람이 되었다.          




  부르고스에 도착하자마자 알베르게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옷가지와 침낭, 배낭까지 모두 세탁했다. 책과 전자 제품을 제외한 모든 물건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남은 내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출발할 때 챙겨 왔던 낡은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 폰이 막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휴대폰이었다. 혹시 몰라 챙겨 왔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다. 문득 그때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Ich liebe dich, so wie du mich am Abend und am Morgen.., ( 이히 리베 디히, 조 비 두 미히 암 아벤트 운트 암 모르겐) 사랑해서 안 될 게 너무 많아. 그래서 더욱 슬퍼지는 것 같아. 그중에서 가장 슬픈 건......”            

   

  언젠가 내 기타 소리에 화답송으로 그녀가 들려준 그녀의 노래였다.            

    

“안녕!”

“안녕!”

“너 한국 사람이지?”

“어떻게 알았어? 노래 때문인가? 그럼 넌.., 혹시 독일인?”

“응. 그런데 독일에 그 노래 없어.”

“방금 이 노래 아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그런데 이거 그냥 가요가 아니라 가곡이라 정말 있는데 네가 모르는 걸 수도 있어.”

“태어나서 그 노래 난 오늘 두 번째로 들었어.”

“거 봐. 처음은 아니잖아.”

“처음이 아니긴 하지만.......”               


  그 아이는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었다. 그 아이와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길게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같은 노래, 같은 질문, 같은 한국사람, 대화 중에 습관적으로 긍정이나 대답의 의미로 짧게 내뱉는 ‘응.’이란 단어까지, 그 아이가 갖고 있는 그녀와의 공통점은 란이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녀를 두고 알베르게 앞 벤치에 홀로 앉았다. 가슴이 울컥울컥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생소한 감정이었다. 지난 여자 친구들을 분명 좋아서 만났지만 헤어지고도 그런대로 잘 지내왔기에 이별 뒤에 오는 먹먹함을 내가 알 리 없었다. 그녀가 떠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처럼 지금 이 감정 앞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 시간들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냈을까? 제발 내게 방법을 알려달라고, 이 먹먹함에 갇혀 곧 질식할 것 같다고, 내게 부디 출구를 알려달라고, 아무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다. 홀로 앉아 있는 벤치 위로 가을 낙엽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낙엽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나는 천 년씩 늙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득한 정신을 깨운 것은 난데없는 휴대폰 진동이었다. 진동음은 드륵드륵 꽤 요란스러웠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며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진동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주변의 시선은 일제히 내게로 꽂혔다. 부드럽지 않은 그들의 시선을 멀뚱히 마주했다. 나를 보던 그들의 시선은 내게서 내 물건들이 담긴 봉지로 빠르게 옮겨갔다. 의아했지만, 불편한 시선에 마지못해 봉지 꾸러미를 열었다. 휴대폰 진동음은 내게서 나온 것이었다. 휴대폰을 얼른 집어 들었다. 나도 외우지 못하는 내 독일 전화번호를 그녀가 알 리가 없는데, 짧은 순간에도 그 전화가 그녀이길 내심 바라는 내가 우스웠다.      


“여.. 보.. 세요?.”

“파비안 휴대폰 맞나요?”

“누구...... 시죠?”

“나......, 혜..... 란인데.....”

“뭐?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며칠 전, 첫 번째 카미노에서 스페인 아빠라 칭하며 그녀에게 살갑게 대해준 고마운 아저씨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가 직접 그녀가 있는 마을로 오기로 했는데, 연락할 길이 없어 당시 충전식 유심을 하나 사서 사용했었다. 그를 만나고 난 후, 더 이상 전화를 쓸 일이 없던 란이가 당시 무심코 그것을 내게 넘겼었다. 내 휴대폰이 오래되어서 맞을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그녀도 언제 다시 스페인에 올지 모른다고 하여 일단 받아 두었다. 내 휴대폰에 그것을 억지로 끼워 두었다는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워낙 낡은 휴대폰이라 될 거라는 기대 없이 대충 쑤셔 넣고 잊었다. 공항에서 그녀는 문득 그것의 존재가 떠올라 어딘가에 메모해 둔 유심 전화번호를 뒤졌다. 휴대폰이 언제 어떻게 켜졌는지, 배터리가 남았는지도 몰랐다. 다만,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물건을 모을 때 실수로 전원이 켜졌을 거라 추측할 뿐이었다.


“미안. 너 도보 여행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전화 안 하려고 무지 노력했는데.......”

“아니야.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아.”

“정말?”

“전화해줘서 정말 고마워.”


  반가운 마음은 몇 해를 보지 못하고 그리워한 사람처럼 거침없었지만, 목이 메어 어떤 말도 입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에게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전화할 것이냐고, 또 전화해달라고, 아니 매일 전화해달라는 부탁조차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있었지만, 그 마저도 내게는 벅찬 기쁨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그녀의 따뜻한 숨소리가 좋았다.      


“저기...”          


  그녀가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고민했고, 또 지금 망설이고 있는지 숨결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말해. 네가 하는 말은 뭐든 듣고 싶어. 어떤 말이라도.”

“우리 계속 연락할 사이가 아니라는 거 너무 잘 알지만, 나 또 전화해도 ? 한국으로 돌아가서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질 것 같아서......”

“당연하지. 다시 해줘. 전화. 언젠가 연락이 끊어지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부르고스는 내게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 사람을 만났고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튿날은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알베르게에서봉사자가 필하지 않았다. 11월에 들어 순례자도 급격히 줄어 봉사자가 많이 필요 없었다. 몇몇 안 되는 다른 순례자들과 모여 함께 저녁을 하고 모두들 일찍 잠을 청했다. 나는 오랜만에 알베르게 옆의 볏단 위에 침낭을 펼쳤다. 빈대에 물린 곳은 약도 바르고 시간도 지나 참을 만해졌다.


  볏단 위의 밤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풀벌레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모기들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숨소리나 코 고는 소리 대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마른 잎들을 간질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고스에서 불과 3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이곳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 촘촘히 박혀있었다. 투명한 병에 지금 이 소리와 하늘을 담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녀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어느덧 본 것과 들을 것을 언제나 제일 먼저 들려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밖에서 비박을 하기엔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이른 아침 이슬이 내려 일찍 잠에서 깼다. 천천히 걸으며 몸에 온기를 만들었다. 바람이 불숲에서 나뭇잎들의 풀피리 소리 대신 앙상하게 드러난 나뭇가지들의 바들바들 떠는소리가 으스스하게 들렸다. 스산한 기운에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 ‘끼익, 끼익’하며 낡은 나무문이 삐걱거리는 듯 을씨년스러웠다. 그래도 나무 한 그루 없는 언덕보다는 낫다. 아무 것도 없는 평지에선 바람이 들리는 곳 없이 내게로 바로 달려들어 꽤 쌀쌀했다. 혹시나 그녀의 전화를 놓칠까 가장 가까운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도 불안하여 내 손으로 포개고 걸었다. 손에서 조금씩 땀이 나기 시작했고 곧 점심때가 되었다.


  문득,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꽉 움켜쥐니 진동을 따라 심장도 함께 필요 이상으로 요동쳤다. 그녀가 분명하다. 지금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녀뿐이기 때문이다.     


“여보.... 세요?”

“란!

잠시 통화 가능해?”

바람이 많이 불지만, 괜찮아.”

“난 도착해서 하루 종일 잤어. 끝도 없이 자욱한 안개에 갇혀 있는 꿈을 꿨어. 안개가 지독해서 정말 한 뼘도 앞을 볼 수 없었어. 그 사이에 저벅저벅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는데, 파비안 네가 내 뒤에서 나를 질러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라고.

내가 불러도 대답 않고 들은 척도 안 하고 계속 그렇게 멀어지는 뒷모습에 소리치는 꿈이었어.”

“괜찮아?

마음은 참 슬픈데, 그렇게라도 너를 봐서, 뒷모습이었어도 좋았어.”

“란, 너에게 내가 당장 멀어지는 일은 없어.”

“시간과 거리가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말 거야.”

“즐거운 상상을 한다고 결과가 언제나 행복한 건 아니지만, 슬픈 결과는 분명 슬픈 망상이 만들어내는 거야.”

하지만......”

“걸으면서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지금 네가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아좋아.”

“그래? 그럼 이렇게 조금만 더 이야기할까?”

“너만 괜찮다면 부탁해.”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니 마치 그녀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조잘조잘 떠드는 그녀가 내 옆에서 나란히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몹시 행복했다. 너무 달콤한 기분에 빠져서 그러나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슬픈 복잡한 감정이 왈칵 차올랐다. 그렇게 몇 분간 짧은 그녀와의 통화가 끝나고 문득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이제 나 혼자 이 길을 걷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그녀가 없는 길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불현듯 스친 생각은 매우 강렬했고 돌연 내 발걸음을 다시 부르고스로 돌렸다. 그 길로 나는 다시 50km를 한달음에 걸어 부르고스로 돌아갔다. 밤늦게 부르고스에 도착했으며 버스 터미널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매표소가 문을 열자마자 독일 집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샀다.           


  티켓을 구입하고 나니 더욱 조바심이 났다. 당장에 떠나고 싶은데 몇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순간 내 눈 앞에 익숙한 배낭이 지나갔다. 붉은 기가 살짝 도는 흙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익숙한 비누향기도 나부꼈다. 노란색 재킷까지 영락없이 그녀였다. 머리로는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그 여자를 쫓고 있었다. 여자는 골목에서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낡은 서점 안으로 사라졌다. 주저 없이 나도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리 넓지 않은 낡은 책방에서 그녀의 환상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헛것을 본 것일까?'


  발길을 돌리는데 눅눅하고 쾌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시선의 끝에는 먼지가 폴폴 쌓인 낡은 사전 한 권이 있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그 책은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것처럼, 어서 자신을 봐달라고 불러들인 것처럼 그렇게 내 앞에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익숙하게 책을 들고 먼지를 털었다. 마치 안개와 같이 나부끼는 먼지 틈에서도 그새를 못 참고 그녀가 보였다. 희미한 그녀의 모습을 뒤따르는 나는 어느새 시계 토끼를 쫓는 엘리스가 되었다. 시계 토끼가 나를 불러들인 그 페이지에는 내가 믿지 않는 단어, 좋아하지 않는 단어가 보였다.           


- love : to like a lot,
to have strong feelings of liking someone or in family....,

                    (사랑하다 : 많이 좋아하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왜 그토록 그녀가 듣고 싶어 했던 단어를 단 한 번도 시원스럽게 말해주지 않았는가. 아낀다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그녀를 보내고 남은 건 한 움큼의 후회뿐이었다. 좀 더 많이 말해 줄 것을 후회해도 늦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감정이란 가슴에 차곡차곡 모은다고 담아 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커지고 커지다 보면 마음은 터지고 그 사이로 삐죽삐죽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감정이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감정들을 그대로 흘려보낸다 생각하면 간단한 것이었다. 내 감정에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것도 아니고, 번쩍번쩍한 금테를 두른 것도 아닌데 무슨 귀한 보물이나 되는 듯 꽁꽁 품고만 있었을까? 미안함과 아쉬움에 탄성이 터진다. 애초에 가슴이 가진 공간은 작고 작은 것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 사랑한 말하는 것은 마음이 가진 공간에 그토록 커다란 감정을 담을 수 없어서였다. 뱉고 뱉어도, 수없이 말하고 또 말해도 여전히 차고 넘치는 감정들을 단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가! 그렇게 터지는 감정을 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비록, 하나의 단어에 모두 주어 담을 수 없는 감정이지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 미련한 남자는 수없이 많던 기회를 보내고서야 깨닫는다. 그런 기회 또한 언제 닿을 수 있도록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마지막 통화 이후 란이는 한 번 더 전화를 해왔다. 그리고 내가 걷는 것을 멈추고 독일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매우 의아해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가슴으로만 품으려 했다. 하지만, 이 번만큼은 솔직하게 그녀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혼자 걷는 길에 의미가 없어 발걸음을 돌렸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내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장애는 내가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모험이었다. 모험을 즐기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모험을 피하는 성향도 아닌 나였다. 처음으로 무언가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넌 어떤 것을 간절히 빌어보거나 기도해 본 적 없어?”          


  언젠가 그녀는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고 며칠 이 지난 오늘 문득 그녀의 질문이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기고 카미노를 걷는다며 배낭에 1인용 텐트를 하나 구겨 넣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독일 남쪽으로 스위스 국경과 프랑스를 지나 스페인 서쪽의 산티아고까지 걸을 때였다. 텐트를 어떻게 치는지 사전 지식도 없이 길을 나섰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을 뻔한 고비를 맞았다. 원칙적으로 야영이 금지된 스위스 산에서 인적이 드문 곳에 텐트를 치고 머물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해질 무렵 겨우 찾은 곳에 대충 텐트를 치고 누웠는데, 꾸물거리던 하늘은 순식간에 강한 천둥을 동반한 폭우를 퍼붓기 시작했다. 제대로 고정시키지 못한 텐트는 들썩거렸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요동쳤다. 앞으로 뒤로 사정없이 내리 꽂히는 번개에 정신은 혼미해졌고 그제야 바보 같은 위치에 텐트를 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커다란 나무와 쇠로 만들어진 파이프 모양의 탑 사이에 자리를 잡은 텐트는 나무든 파이프든 둘 중에 하나라도 번개에 맞으면 곧 즉사할 운명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던 내가 실제 죽음이 임박하니 절로 기도가 나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배낭과 텐트를 사수하며 중얼중얼 살려달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그 지옥 같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태풍과 번개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마자 텐트와 배낭을 챙겨 그대로 산 아래의 마을로 도망쳤다. 그때처럼 생명에 위협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넘나드는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그때 처음으로 신이 있다면 부디 나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었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 것은 2년 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너는 꿈이 있어?”

“꿈은 실현 가능성이 너무 낮아. 실망감을 배울 뿐이지.”

“실현될 확률이 낮기 때문에 사람들은 꿈을 꾸는 거야. 그것이 현실이 되면 얻게 될 보람이 실현되지 않아 실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큰 기쁨이니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 때 사람들은 비웃었어.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나느냐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고 해서 비웃지 않잖아. 이제는 먼 미래에 진짜 그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사전에서 정의하는 사랑은 많이 좋아한다는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내 감정도 매우 단순하고 명확해졌다. 그녀를 좋아한다. 좋다는 말 한마디로는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아, 말하고 또 말해야 하는 마음이다. 좋아한다고, 너무나 좋아한다고, 수천 번 말하고 또 말해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내 감정은 더더욱 분명해졌다. 사랑이란 감정은 뭔가 비현실적이고 거대한 것이라고만 여겼던 내게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 일어났다. 이건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다. 꼭 봐야겠다. 보지 못하면 안 될 것 같고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죽어 버릴 것 같다. 이렇게 심장이 답답한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저릿한 것도 처음이다. 사랑은 좋아하는 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그녀를 다시 봐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을 맺을 순 없다. 그녀와 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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