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힐데 Mar 15. 2016

#5-1. 란, 뜻밖의 동행

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구, 비와 바람의 소나티네)

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5-1. 란, 뜻밖의 동행

 

  부스스한 머리를 한 그가 깜짝 놀라 황당함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깊은 그의 두 눈이 내 앞에까지 튀어나온 것을 보니 얼마나 그가 당황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단지 그가 말한 대로 했을 뿐이었는데.


  내가 얼마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부터 그의 얼굴을 내리쳐 깨운 것은 아니었다. 겨우 통성명을 하고 조금 오랜 시간 오고 간 대화가 전부인 그를 감히 칠 수가 없었다. 그의 침대 앞에서 나직이 그를 불렀다. 


“일어나. 벌써 8시가 넘었어. 일어나라고........” 


  그를 깨우기에 내 목소리는 너무도 소심했던 것 같다. 누에가 실을 토해내어 온몸을 감싸 제집을 만든 것처럼 그도 침낭과 한 몸이 되어 누에고치처럼 누워 미동도 없었다. 고치의 위쪽으로 겨우 몇 올의 머리카락만 내놓고 잠들어 있던 누에가 이리저리 뒤척이다 머리를 빼꼼히 들이밀었다. 그 순간 그가 해준 말이 떠올랐고 선생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초등학생처럼 망설임 없이 그의 얼굴을 치고 말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눈치 없는 사람도 무식한 사람 못지않게 용감했고 그 무식함이 결과적으로는 나를 구제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숙소에는 내가 아는 사람 몇몇과 나를 제외하고도 많은 순례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이안을 통해 들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40킬로 가까이 슈퍼도 없는 작은 마을이 한 둘 있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 조금 덜 걸었든, 많이 걸었든 이곳에서 쉬어가지 않으면 하루에 40km 이상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정보가 없었던 내가 어제 사람들을 피해 더 걸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찬 이슬을 맞으며 비박을 해야 했거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나가는 차를 세워 얻어 탔어야 했을 것이다. 하루 평균 최소 20km 이상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15km도 채 걷지 않고 이곳에 짐을 푼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신의 한 수였다. 신이 있다면 정말 내 발을 잡아끌어 세웠던 것이 분명하다.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질문인데,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데? 해봐.”

“너는 어제 거의 2주 만에 처음으로 숙소에서 잠을 잤다고 했잖아.

평소에는 그럼 어떻게 씻고 어떻게 빨래해?” 


  어떻게 이 길을 알게 되었는지, 얼마나 걸었으며, 나이는 몇이고 어디 사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여행이나 사회적인 문제들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우리는 쉼 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를 처음 보았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물론, 묻기 전에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 이십여 킬로씩 걷는 순례자들에게 샤워와 땀에 젖은 옷을 빠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더불어 내가 그를 노숙자로 오해했던 일에 대한 답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소 무례했지만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일단 걷기 시작하면 어차피 1시간도 안 돼서 땀에 흠뻑 젖을 거고 내일도 더럽고 냄새날 텐데, 뭐하러 힘들여 매일 빨래하고 샤워해.

상쾌한 기분은 입을 때 잠깐 뿐이고 1시간만 지나면 온종일 찝찝한 땀 냄새 속에 있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 걸. 아침에 입을 때만 잠깐 참으면 곧 익숙해져.” 


  나도 유난스럽게 깔끔한 성격이 아니고 그의 말이 게다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찝찝한 기분을 상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의 말에 설득의 힘이 담긴 것인지 마법이 담긴 것인지, 그 이후 신기하게도 그에게서 더는 불쾌한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란히 걷는 우리 사이에 간혹 바람이 지날 때는 신선한 나무 냄새와 근처 바다에서 넘어온 짠내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조차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사람의 미각과 후각은 빠르고 쉽게 익숙해지는데 이미 익숙한 것을 버리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일일이 신경 쓰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익숙한 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꾸역꾸역 살아온 내게 그는 자유로워 보였다. 타인의 시선도, 형식적인 습관에서도 자유로운 그는 이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성격이 부럽기도 했다.

  우려했던 것보다 그와 나의 걷는 속도는 잘 어울렸다. 대화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쉴 새 없이 떠들던 시간은 오랜만에 느껴본 행복이었다. 사람이 무섭고 그 사람의 생각이 두려워 쉽게 다가서지도 말을 하기도 힘들었는데, 오늘이 지나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지금의 상황은 내 생각과 입에 자유를 주었다. 평소라면 쉽게 떠들 수 없을 법한 가족사부터 사소한 고민까지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낯가림이 심하던 그도 다르지 않았다. 영어로 이렇게 오랜 시간 다양한 주제로 대화했던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가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릴 때도 그 단어를 대신 끄집어내는가 하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들었다. 내가 영어를 이렇게 잘했었나,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모국어로 이야기하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절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 노숙자가 하루 만에 십년지기 절친한 친구처럼 뜻이 맞았다. 


“날씨가 참 뜨겁고 건조하다.”

“그러게 기온은 여전히 8월에 머물러 있는 것 같네.”

“이럴 땐 장대비가 시원하게 한 번 지나가 주면 참 고마울 텐데.....”

“비?” 


  벌써 9월도 중반이 훌쩍 지났지만, 스페인에는 대낮에도 한 여름의 뙤약볕이 여전했다. 시원한 비는 그에게 바람이었지만, 내게는 그 어떤 단어보다 듣고 싶지 않은 한 마디였다. 여러 단어가 뒤섞여 있던 그의 말에서 유독 '비'라는 단어 하나에 과민하게 반응한 나 때문에 우리 사이에는 순간 어색한 틈이 생겼다.


“비는 싫어. 좀 덥더라도 지금이 더 좋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 


  내 의지와 상관없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원망에 더 가까운 불만 섞인 내 반응을 나는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반사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 익숙한 보호본능에 더 가까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니 비라는 단어만 들어도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버리고 싶은 짜증 나는 기억이 온종일 나를 괴롭히는 까닭이다. 처음에 그 기억은 아프다는 소리도 지르지 못할 만큼 아팠다. 그리곤 악몽이 되어 나를 짓누르며 어느새 10년을 따라다니는 버거운 상처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런 내가 얼마나 유치하고 멍청한지를 자책하고 있는 내게 그는 너무도 쉽게 왜냐고 물었다. 이미 타의에 의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대답을 하며 다시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벌써 알고나 있는 듯 그가 대신 말을 받았다.


“내가 2년 전에 스위스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를 거쳐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라까지 몇 달 동안 걸었다고 얘기했었지?”

“그런데, 뭐?”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뾰로통한 내 표정이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이어갔다. 

“그때 나는 채식주의였거든. 음, 완전히 100% 채식만 먹었어.

계란,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도 전혀 먹지 않았지. 그 길을 걸으면서 얼마나 많이 대도시를 지났겠어. 그런 와중에서도 산티아고까지 나는 두유와 빵, 견과류만으로 끼니를 해결했어. 원래도 마른 편이었는데,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쯤 되니까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고기나 생선을 요리하는 냄새만 맡아도 구토를 했었는데, 빵 조각이 닭 가슴살로 보이고 닭 냄새가 나는 거야. 참 신기하지. 여러 가지 뒤섞여 있는 견과류에선 미트볼 향기가 났어. 그래. 그것은 음식 냄새가 아니라 그리운 향기였어. 정신을 차려보니 닭다리며 스테이크며 온갖 육고기와 해산물을 꾸역꾸역 입에 넣고 있더라고.” 


    그가 할 이야기는 내 예상 밖이었고 불쾌했던 기분은 벌써 사라져있었 뜬금없이 고해성사 같은 자신의 식성 이야기를 왜 터놓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이 더 앞섰다. 


“그래서?”

“내 의식이 피하고 내 마음이 거부를 해도 내 몸이 필요한 것은 알아서 찾더라. 본능이 때로는 의식을 마비시키고 마음을 착각하게 해. 그것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것이어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였어.”

“부작용 같은 건가?”

“그랬던 것 같아. 한동안 절제하지 못하고 엄청난 양의 육식을 먹어 치웠어. 그리고 나니 다시 평화가 오더라. 지금은 아주 가끔씩 즐기는 정도야.”

“그래. 축하한다.” 


  당황스러워서 헛웃음이 났다. 기승전결도 없이 갑자기 관심 없는 자기 경험을 무용담처럼 쏟아내더니 자랑으로 마무리를 짓다니. 침착하게 생각해보아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적절한 예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단순해.

꽤 복잡한 것 같지만, 굉장히 단순한 알고리즘이야.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분명히 나와 줘야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야기하지. 사람들은 그것을 ‘병’이라고 하더라.

어떤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네 마음속에 담아두는 한, 너는 언제나 그 시간에 머물러 있게 될 거야.

그것을 끄집어내고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자리도 생기는 거야.

내가 미친놈처럼 고기를 먹었던 것도 ‘내 몸’이 원했던 거지. 엉뚱한 것만 자꾸 쑤셔 넣으니 고장이 난거지.

나는 여전히 채식만을 고집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왜 채식을 고집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더 이상 동기가 되지 못했고 기억에서도 잊힌 지 오래였어.

그때 나는 가끔은 뇌를 쉬게 하고 몸이나 마음이 내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어.”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내가 전혀 몰랐던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내 생각이 발가벗겨 맨몸을 드러난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그가 한 말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내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구는 아픈 상처나 기억 따위가 보물처럼 소중해서 가슴팍에 꽁꽁 숨겨두고 있었겠는가. 말을 함으로써 밖으로 끄집어낼 필요가 없었고 그 이야기를 듣게 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할지 두려웠다. 나를 한심하다 생각하겠지. 바보처럼 보겠지. 어쩌면 불쌍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어떤 것도 내가 원하는 모양은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를 채근하거나 보채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돕고 싶어 했다.


“우리는 오늘 처음으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어.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내가 너를 어떻게 볼 거라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떠들어 봐.

욕을 해도 좋아. 바람처럼 와서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고 내 머리를 헝클어트려도 그렇게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잖아.” 


  벌써 십 년도 더 지나 낡을 대로 낡은 이야기. 

  너덜너덜 볼품없이 다 떨어진 신발처럼 도대체 어디서 왜, 어쩌다가 내 기억이 이렇게 지저분해진 것인지는 잊은 것 같은데, 낡고 헤진 감정은 십 년이 지났어도 변함이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4. 파비안, 란의 첫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