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힐데 Mar 15. 2016

#5-2. 란, 뜻밖의 동행

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구, 비와 바람의 소나티네)

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5-2. 란, 뜻밖의 동행


  나보다 더 아픈 소년기를 보냈던 아이, 그래서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기에 너무도 부족했던 첫사랑. 그렇게 그를 보내고 허겁지겁 정착하고 싶어서 만났던 사람은 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다 피지도 않아도 앙다문 봉우리마저도 향기롭고 어여쁜 빨간 장미 같은 이십 대 초반이었다. 지독하게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이 어떤 향기를 갖고 있는지, 어떤 색을 띠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핑크빛 달콤한 향기만을 좇았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그놈이 내 앞에 악취를 풍기며 흉측한 몰골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읜 아이에게는 그리운 엄마의 모습으로, 미모의 여자와 달콤한 사랑을 꿈꾸는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천사 같은 아이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나의 바람은 코앞에 악마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게 악마에게 내 몸을 내어주고 마음을 내어주고 내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악마는 결코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괴물일 뿐이었다. 악마에게 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내 껍데기뿐이었다. 주인 잃은 껍데기는 그렇게 떠나지도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흔한 사랑의 시련일지도 모른다고 실낱같은 희망을 꼭 잡은 채 말이다.


  악마는 교활하여 떠나지도 않고 언제나 곁을 내줬다. 머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미련퉁이가 되어 그 주변을 맴돌았다. 처음에 악마는 내게 모든 것을 내어 줄 듯 헌신했지만, 당연한 수순처럼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바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다른 바보도 처음의 나처럼 악마가 자신을 지독하게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끔찍했다. 악마가 또 다른 바보에게 지금까지 들여온 공들은 나 역시 고스란히 받아왔던 것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 바보들은 정신을 차리고 악마를 처단하기로 마음먹고 계획을 세웠다. 악마와 두 바보가 한 자리에 모였지만, 끝끝내 악마는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억지로 구정물을 짜내듯이 눈물까지 흘리며 두 바보 모두를 사랑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악마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바보는 자신이 품은 작은 악마 때문에 차마 그를 떠나지 못했다. 그 뒤, 또 다른 바보와 악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다. 


  악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지상에서는 법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 신세였고 천상에서는 신에게서 도망 다니는 타락한 천사였다. 그를 떠나고 나서야 악마의 진짜 이름을 비롯한 실체를 알아냈다. 악마를 고발하기에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무서웠다.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루빨리 악마를, 그리고 무지했던 나를 잊어버리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악마를 사랑했던 것을 부정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과거의 내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내 과거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내가 해야 했던 것은 과거를, 내 사랑을 부정하고 연민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었는지에 집중했어야 했다. 악마에게서 벗어났던 마지막 그날 밤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곧 굵은 장대비가 되어 사납게 내리쳤다. 우산도 없이 빗속으로 뛰어드는 내게 악마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좋아하는 비가 내리네. 오늘처럼 비가 오면 그래도 가끔은 한 번씩 나를 생각해줘.” 


  악마의 그 마지막 바람은 내게 저주가 되어 비가 오면 저도 비 인냥 어김없이 함께 내렸다. 그 빗물에 흠뻑 젖어버린 내 옷은 십 년이 지나도 마를 생각을 못했다. 


“내 친구는 후천 면역 결핍증이라는 병에 걸렸어. 그렇게 난잡하게 살아오지 않았기에 몹시 힘들어했지. 하지만, 그녀가 그런 끔찍한 상처를 넘겨줄 것이라는 것을 그 친구가 알았다면, 선뜻 같은 선택을 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십여 킬로를 걸어왔고 앞으로 다음 숙소까지는 십여 킬로가 남았어. 이십여 킬로를 걸어오면서 네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거야. 나무도 듣고 나무 위의 새와 지나가는 바람도 들었을 거야. 그들에게 들려준 네 이야기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내 귀에 들어올 때는 너도 전혀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있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아무도 네 이야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생각처럼 내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다만, 신기하게도 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생각이나 시선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깨달았다. 많은 사건들은 이미 기억해서 사라졌거나 왜곡되어 있었고 오롯이 남은 것은 감정뿐이었다. 그것은 그때의 상처나 슬픔, 아픔 따위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벌써 8시부터 온종일 파비안과 10시간을 걸었다. 나는 1시간에 5,6킬로를 걸었던 2년 전과는 다르게 시간당 4킬로도 채 걷지 못했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원래 느긋하게 걸었다고 했다. 의도치 않게 우리 둘의 걷는 속도는 비슷했지만 그는 너무 자주 쉬었다. 집중력이 약한 초등학생이 40분마다 쉬는 시간을 갖는 것처럼 1시간마다 그는 쉬어야 했다.


  물 마시고 땀 식힌다고 한 번, 담배 한 대 태우며 물 마신다고 또 한 번, 딴 참 발에 환기를 시켜줘야 한다고 한 번, 배고프다고 한 번, 이유도 매번 달랐다.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땀에 젖는 옷가지를 빨아 널어야 겨우 마를 텐데, 조마조마하여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에 비해 그는 천하태평이었다. 어차피 그는 매일 빨래를 하지 않으니까.

  중간에 여러 번 쉬기는 했지만종일 12시간을 넘게 걸어 해가 떨어질 때쯤에 겨우 산티야나 델 마르(Santillana del Mar)에 도착했다산탄데르(Santander)에서부터 이 마을까지는 40km가 넘는다는 것을 숙소에 도착해서야 알았다마지막 2시간은 내내 파비안에게 화를 내듯 투덜거렸다모든 원인은 그가 너무 자주 쉬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내 계획대로 더 일찍 출발했다면 훨씬 이른 시간에 도착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안개가 자욱하여 운치 있고 고즈넉한 이 마을은 마을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의미 깊은 곳이었다. 그런 마을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할 것이 뻔했고 그것이 그렇게 화나 났다.


“아니야. 아니지. 우리가 자주 쉬었기 때문에 그나마 밝을 때 도착할 수 있었던 거야.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면 막판에 있던 그 산을 넘지 못하고 비박을 했어야 했을 게 분명하다고.” 


  듣기 싫을 내 투정에도 그는 배시시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보이는 모습과 많이 달랐다. 마음에는 항상 여유가 있었고 걱정이 없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걸 보면서 조바심을 내거나 걱정하기보다는 나무에 걸린 노을에 감동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지만, 오지랖 심한 노파처럼 어떤 참견이나 어쭙잖은 조언도 하지 않았다. 때때로 이런 모습은 나를 당혹스럽게까지 했다. 나보다 9살이나 어린 청년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숙소 입구의 동상과 내 사진을 찍어줄 만큼 여유로웠다. 마을에 도착했다는 기쁨보다 서둘러 빨래를 해서 널어야겠다는 생각에 분주하게 씻고 움직였다. 대충 빨래를 널고 나니 그제야 배가 고파왔다. 그때까지도 그는 숙소 한쪽으로 배낭을 던져놓고 여전히 꼬릿 꼬릿 한 모습으로 와인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간 지 오래였고 어느 정도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는 빨래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씻기는 할까.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허겁지겁 동네를 구경하고 먹을 것을 챙겨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에 어쩔 줄 모르던 나를 어르고 달래며 숙소까지 40킬로를 넘게 함께 해주었는데, 도착했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숙소의 문이 잠길 때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배낭도 보이지 않았고 그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5-1. 란, 뜻밖의 동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