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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 Dec 02. 2017

두 번째 날, 첫 번째 시술

칠월 십구일, 이천십칠 년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 매일 가속도가 붙는다.


언젠가 우연히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을 들었던 때가 아마도 스무 살쯤이었을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 매일 하루씩 가속도가 붙는다는 그 말이.

잊고 살았던 그 말이 서른이 넘어서 문득 생각났다. 틈틈이 동전을 모았던 커다란 박스를 깨고 보니 생각보다 쏠쏠한 돈이 모은 걸 보면서 어렴풋이 그 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서른 후반이 되었을 때, 하루가 한 시간처럼 일주일이 하루처럼 지난다고 느꼈다. 막 서른이 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삼십 대 후반이 되어 있었고, '아, 벌써 삼십 대 후반이라니..'했던 찰나, 순식간에 마흔이 되었다.


하루에 0.1kg씩 살이 찌면 일상에서 큰 변화를 못 느끼지만 쌓이고 쌓여 그게 5kg 가 되고 10kg가 되면 갑자기 인지하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아직 애도 낳아 보지 못했는데 난 그렇게 불혹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말이 내게 깊은 이해와 울림이 되는 말이 되었다. 더불어, 감히 상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나이 오십이 되고 환갑이 되면 그땐 1년이 하루처럼, 자고 일어나면 새해가 되는 것처럼 지금과는 또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시간이 빨리 흐르겠구나.. 하고 말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아 그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은 내 나이에 '보통' 사람들이 하고 사는 것들을 '아직' 시작도 해보지 못 한 내게 여유보다는 조바심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감성적으로 신체적으로 무척 예민한 걸 수도 있지만, 내게 마흔은 그냥 숫자에 불과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어떤 것이었다. 내 인생이 전반적으로 힘들고 평범하지 않았던 것처럼 결혼도 그랬다. 일찍 결혼한 것도 아닌데, 먼저 결혼한 친구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서야 나도 결혼을 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보기 힘든 케이스입니다. 세포 분열을 전혀 시작도 하지 않고 모든 난포가 죽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난자 채취하기 하루 전날 하늘이 무척이나 을씨년스럽고 우울했다.

채취가 끝나고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는 아랫배의 통증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거나 크게 웃거나 하면 배가 당기고 비틀리는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아프다고 말할 만큼 아픈 건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 너무 아프니 작은 통증도 커다랗게 다가왔다.



1박 2일을 꼬박 울기만 했다.

미친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울다가 잠들고, 일어나서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쑤셔 넣고는 또 울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나는 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첫 번째 시험관이 이식도 못하고 끝난 다음, 슬픔이 폭풍처럼 내렸고 그다음엔 두 번째 시험관에 대한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 슬픔과 두려움이 지나고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또 며칠을 아무것도 못했다. 그런 내 옆에서 남편은 마르지 않은 내 눈물을 연신 닦아주고 꼭 안아주며 함께 울었다. 긍정적이고 단순한 남편은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나와 싸워도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곧 웃고 내 앞에서 푼수에 가까운 애교를 남발하는 그런 맑은 사람이다.

함께 6년을 지냈고 5년을 살았지만, 골똘히 생각에 빠진 모습을 간혹 보긴 했어도, 나처럼 멍한 표정을 짓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도 내가 울었던 시간만큼 멍해 있었다.


연애할 때는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바보 같은 질문이라며 대답도 잘 안 해주던 그가 결혼하고선 하루에도 몇 번씩 지겹도록 사랑한다던 사람이었다. 울고 있는 나를 끌어안고 언제나처럼 그는 말했다.


"사랑해. 너무 많이 사랑해."


수 없이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았던 그 말이 오늘처럼 슬프게 들린 건 또 처음이었다.

초점 없이 허공을 향하던 그의 큰 눈이 나와 마주치면 이내 촉촉해지지만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가 너무 아팠다.

그렇게 꼬박 1박 2일을 서로를 부둥켜안고 내내 울었고, 울다 지쳐 잠들고 다시 일어나면, 꾸역꾸역 배를 채우고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던 어제가, 오늘이,

왜 지금 이 순간에만 이토록 더디게만 느껴지는지.. 달력의 날짜를 하루씩 지우며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래도 소풍은 기다리면 오는 날이잖아. 비가 와도 내년, 후년, 소풍은 다음이 있잖아.'

누가 내게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고 말해 준다면 이렇게 절망스럽진 않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나는 그랬다.

 

나는 결혼한 지 만 5년이 지난 마흔 살 여자다. 한국식 나이로는 마흔이지만 서양식으로 치면 아직은 그래도 서른아홉인, 어쨌든 이미 노산의 위험을 피할 수 없는 나이다.

남편은 나와 나이에 같은 앞자리 수인 날이 10년마다 한 번씩 약 1년 정도다. 어쩌다 보니 내가 남편보다 많이 연상이 되었다. 나이 때문에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남들한테 말을 안 하거나 그 시간을 줄여서 말하긴 했지만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해 온 시간은 이미 2년을 훌쩍 넘었다. 그래도 아이와 부모의 인연은 천륜이라는 생각에 아직 내 아이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만 생각했다.


벌써 재작년 겨울부터 부랴부랴 산부인과에서 난임 센터로 옮겨가는 준비를 해왔다. 내가 사는 이 곳에서는 준비할 서류도 많고 모든 일을 단계씩 진행하고 매번 예약하고 방문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서류에서 뭐가 하나 빠지면 다시 일주일, 이주일 기다려 예약하고 확인하고 준비하는 기간이 끝도 없이 길어진다. 1년 가까이 서류 준비하고 필요한 검사를 마치고 결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산부인과 의사가 자임으로 임신할 확률이 0에 가까우니 얼른 난임 센터 예약부터 잡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괜찮았다. 난임 센터에서 인공 수정도 의미 없다. 바로 시험관 시작하자 했을 때도 정말 괜찮았다. 시험관을 시작한다고 한 번에 덜컥 아이가 생길 거라는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어떤 약속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모두 괜찮았다. 그렇게 우리는 첫 번째 시험관을 시도하게 되었다.


주사 바늘에 공포가 있어서 어릴 때 불주사도 못 맞고 피해 다녔었지만, 매일 아침 시간 맞춰 맞는 배 주사는 정말 괜찮았다. 근육이 마비되는 것 같다는 조기 배란 억제 주사도 맞을 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아팠지만 난자 채취하는 것도 정말 괜찮았다. 난소가 늙고 몸이 늙어서 회복이 더딘 것 같았지만, 주사를 맞는 열흘 내내 한 개 밖에 보이지 않아 내내 맘고생했던 터라, 난포를 7개나 채취할 수 있어서 그저 다행이고 기뻤다. 게다가 그중 6개나 수정을 시켰다는 안내를 받아서 잠깐이지만 안도하기도 했다. 6개 중에 한 개 정도는 이식할 수 있겠지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튿날 전화 통화로 진행 상황을 듣는데 절망적인 소리를 들었다. 난포에 직접 주사를 찔러 넣어준 정자가 문제인지, 채취 후에 보기에는 좋았던 난자가 문제인지 6개의 난포가 전혀 세포분열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느리게 반응하기도 하니 하루 더 기다려보자는 말에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다시 소식을 들었을 땐, 역시나였다.

보통은 수정을 하고 세포 분열을 하다가 도태되거나 세포 분열이 느릿느릿 진행되는데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6개 모두 전혀 분열을 하지 않았다. 하다 못해 세포 분열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분열을 시작하기 전에 징조처럼 보이는 미세한 증상도 전혀 없었다. 첫 번째 시험관은 그렇게 이식도 못해보고 허무하게 끝이 났다.


우리가 힘들고 속상했던 것은 시험관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도 우리 같은 케이스를 정말 찾기도 힘들었다.


문제는 우리가 다음 시험관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문제냐에 따라 시험관도 의미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사도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이런 경우 거의 본 적 없다고......

이럴 땐 원인을 찾기도 힘들다고........


어제는 남편이 아무래도 90프로 이상 자기 잘못인 것 같다고 미안해하며 눈물을 보였다.  

시험관 진행할 때도, 임신 시도 시작하면서도, 한 번 속내를 비추지 않고 적극적이지도 않아서 남편은 별로 애를 원하지 않는 거 같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의외의 눈물이었다.

어제 한참 울더니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만 괜찮다면, 자긴 입양도 좋고

정자가 문제라면, 정자 기증이라도 받아서 아이 갖자고.

그 말 듣고 이번엔 내가 펑펑 울었다.


나는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야.
당신과 나를 반반씩 닮은 '우리'의 아이가 갖고 싶은 거야.


이렇게 말하고 눈물로 남편을 안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아이를 갖는 건 내게 의미가 없었다.


내 말 끝에 남편이 다시 힘없이 말했다.


그래도 반은 당신이잖아. 그러면 우리 아이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생각은 확고해졌다.


내가 울면 남편도 운다.

그래서 몰래 숨어서 운다.

한 삼십 번에 한 번쯤은 남편에게 내 우는 모습을 들키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에게 시험관은 이번이 첫 시도이지만 마지막 일수도 있다.

운이 좋아 두 번 세 번 '시도'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결과로 이어질지....,

남들에게 당연한 것이 우리는 시험관에서 조차 어려웠다.

이식까지는 의술이고 나머지는 신의 영역이라며 첫 번째 피검사를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일.

그런 당연한 과정도 내게는 멀고 먼 길이었다.


아무라도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우리처럼 세포 분열도 못했던 난포였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시도해서 아이 가졌다고.

그런 사람도 있다고.


드라마틱하게 힘든 2,30대를 지나 남편을 만나고

이제 조금 숨을 쉬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런 일이 또 생겼다.

흔하지 않은 나쁜 일이 내게는 로또처럼 꼬박꼬박 잘도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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