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어느 하루, 이천열여덟년
지난 12월 초 세 번째 시험관 시술이 끝나고 오늘까지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귓가엔 늘 초침 소리가 들렸고 매 순간 슬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떤 날은 시간도 멈춘 진공 상태에 갇혀 한 티끌, 한 티끌 먼지가 쌓이는 걸 지켜보며 사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내가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지..?' 싶게 반년이 지나 있었다. 앞으로 나는 더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 시간들도 결국은 이렇게 지나가 줄 거라는 사실이 차라리 위로가 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6개월의 시간.
그 사이에 우리에게는 다시 많은 일이 있었다.
부부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고 처음 남편에게서 유전적 돌연변이를 발견했을 때 이미 세상이 끝난 것처럼 절망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당연히 내게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 여겼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남편도 둘 다 그동안 우리의 실패가 남편의 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편의 문제가 처음부터 예상 가능했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추가로 유전적 문제를 발견했을 때도 절망적이었어도 희망이 있었다. 검사 결과를 듣던 날, 유전자 검사를 하는 전문가는 '혹시' 모르니 내 유전자도 검사해 볼 것을 권했고 큰 걱정 없이 바로 내 피검사까지 의뢰를 마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독일은 이미 깊은 겨울이었다.
독일에서 계절성 우울증은 낯선 것이 아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현지인들도 겨울이 되면 부쩍 우울감을 느낄 정도다. 독일의 겨울엔 일단 볕이 드물고, 비가 자주 내린다. 거의 매일 잠깐이라도 비가 내린다고 보면 된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며칠간 잿빛 하늘은 계속된다. 간혹 볕이 들더라도 한두 시간 지속되는 일이 드물다. 겨울은 10월이나 11월 즈음부터 비교적 일찍 시작하고 보통 이듬해 3월까지 길게 이어진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는 그런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말이 안 되는 지경이다.
우리에게는 그 계절이 시작되면서 시련이 시작된 셈이었다.
남편이 가지고 있던 유전 질환을 유발하는 돌연변이는 무척 절망적이었다. 이름 조차 생소한 유전 질환, 돌연변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던 용어들이 난무한 이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도 자료가 다 거기서 거기였다. 한국에서 뿐 아니라, 동양에서는 너무도 생소한 유전 질환이라 한국어로 된 정보는 너무도 기본적인 내용이 전부였다. 그나마 미국과 유럽에서는 해마다 태어나는 신생아 대략 3,000명 중 한 명의 발병률이 보고 되고 있다. 그 때문에 조금이라도 자세한 자료들은 대부분 영문과 독어로 된 자료였다. 평소에 영어, 독어 독해하며 읽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나도 눈에 핏대를 세워가며 몇 시간씩 찾아 읽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CF(cystic fibrosis: 낭포성 섬유증).
원래 사람의 신체에는 혈액 외에 점액이 생성되고 이 점액을 구성하는 성분 중에 있는 염분과 수분은 스스로 조절하며 흐르는 작용을 한다. 이 유전 질환은 점액이 염분과 수분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해 끈적해지고 끈적한 점액이 주로 폐나 여러 장기를 막아 염증이나 소화 장애와 같은 문제를 유발한다. 현재 치료 방법이 없는 불치병이라고 보고되고 있다. 이런 점액의 염분과 수분 조절을 돕는 알약이 있다고 보고 되는데, 하루에 수십 알을 복용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약값이 하루에 수십만 원, 한 달에 수억에 이를 정도로 무척 고가의 약이라고 한다. 끈적한 점액은 주로 폐에 혈류를 막거나 병원균의 이동을 막아 염증을 유발하거나 세균 감염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이런 점액 문제는 폐뿐만 아니라, 췌장이나 식도와 같은 여러 기관에 발생할 수 있다. 그때마다 크고 작은 수술을 끊임없이 받으며 생명을 연장해가는 질병으로 알려져 있다.
1,800가지의 CF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돌연변이가 존재하며, 문제는 PGD 검사로도 이 모두를 검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돌연변이를 포함 가장 대표되는 돌연변이만을 검사하여 대비할 수 있는 질환이다. 대략 30년 전에는 CF 환자의 생존율은 10살 내외였으나, 최근엔 환자의 절반 이상이 18세 이상 살고 보통 33세 정도까지 생존한다고 알려져 있다. CF는 거의 상염색체 유전을 통해서만 발병된다.
유전자 검사 결과 남편은 CF 보인자였다. 자신이 가진 22쌍의 상염색체 중에 CF 유전 질환을 유발하는 염색체가 하나라도 존재하는 경우 CF 보인자라고 한다. CF 보인자라고 해서 모두 CF 유전 질환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 부모에게 각각 CF 유전 인자를 물려받아 1쌍이 모두 CF 염색체를 가질 때 발병하게 된다. 다시 쉽게 말하면, CF 보인자의 경우 정상적인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CF 보인자의 아이가 같은 CF 보인자가 되기는 해도 CF 발병이 되지 않아 큰 문제로 여기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 난임이나 불임의 원인이 되기는 있지만 100% 불임이라는 보고는 없다. 즉, 부부 중에 한 사람이 CF보인자라 하더라도 아이를 가지는 것에 큰 어려움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문제는 부부 모두가 CF 보인자인 경우다. 부부 모두가 CF 보인자인 경우는 이 부부가 아이를 낳게 되면 확률적으로 네 명 중 한 명은 CF 유전 인자를 가진 염색체를 유전받아 태어나고 네 명 중 두 명은 부부와 같은 보인자, 그리고 네 명 중 한 명이 정상 아이로 태어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어디까지나 확률이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아이를 가질 때마다 CF병을 유전받은 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부부 모두가 보인자인 경우는 반드시 시험관 시술을 통해 아이를 가져야 하며 배아를 이식할 때도 미리 검사(PGD)해서 CF 질환이 없는 배아를 선별 이식해야 한다.
좀 무서운 유전병이지만, 아시아계를 포함, 아프리카나 인디언계의 인종에서는 드문 염색체 문제이기 때문에 남편도 나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세 번의 시험관을 진행하면서 처음에 3.01이었던 AMH(anti-Mullerian Hormone: 항뮬러관호르몬, 수치로 난소의 나이를 체크할 수 있음) 수치가 0점대로 떨어졌을 때도 우리는 많이 걱정하진 않았다. 이 모든 어려움이 의학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는 세 번의 시험관 동안 단 한 번도 세포분열을 하지 못한 우리의 수정란이었다. 세포 분열을 전혀 하지 못해 당연히 단 한 번도 이식하지 못했다. 임신은 고사하고 배아를 이식조차 못한 충격은 우리 부부에게 엄청난 트라우마였다.
시험관은 이식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애초에 난임센터까지 오게 된 부부들에게 임신은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최상급의 수정란을 이식해도 착상이 쉽지 않고 착상을 해도 유지가 어려운 사람도 많고 습관적으로 유산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이식까지는 현대 의학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착상은 신의 영역이란 말까지 있는 것이다. 착상만큼은 자궁이 좋고 상황이 좋다 해도 이유 없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의 영역이라는 착상은 고사하고 이식조차 못하고 세 번의 시험관이 끝나고 우리 부부가 우울증에 빠진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여겨졌다.
처음 세포 분열을 하지 못해 이식하지 못했을 때도 괜찮았다. 다음에는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두 번째 시험관에 급격히 저하된 난소가 약에 반응하지 않아서 채취도 못하고 끝났을 때도 괜찮았다. 다음에는 잘 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세 번째 시험관에서 역시 이식조차 못하고 끝났을 때는 정말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절망에 빠졌다.
한 번은 채취도 못했고 두 번은 이식도 못하고 끝난 세 번의 시험관은 우리 부부에게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트라우마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희망적으로 생각했다. 우리에게 늘 다음이 있었고, 그다음엔 우리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존재했다. 그 희망이 있었기에 우리는 기꺼이 트라우마의 무게를 감당하며 버틸 수 있었다. 어떻게든 버티며 하루하루 살던 우리에게 또 다른 유전자 검사 결과가 도착했다.
유전자 검사 센터에 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시험관을 진행하면서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험관만 하면 다 임신하는 줄 알았던 무지한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단계가 버겁게 흘러갔다. 이 보다 더한 결과가 없을 거라 애써 다독이며 일어서면 다음엔 더 큰 시련이 왔다. 세 번째 시험관이 끝났을 때도 그랬다. 이 보다 더 절망적일 수는 없다고.
그런 우리에게 찾아온 그다음 시련도 꽤나 극적이었다. 나 역시 남편과 같은 CF 보인자였던 것이다.
동양, 특히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보인자에 대한 연구도 별로 없다는 CF 유전 질환 상염색체 돌연변이.
아무리 쉽게 설명한다고 해도 이 유전 질환에 대한 설명은 이름 조차 어색했다. 한국말과 영어로 된 명칭조차 외우는데 몇 주가 걸렸다.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한 동안은 아무 생각도 못했다. 어쩐지 우리에게 '다음'이란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구심만 있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가진 선례를 찾아봤지만, 거의 없었다. 운 좋게 비슷한 상황을 가졌던 부부를 찾더라도 문제의 그 '다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부부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이를 가졌는지, 끝내 포기했는지......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잃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끝이 보이던 터널에서 다시 입구로 돌아왔는데, 돌아와 보니 입구도 막혀있었다.
이 답답함과 절망.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