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행동을 할 때에는 맥락을 파악하자.
P양 입장에서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을 거다. 그다지 싸우지도 않았고, 평소 남자 친구에게 잘해줬었고, 얼마 전에는 남자 친구의 상황이 나아지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연애전선에 먹구름이 끼다니! 이해할 수 없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당황하지 말고 전후 맥락을 따져보자. 별일 없다가 뜬금없이 미안하다니... "아... P양의 연애에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다."
남자 친구는 재수학원에서 만났어요. 1년 동안 서로 응원하여 열심히 수험생활을 한 끝에 저는 원하던 Y 모 대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남자 친구는 1년 더 재수생활을 하게 되었죠. 그러다 이번에 남자 친구도 저와 같은 Y 모 대학의 다른과에 입학을 했죠. 남자 친구의 과가 과제가 많은 과히 기도 하고 새내기 생활을 하다 보니 바빠서 데이트를 많이 하지는 못했었는데 얼마 전 남자 친구가 제가 너무 잘해줘서 갚을게 너무 많고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하더라고요. 또 저에게 잘못한 것도 많고 본인 같은 놈이 뭐가 좋냐고 그러더라고요.
힘든 수험생활도 끝났고, 같은 학교에 진학도 했는데 뜬금없이 미안하고 잘해줘서 부담스럽다니? P양이 남자 친구의 모순된 말에 집중에 집중을 하며 답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요즘 아이돌 노래의 가삿말을 해석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다. P양이 남자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건 P양의 이해력이 딸리는 게 아니라, 남자 친구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이런저런 허울 좋은 말들을 갖다 붙이다 보니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에는 "그게 무슨 말이야!?"라며 해석을 요구하지 말자. 그래 봐야 상대는 "내가 나쁜 놈이야..."따위의 착한 남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요즘 내가 일이 너무 힘들어서..."따위의 밑도 끝도 없는 동정심 유발 발언들을 하며 당신의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뿐이다.
오컴의 면도날 법칙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뭐가 답인지 알 수가 없을 때에는 가장 간단한 가설이 답이라는 것이다. 물론 오컴의 면도날 법칙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연애를 하며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에는 쓸데없는 여러 가지의 변수와 가설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을 때에는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할 때에는 상대의 말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상대방의 행동에 초점을 두고 맥락을 파악해보자. 그러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속 시원한 답이 나온다. 그렇다면 오컴의 면도날 법칙에 입각해서 P양의 케이스를 살펴보자.
P양의 남자 친구는 삼수 끝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을 했고, 재미나게 새내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미안하다는 둥 부담스럽다는 둥 이야기를 한다? 그건 P양이 어떠한 잘못을 했거나 남자 친구의 어떤 복잡한 심리 트러블이 작용을 했다기보다 새내기 생활에 잔뜩 취한 남자 친구가 P양과의 관계에서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은 연락 안 한 지 열흘 정도 되었어요. 기분은 계속 울적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할 일 하거나 친구 만나서 기분 나아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연락 안 하기로 한 시점부터 편하게 입고 다니던 옷도 항상 치마나 원피스에 힐 신고 다녀요.(언제 마주칠지 모르니까요.) 바람피울 친구도 아니고... 계속 신경쓰기오 힘이 드네요. 뭐가 어디서부터 왜 잘못된 걸까요...?
사연만 봐서는 P양의 잘못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나만 잘한다고 다 잘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람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게 있다. 남자 친구 입장에서는 P양과의 연애도 2년이 넘어가고 게다가 새내기 생활까지 하니 P양과의 연애가 이전보다 훨씬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거다.
같이 재수생활을 했고 더욱이 삼수 생활 뒷바라지까지 했건만 새내기 생활에 홀려서 권태기가 온 남자 친구에게 배신감이 들고 원망스럽겠지만 너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말자. P양도 새내기 생활해봐서 알겠지만 동기들과 잔디밭에서 소주에 새우깡만 먹어도 행복하고 즐거울 때가 아닌가?
지금 당장은 2년간의 수험생활에서 해방된 해방감과 새내기 특유의 분위기와 문화에 흠뻑 취할 시기지 않은가? 아마 다른 여자들도 조금 보이기도 하고, 2년 된 여자 친구와의 연애보다는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더 재미있고 즐거울 시기다. 하지만 이런 시기가 가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길어야 2~3개월이다.
P양의 대응은 매우 좋다. 지금은 P양이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해봐야 오히려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차라리 남자 친구의 들뜬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신경을 끄고 P양의 생활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어차피 삼수생...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아웃사이더로 밀려날 확률이 크고 기말고사를 앞두고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자연히 정신을 차리고 보면 P 양만 한 여자가 없다는 생각을 할 거다.
그때부터 괴롭혀라. 만나 달라고 해도 퇴짜 놓고, 대놓고 선배 오빠들과 밥을 먹고, 과제 때문에 바쁘다고 만남을 미루자. 그렇게 혼쭐을 내줘야. 자신이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 반성을 할 것이고, P양의 고마움을 느끼고 P양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 통쾌할 그날을 위해 일단 그 날까지는 속 좀 쓰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