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상대의 마음이 어떨까?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할까?"가 아니라 "지금 상대의 마음이 어떨까?"이다. 당신이 얼마나 당신의 마음을 잘 전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해줄 준비가 되었는지가 중요한 거다.
이미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남자 친구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6개월 정도 만나다가 진로문제로 트러블을 겪다가 결국 헤어졌어요. 정말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힘들어했었네요. 그런데 한 달쯤 지나고 나서 전 남자 친구의 카톡에 커플사진이 올라왔네요. 저는 처음에 깜짝 놀라서 배신감도 들었는데 지인이 말하길 저랑 헤어지고 2주쯤 되었을 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친구의 친구를 만나게 되어 사귀었다고 저를 만날 때와는 연관이 없다고 설명을 해주더라고요.
워낙 저에게 잘해줬던 친구라 후회도 되고 배신감도 들도 복잡하네요. 그래도 정말 진심으로 좋아했었다고 잘 지내라고 연락을 하고 싶은데.. 해도 괜찮을까요?
- H양
물론 연락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연락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느냐는 좀 따져봤으면 좋겠다. 만약에 H양이 지금까지의 연애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담담하게 H양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은 목적이라면야 장문의 카톡보다는 손편지로 담담히 써서 전해주면 되겠지만 혹시나 이미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H양의 진심을 전해서 마음을 움직여볼 생각이라면 그건 다시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
단순히 "이미 임자 있는 남자에게 그러면 안되는 거야!" 따위의 도덕교과서 같은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H양이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써서 남자 친구가 마음이 돌아온다면야 백통이고 더 써야겠지만 과연 그 편지가 소용이 있을까?라는 거다. 진심이라는 건 어떻게 전달하느냐보다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남자 친구는 H양의 편지를 받고 감동하고 돌아올만한 상황인가?
하루키의 잡문집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이따금 젊은 독자에게 긴 편지를 받는다. 그들 대부분은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 차도 크고, 지금껏 축적한 경험도 전혀 다를 텐데"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러니 당연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혹여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당신 안에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잡문집 中, 무라카미 하루키
헤어진 상대방에 대한 터져 나오는 격한 H양의 감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내가 H양의 감정을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남자 친구도 H양의 감정을 머리로만 이해할 확률이 높다.
꼭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면 괜히 진심을 전하겠다면 과하게 감정을 담지는 말자. 적당히 정리하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적어 남자 친구에게 전하도록 하자. 굳이 H양이 편지에 감정을 과하게 담지 않아도 남자 친구가 H양에게 마음이 많이 남았다면 격하게 반응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담담히 읽어 내려가며 H양에게도 좋은 사람이 나타나길 기도해 줄 것이니 말이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남자 친구는 한숨만 쉬네요...
3개월 정도까지 정말 꿀 떨어지는 커플이었는데 지난 2~3개월은 정말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싸웠네요. 저는 남자 친구가 조금만 더 노력해줬으면 좋겠어서 그랬던 건데... 생각해보면 "네가 날 더 사랑한다고 했으니 네가 더 노력해!"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100을 받다가 50을 받으니 성에 잘 차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요. 결국 남자 친구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지만 간신히 매달려서 잡았네요...
저에게 감정이 식었냐고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겠고... 제가 너무 짜증내고 화내면서 대화하는 게 싫다고 말을 하길래 말투도 고치고 좋게 얘기를 풀어가려고 하는데... 이제는 제가 얘기만 꺼내면 그 친구가 한숨을 쉬고 때론 짜증을 내기도 하네요... 저는 대화가 하고 싶은 건데 말이죠...
- K양
K양 입장에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예전에는 다짜고짜 버럭! 화 먼저 냈었는데! 이제는 그래도 좋게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남자 친구는 들은 체도 안 하는 건 물론이고 때론 한숨에 짜증을 내니... K양의 기분이 어떨까?
마냥 답답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그래서, 좋게 말해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고 말이다. 그래, K양의 말처럼 예전에는 "이제 마음이 변했어!? 요즘 행동이 왜 그래 정말!?"하고 짜증을 내고 시비를 걸었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대화로 풀려고 노력을 하긴 한다. 근데 결국 무슨 대화? "혹시... 요즘 마음이 좀 식은 것 같아...?" 이런 걸 두고 조삼모사라고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고 좋게 말을 하려는 시도는 좋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너 변한 거 맞지?" 혹은 "언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거야?"라고 묻고 있는 건 똑같다는 거다. 일단은 대화를 빙자한 압박으로 남자 친구가 K양의 마음에 들도록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남자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대화의 포인트를 조금만 바꾸자 "요즘 마음 식었지? 왜 식었어?"가 아니라 "우리 기분전환할 겸 여행이라도 갈까!? 내가 쏜다!"가 어떨까? 남자 친구 입장에서는 업무에 절어 침대에 누워있는데 "근데 우리 관계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장문의 카톡을 받는 것보다는 제주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 참 많이도 싸웠다, 그렇지?"라고 말을 듣는 편이 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