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이야기 - 아들이 쓰는 글
독일 학교에 처음 앉아있던 날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먼저 독일로 가시고, 어머니는 이사준비로 바쁘던 한 달간,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에 독일어 문법책을 보며 독일어를 읽는 법을 공부했었다. 그렇다고 독일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띄엄띄엄 소리 내서 읽을 수 있기만 하였는데,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하여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더욱이 낯설기만 한 선생님과 친구들의 마음을 읽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 중 한 명이 아버지 이전에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셨던 목사님의 따님이었고, 그 누나의 오빠, 내게는 형인 그 역시도 2년 전에 뛰어난 성적으로 그 학교를 졸업해서 의대를 다니고 있었다. 또 당시 학교에 다니던 대부분의 한인학생들이 각 학년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학교도 선생님도 내심 이런 전처를 기억하며 누나와 나를 받아주었던 것 같다.
독일로 가게 되어 우리를 걱정하던 어머니께 잘할 수 있다고 잘 해낼 것이라고 우리도 그이들처럼 학교에서 1등도 하고 천재학교도 가고 부모님의 자랑이 되겠다고 소리쳤던 누나와 나였는데 외국에 간다고 갑자기 공부를 잘하는 게 말이 되는가, 첫날부터 입도 마음도 꽝꽝 얼어붙어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잘 적응하고 성적도 쑥쑥 올라가서 결국에는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는 간증이 나오면 좋겠지만, 이는 우리 남매에게 언감생심이었고, 결국 둘 다 그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어떤 자랑거리도 이슈도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입이 얼어붙어 지내는 날들이 지속되었고, 학교는 내게 그 어떤 추억의 장소도 사교의 장도 되지 못하였다. 시간을 내버려야 하는 장소만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교회라고 괜찮았을까? 독일어를 잘 못해서일까, 공부를 잘 못해서일까, 아니면 수줍어서일까, 비슷한 또래 교포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공이라도 같이 차서 그나마 괜찮았는데, 누나는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한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인연을 3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는 장한 누나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눈을 돌릴만한 사람은 유학생 형 누나들이었고, 나는 쉽게 10살 20살 많은 형 누나들에게 정을 주곤 하였다. 안타까운 점은 이분들은 항상 계신 분들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학업이 끝나면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처음에는 만남과 이별이 각별하였지만 점차 그 감격도 아픔도 무뎌졌고 종국에는 그 관계의 무게는 종잇장만큼 가벼워졌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대부분이었다.
군대를 가고, 대학원을 가며, 목회를 하면서도, 내 상황에 따라 다가왔다 사라지는 가벼운 인연들을 보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지금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관계를 대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람을 만나는 게 버거워서 결코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그래봤자 시간이 지나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옅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예수의 사랑은 이렇지 않을 텐데. 끊임없이 퍼주는 사랑을 담을 만큼 내 마음의 그릇은 단단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