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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Oct 05. 2021

내 자식 입에 밥이 들어가도 나는 배고프다

엄마의 자격


엄마가 된 지 만 4년이 되었다. 일단 엄마 1년 차 때가 제일 혼란스럽고, 우울했고, 비참했고, 화났고, 또 우울했고, 등등..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확인한 시기였다. 2년 차 때는 회사에 복귀하여 정신없이 지냈고, 3년 차 때는 이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와중에 둘째 아이를 임신하여 겨우 어찌어찌 회사를 다녔다. 그러다가 대망의 4년 차 때는 둘째 아이 출산과 동시에 5살 첫째 아이의 유아 사춘기를 맞게 되었다. 몸과 생각이 갑자기 크게 자라면서 동생까지 생겼으니 본인도 오죽 당황스럽겠냐만은 왜 나까지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너무 힘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반 이상 미친 여자가 매일 우리 집에 나타났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계속해서 화를 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저 아이에게 물건을 던질 수 없으니 그 물건으로 내 손등을 찍기도 했다. 설거지하다가 칼을 보면 '저 칼로 내가 찔려 죽어야 이 상황이 끝날까'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이러다가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남편에게 말했다.


나 매일 밖에 나갈 거야.

모두가 그렇지만 나는 일반적인 평균 이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그런 나를 잘 알고 있다. 언젠가 내가 '왜 나는 이렇게 엄마 역할이 힘들까'라고 남편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 주위에는 다들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유독 힘들어하는 편이다. 남편은 내가 삶에 있어 나만의 영역이 큰 사람이고, 그 영역이 조금이라도 침해받거나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 으르렁 거리는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그 대상이 자식이어도 똑같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 있어서 남편은 항상 적극적이다. 으르렁거리는 아내를 보는 것도 무척 괴로울 테니까.


그렇게 거의 매일 혼자 두어 시간씩 밖에 나간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기도 하고, 책방에 가서 책 구경도 한다. 카페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도 심심하니 참 좋다. 그렇게 콧바람을 좀 쐬고 오면 내 마음도 환기가 되어 아이들을 보는 게 (잠시동안은) 훨씬 가벼워진다. 이렇게 엄마가 아니라 내가 되어 혼자 나가 있으면 여러모로 좋긴 한데, 항상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 있다.


난 역시 엄마 자격이 없는 걸까.


흔히들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시어머니께서 손주 먹이라고 좋은 소고기를 챙겨주셨는데 나도 너무 먹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고기를 구워 아이에게 먹여주면서 거의 반은 내가 먹었다. 한 번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카페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휘낭시에를 주문했는데 나오자마자 아들이 홀라당 빠르게 다 먹어버린 것이다. 그 순간 화가 불끈 났다. 곧바로 하나 더 주문해서 내가 다 먹어버렸다. 이 뿐만 아니다. 치킨을 먹을 때 닭다리는 내가 다 먹고 싶다. (아, 이것은 엄마의 식탐에 대한 이야기인가)


워킹맘으로서 가뜩이나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그런데 이 황금 같은 육아휴직 기간에도 아이와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꼬박꼬박 챙기고 있는 나 스스로가 이기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게 엄마 자격이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 어쩌자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서 이러고 있나.


아이들에게 나는 한 인간이 아니라 '엄마'이다.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그 엄마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울 때가 있다. 자주 두렵다. 이렇게 유치하게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엄마가 두 명의 존재에게 어떤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무섭다. 나는 엄마이지만 내 아이들 말고 내 친구들과 너무너무 신나게 놀고 싶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내 마음대로 많이 먹고 싶고, 슬플 때는 엉엉 아이처럼 울고 싶다.


아이 앞에서 슬픈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낸 적이 있다. 아마도 시부모님인가 남편인가 때문에 너무 갑갑한 사건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다가 그 생각에 너무나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나를 보더니 아들이 "엄마, 왜 울어, 내가 있잖아."라며 소매로 내 눈물을 한참 닦아주었다. 그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자 혼자서 매우 작은 (그러나 다 들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어떡하면 좋을까?... (검지 손가락을 펼쳐들며) 아!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바로 하트!"라고 키키묘묘 구조대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다시 돌아누워 "엄마, 사랑해."라고 했다. 그리고는 "엄마, 그만 울어. 내가 엄마 보고 있을게. 잘 자. 재밌는 꿈 꿔어. 우리 내일 더 재밌게 놀자아. 오늘 수고 많아졌어.(이때까지만 해도 말이 서툴었음)"라며 내 눈썹을 쓰다듬어 주었다.


눈썹을 쓰다듬어 주는 건 내가 아이를 위로하고 재울 때 하는 행동이다. 내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고, 아이가 어른처럼 나를 위로했다. 우는 와중에도 '이거 내가 애한테 잘못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웠다. 아마 육아서에서는 잘못된 사례로 소개될만하다. 육아서들은 말한다. 항상 부모 스스로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임을 명심하고, 부정적인 감정(분노, 슬픔 등)을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에 따르자면 감정과 욕망을 잘 참는 사람이 성숙한 어른이고, 그 어른의 최고봉에는 엄마 역할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화도 잘 참지 못한다. 지난 연휴의 가정보육 끝에 폭발해버렸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아들을 보며 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것이다. 5살 인간에게 집을 나가라며 소리쳤다. 나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몇 번을 사과했지만 나는 그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5살이나 38살이나 다를 바 없는 장면이었다. 어른이 없고 아이 둘이 다투고 있는 장면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다음날 아침, "엄마, 자고 일어나니 화가 풀렸어?"라고 묻는 아들에게 나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화가 좀 줄어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아줄 만큼 화가 풀리진 않았다. 아직도 나 스스로 더 확인해야 할 미성숙한 인간성의 밑바닥이 남아있나 보다.


큰 화를 잠재우고 배고픔도 절로 잊히게 하는 모성이 나에게는 없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은 이런 나를 어떤 엄마로 평가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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