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배 아들, 소인배 엄마
놀기 좋은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곧 추워질테니 부지런히 놀아야 한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면 사실 놀이터에서 함께 놀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 아늑한 가을 햇살 속에서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전속력을 다해 논다.
어린이집 하원 후 늦은 오후의 놀이터에 아이들이 쏟아진다.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로 붐빈다. 그 질서 속에서 우리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놀고 있을지 워킹맘은 항상 궁금하다. 금번 육아휴직은 둘째 아이 출산으로 얻게 된 시간이지만 첫째 아이의 성장을 목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5살 아들은 이제 내가 곁에 없어도 놀이터의 낯선 아이들과 잘 어울려 논다. 넘어질까봐 잡아줘야 하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서 나랑만 놀려고 했던 그 어린아이가 언제 이렇게 큰 걸까. 멀찍이 떨어져 보니 팔다리가 어제보다 더 길어진 것 같다.
놀이터 순회를 마치고 마지막이라고 약속한 곳에 도착했다. 미끄럼틀에서 형아 둘을 만났다. 우리 아들이 미끄럼틀 위에서 작은 돌멩이들을 굴리고, 그 형아 둘은 미끄럼틀 아래에서 폴짝 뛰면서 그 돌멩이를 피하는 놀이를 시작했다. 우리 아들은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도 놀이의 규칙을 주도해가며 잘 노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형아 둘은 동생이 주도하는 놀이에 자존심이 상한 건지 몇 번 놀다가 우리 아들에게 소리쳤다.
"넌 OUT이야. 집에 가!"
'OUT'의 뜻은 모르지만 집에 가라는 말에 우리 아들은 싫다고 했다. 두어 번 저항하며 그 자리에서 버텼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순간 화가 차올랐다.
"이 놀이를 처음 만든 건 이 아이잖아. 너 아까 얘한테 나이를 묻더니 동생이면 이렇게 쫓아내려고 했던 거니? 놀이의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닌데 왜 얘한테 집에 가라고 소리치는 거니? OUT은 무슨 OUT이야?! 영어유치원 다닌다고 영어 쓰는 거냐?(영어유치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음) 우리는 집에 안갈거야! 너희가 OUT이야!"
라고 내 마음속으로 그 형아 아이들에게 따졌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엄마 어른인 나는 아무말 없이 시선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내 울화통과는 별개로 저 셋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돌아서서 걷는 내 등 뒤에 우리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일그러진 얼굴의 아이가 나에게 걸어오고 있다. 두 팔 벌려 안아주니 내 품에서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엉엉 울기만 했다. "네가 만든 그 놀이가 너무 재미있어서 형들이 좀 빌려 쓰고 싶은가 봐. 얼마나 재미있게 만들었는지 엄마가 다 봤어."라고 아이를 토닥토닥 위로해줬다.
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터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작게 앉아 아이의 입과 내 귀의 높이를 맞춘다. "형아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선물하고 싶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한번 더 물었더니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묻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일단 접어두고 내 가방에 있던 마이쮸 두 알을 꺼내 아이 손에 쥐어줬다. 아이는 아까 그 형아들에게 뛰어가더니 마이쮸 한 알씩을 주고 돌아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 형아들 밉지 않아?"
"미워. 나보고 집에 가라고 소리쳤잖아."
"근데 왜 간식 선물을 해줬어?"
(도대체 왜애?? 뭐가 좋다고? 선물을 왜 주는데??)
재미있게 잘 놀았잖아.
... 응? 뭐 이런 대인배가 다 있나.. 비록 끝은 서운했지만 같이 놀았던 시간은 즐거웠으니 함께 한 형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 그 형아들에게 실컷 따지고 들었던 이 엄마는 뭐가 되니. 5살 아들 앞에서 나의 찰랑거리는 아량을 확인하고 이내 부끄러워졌다.
누군가에게 섭섭한 감정이 생기면 그와의 모든 시간을 다 싸잡아 그 감정 안에 몰아넣었다. 특히, 지난 연애의 끝에서도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나의 성장에 영향을 준 긍정적인 경험들, 애정 어린 따뜻한 시간, 그리고 즐거워했던 나의 그 시절 모습까지, 모두 연애의 끝에서 증발해버렸다.
아이는 비록 서운함에 눈물을 보이며 자리를 떠났지만, 그 자리에서의 즐거웠던 기억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그 즐거운 기억을 지킬 것이냐,
서운함과 함께 증발시킬 것이냐.
이 선택 앞에서 아이가 보여준 현명한 태도에 소인배 엄마가 작아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작아졌다. 작아진 내 손을 아이가 꼭 잡아 나를 겨우 집으로 데려와주었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