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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Oct 14. 2021

즐거운 기억을 지키는 방법

대인배 아들, 소인배 엄마


놀기 좋은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곧 추워질테니 부지런히 놀아야 한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면 사실 놀이터에서 함께 놀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 아늑한 가을 햇살 속에서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전속력을 다해 논다.


어린이집 하원  늦은 오후의 놀이터에 아이들이 쏟아진다.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로 붐빈다.  질서 속에서 우리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놀고 있을지 워킹맘은 항상 궁금하다. 금번 육아휴직은 둘째 아이 출산으로 얻게  시간이지만 첫째 아이의 성장을 목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느새 훌쩍  버린 5 아들은 이제 내가 곁에 없어도 놀이터의 낯선 아이들과  어울려 논다. 넘어질까봐 잡아줘야 하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서 나랑만 놀려고 했던  어린아이가 언제 이렇게  걸까. 멀찍이 떨어져 보니 팔다리가 어제보다  길어진  같다.


놀이터 순회를 마치고 마지막이라고 약속한 곳에 도착했다. 미끄럼틀에서 형아 둘을 만났다. 우리 아들이 미끄럼틀 위에서 작은 돌멩이들을 굴리고, 그 형아 둘은 미끄럼틀 아래에서 폴짝 뛰면서 그 돌멩이를 피하는 놀이를 시작했다. 우리 아들은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도 놀이의 규칙을 주도해가며 잘 노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형아 둘은 동생이 주도하는 놀이에 자존심이 상한 건지 몇 번 놀다가 우리 아들에게 소리쳤다.


"넌 OUT이야. 집에 가!"


'OUT'의 뜻은 모르지만 집에 가라는 말에 우리 아들은 싫다고 했다. 두어 번 저항하며 그 자리에서 버텼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순간 화가 차올랐다.


"이 놀이를 처음 만든 건 이 아이잖아. 너 아까 얘한테 나이를 묻더니 동생이면 이렇게 쫓아내려고 했던 거니? 놀이의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닌데 왜 얘한테 집에 가라고 소리치는 거니? OUT은 무슨 OUT이야?! 영어유치원 다닌다고 영어 쓰는 거냐?(영어유치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음) 우리는 집에 안갈거야! 너희가 OUT이야!"


라고 내 마음속으로 그 형아 아이들에게 따졌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엄마 어른인 나는 아무말 없이 시선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내 울화통과는 별개로 저 셋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돌아서서 걷는 내 등 뒤에 우리 아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일그러진 얼굴의 아이가 나에게 걸어오고 있다. 두 팔 벌려 안아주니 내 품에서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엉엉 울기만 했다. "네가 만든 그 놀이가 너무 재미있어서 형들이 좀 빌려 쓰고 싶은가 봐. 얼마나 재미있게 만들었는지 엄마가 다 봤어."라고 아이를 토닥토닥 위로해줬다.


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터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작게 앉아 아이의 입과 내 귀의 높이를 맞춘다. "형아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선물하고 싶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한번 더 물었더니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묻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일단 접어두고 내 가방에 있던 마이쮸 두 알을 꺼내 아이 손에 쥐어줬다. 아이는 아까 그 형아들에게 뛰어가더니 마이쮸 한 알씩을 주고 돌아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그 형아들 밉지 않아?"

"미워. 나보고 집에 가라고 소리쳤잖아."

"근데 왜 간식 선물을 해줬어?"

 (도대체 왜애?? 뭐가 좋다고? 선물을 왜 주는데??)


재미있게 잘 놀았잖아.


... 응? 뭐 이런 대인배가 다 있나.. 비록 끝은 서운했지만 같이 놀았던 시간은 즐거웠으니 함께 한 형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 그 형아들에게 실컷 따지고 들었던 이 엄마는 뭐가 되니. 5살 아들 앞에서 나의 찰랑거리는 아량을 확인하고 이내 부끄러워졌다.


누군가에게 섭섭한 감정이 생기면 그와의 모든 시간을 다 싸잡아 그 감정 안에 몰아넣었다. 특히, 지난 연애의 끝에서도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나의 성장에 영향을 준 긍정적인 경험들, 애정 어린 따뜻한 시간, 그리고 즐거워했던 나의 그 시절 모습까지, 모두 연애의 끝에서 증발해버렸다.


아이는 비록 서운함에 눈물을 보이며 자리를 떠났지만, 그 자리에서의 즐거웠던 기억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그 즐거운 기억을 지킬 것이냐,

서운함과 함께 증발시킬 것이냐.


이 선택 앞에서 아이가 보여준 현명한 태도에 소인배 엄마가 작아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작아졌다. 작아진 내 손을 아이가 꼭 잡아 나를 겨우 집으로 데려와주었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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