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 Aug 24. 2021

일산에 대하여

여기, 나의 계절

처음 여기 이사오던 날. 집 가까이 카페가 있다고 무척 좋아했다. 지금 이 카페는 온통 크리스마스 소품으로 가득하다. 봄이 오면 어떤 모습일까. 난, 어떤 모습일까.


12년 전 이 일기를 썼던 그날의 공기는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참 춥고 외로운 겨울이었다. 일산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코 끝 서늘한 그 겨울 공기와 비슷하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내가 그곳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취를 시작한 곳이 '일산'이다. 일산에 위치한 한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인데 어쩌다 보니 일산 남자와 결혼하여 지금까지 일산에 살고 있다. 그렇게 일산에서 산지 10년이 넘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낯선 일산에 살면서 이제는 익숙한 풍경들도 생겼다. 나에게 계절을 알게 하고 기억을 추억하게 하는 일산의 여러 장면들이 있다.


나의 봄은 자유로 벚꽃이 만개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겨울이 지나 햇살이 따뜻해질 무렵부터 나는 자유로를 오갈 때마다 그 벚꽃이 언제쯤 피려나 항상 살핀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하루에 벚꽃이 만개하고 나서야 '아, 봄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것이다. 이후 떨어진 분홍 벚꽃잎들이 마치 빗방울처럼 자유로를 굴러다니는 기간이 있는데, 이건 내가 일산에 살면서 가장 놓치기 싫은 황홀한 장면 중 하나이다.


일산의 싱그러운 여름은 단연 호수공원 속에 있다. 일산 호수공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메타세쿼이아 길이다. 오후 3시쯤 비스듬한 햇빛 속에서 높은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중학생 시절의 체육시간이 생각난다. 우리의 그림자도 초여름의 나무를 닮았던 그때. 절로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여름이다.


나는 킨텍스 1 전시장 대로변 한 단풍나무에서부터 가을을 발견한다. 그 나무는 유독 단풍이 더 새빨갛게 물든다. 업무 특성상 가을의 초입에 일 년의 프로젝트가 끝나는데 정신없이 지낸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문턱에서 묘한 안도감을 주는 푸근한 풍경이다. 그렇게 선선한 바람과 함께 시작된 단풍은 호수로를 물들이고, 나무가 많은 일산 곳곳 어디에 프레임을 갖다 대도 작품이 되는 근사한 계절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산의 겨울은 참 춥다. 처음 일산으로 이사 온 그 해의 겨울, 4월에도 눈이 왔다. 추위가 오래 이어지는 탓에 매년 겨울 코트를 오래 입고 다닌다. 첫겨울 어느 출근길, 겨울 코트 등허리 끈에 옷걸이가 매달린 걸 모른 채로 집을 나왔는데 대화역을 지나고 한참 걸어가서야 팔꿈치에 걸리는 옷걸이를 발견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향의 엄마가 거의 울먹이며 당장 올라와 자취방에 전신 거울을 들여놓으셨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눈이 오는 저녁에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대화동 어느 골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 같다. 여름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오후에는 아기띠를 한 초보 엄마 시절의 내가 아파트 놀이터를 서성거리고 있을 것 같다. 일산은 이렇게 내 인생의 계절도 함께 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조금 변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