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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Aug 31. 2021

하루의 빛과 그림자

회사 다닐 때에는 몰랐던 빛의 발견

그랜드캐년 하이킹을 마치고 플래그스태프로 돌아왔다. 저물어가는 해는 나를 쉬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20대의 여행길 중 플래그스태프(Flagstaff)에서 일본 컵라면 하나를 끓여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쓴 일기이다. 꽃병의 하얀 꽃잎을 투명하게 만들며 테이블 위에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던 그 오후의 햇살이 떠오른다. 고단한 여행자에게 휴식같던 그림자였다.


  현재 육아휴직으로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나에게 일상의 가장 큰 발견 중 하나는 하루의 그림자이다. 사무실에 있으면 해를 제대로 볼 겨를이 없다. 출근할 때의 아침 해와 이미 저물어가는 저녁 해만 볼 수 있다. 물론 점심시간의 신나는 햇빛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출근하지 않고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집에 오래 있다 보니 하루의 해가 만드는 그림자들로 일상이 흘러간다. 그림자는 곧 빛이다. 하루가 여러 빛으로 채워진다.


  지금 내가 사는 집으로 이사할 때는 내가 이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중요한 일이 있어 연차를 내지 못하고 예전 살던 집에서 출근했다가 새로운 집으로 퇴근했었다. 그 이후로는 계속 일이 바빴기 때문에 집의 풍경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이번 둘째 아이 육아휴직 기간에 코로나까지 겹쳐 이 시간이 우리 집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렇게 요즘 내가 발견한 일상의 빛들을 소개하고 싶다.


  동이 트기 직전,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맞은편 아파트 단지를 감싼다. 가만히 눈을 감은 아기에게 수유한다. 나는 조용히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본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놓친다. 어쩜 그렇게 하늘색이 빠르게 바뀌는지 신기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면 어느새 밝아져 하늘빛이 이미 파랗다. 등에 가방을 멘 초등학생들이 벌써 학교로 향하고 있다.


  그다음은 동생들 차례이다. 킥보드를 찬 아이들 뒤로 어린이집 가방을 멘 어른들이 총총 따라간다. 새 학기 3월에는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 앞이 울음바다가 된다. 난감하게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는 부모들 머리 위로 오늘의 새로운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 햇빛 사이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벤치를 지키는 오전이다.


  나무들이 가장 푸르게 빛나는 정오를 지나 모두의 그림자가 발갛게 길어지는 오후. 이 시간대의 놀이터는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찬다. 마스크도 가릴 수 없는 아이들의 즐거움이 얼굴에 가득 번진다. 느즈막이 익어가는 햇빛 속에서 나무 그림자를 닮은 아이들이 쑥쑥 자란다. 나에게는 이 시간대의 그림자가 가장 새롭다. 사무실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빛이다.


  우리  안방 한편의 작은 창에서는 해가 지고 있다. 우리 남편이 '우리 집의  자랑' 이라고 말하는 근사한 노을이다. 아이가  품을 파고들고 식구들이 모여앉아 도란도란 저녁 식사를  시간이다. 소란스러운 하루의 따뜻한 마무리이다. 오늘도 열심히 자란 아이들을 토닥토닥 재운다. 다시 마주할 내일의  속에서 아이들은 푸르게 푸르게    자라날 것이다.


늘어진 그림자 -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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