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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Dec 06. 2021

아이들의 생일, 엄마의 기록 (2)

워킹맘의 둘째 이른둥이 출산 썰


"전시회 개막과 정산까지 다 끝내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임신 6주에 아기집을 확인하자마자 회사에 들어와 팀장님께 임신 사실을 보고했다. 그 순간 나는 봤다. 팀장님의 떨리는 눈동자를.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나름 중요한 전시회를 3개나 앞두고 있는 우리 팀 상황에서 차석인 내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전력 손실인지 너무 잘 안다. 순간 표정관리가 복잡해지면서 하얘진 머릿속으로 출산일 계산기를 돌리고 있을 그를 위해 그 날짜가 우리 전시회들이 끝난 이후임을 바로 정확히 말해주었다.


나는 전시컨벤션 기획자이다. 코엑스와 같은 전문 무역전시장에서 개최되는 박람회들을 기획하고 실행, 운영 전반을 담당하는 PM이다. 수백 개의 참가기업을 모아 그 기업들이 판로를 개척할 수 있도록 국내외 바이어들과 매칭 시켜주고, 해당 업계의 신제품이나 신기술을 박람회를 통해 홍보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수백 개의 참가기업과 수천 명의 참관객. 이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전시업계는 코로나 시대를 맞아 완전 박살이 났다.


해외 유수의 국제 전시회들도 당연히 다 취소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전시회 조성 공사가 이미 다 끝난 개막 전날에 해당 지자체로부터 취소 통보를 받는 등 손해가 정말 컸다. 이 상황에서 나 같은 월급쟁이 전시 PM들은 모두 두 가지 마음을 안고 출근했을 것이다. 회사가 오늘은 그냥 확 전시회 취소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렇게 끌고 왔는데 참가기업들을 봐서라도 개최는 했으면 좋겠다, 라는 두 가지 마음.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나는 첫 번째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동료들의 전시회가 하나 둘 취소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맡은 전시회는 언제 취소되나 기다리기도 했던 것 같다. 취소되니 마니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것보다는 그냥 확 취소되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내가 맡은 전시회들은 취소 없이 온라인 전시회와 오프라인 전시회로 개최되어 소처럼 일해야 하는 나의 팔자를 다시금 확인했다. 전 세계적으로 수천 건의 행사가 취소되는 코로나 시대, 이 와중에 말이다! 업계 모두가 예민했고, 듣도 보도 못한 온라인 전시회를 만들어내야 해서 나도 예민해졌다. 임산부가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다고 걱정해주던 협력사들도 꽤 자주 나에게 스트레스를 줬고, 그런 날에는 내 뱃속에 심장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을 잊기도 했다.


태동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정기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가는 발걸음이 항상 무거웠다. 태아의 안녕을 내가 체감할 수 없기 때문에 혹시나, 혹시나, 하는 불안이 컸다. 초음파 기기를 배에 갖다 대는 순간, 반짝이는 심장이 보이면 그제야 마음이 놓이며 어딘가 고여있던 눈물이 터졌다. 경험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첫째 아이를 조산한 나는 둘째 아이 조산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주위로부터 들어왔다. 자궁이 임신기간을 기억한다나.. 운이 좋게도 첫째 아이에게는 이른둥이 합병증이 없었지만, 그 행운이 둘째 아이에게도 이어질 수 있을까. 불안했다.




많이 배려해 주신 팀장님과 든든한 팀 후배들 덕분에 온라인 전시회도, 오프라인 전시회도, 성공적으로 잘 치렀다. 엄마와 함께 2020년 코로나 시대의 전시회를 함께 겪어낸 뱃속 내 딸을 자주 쓰다듬었다. 그렇게 이제 후임 PM만 정해지면 나는 인수인계를 하고 일찌감치 출산휴가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인생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라고 했던가 전 직원의 90% 이상이 인사이동 대상이 되면서 경영진들은 아예 회사를 확 갈아엎었다. 내가 맡았던 전시회들도 새 담당자들을 만났다. 출산휴가를 앞둔 나를 대신하여 한 선배가 PM으로 왔고, 팀장도 바뀌어 다른 전시팀장이 이 전시회들을 맡게 되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인수인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 어느 날, 출산휴가를 일주일 여 앞둔 어느 오후에 일이 터졌다. 새로 이 전시회를 맡게 된 팀장과 함께 잠깐 업무회의를 하던 중, 이전 팀장님과 나의 그간 업무에 대해 폄하하는 불쾌한 말을 듣게 되었다. 순간 너무 화가 났다. "하아, XX하네. 알만한 사람이 고생한 동료들한테 그렇게 X같은 소리나 하고 그따위 XX같은 매너로 일하다니 내가 다 부끄럽네요."라고 목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삼키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때 그 말을 삼키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삼킨 그 말이 독이 된 것일까.


그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오던 중, 느낌이 이상해서 화장실로 갔다. 이번에는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빼박 양수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 양수가 또 터진 것이다. 하아. 34주였다. '지금 나오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팀장에게 양수가 터져서 지금 응급으로 아기를 낳으러 가야 한다고 말하고는 가방을 챙겼다. 팀 선배가 따라 나와 나를 태워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남편에게는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연락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산모님 괜찮아요. 낳으면 됩니다."


진료가 없던 날이었지만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선생님을 보니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선생님 눈도 같이 빨갛게 변했다. 나는 정기검진 때마다 조산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던 산모였다. 첫 번째 출산처럼 조산하지 않기 위하여 의심되는 모든 원인에 대해 검사를 받길 원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전혀 문제 없는 상태라며 나를 안심시켜 왔었다. 내 자궁이 35주를 못 넘기게 생겨먹었던가, 아니면 이번에도 뱃속 아기가 "엄마 이제 좀 그만 일해." 라며 양막을 발로 차 버린 게 틀림없다.


수술과 입원을 위해 코로나 검사를 받은 후, 이번에도 계속 누워있었다. 첫 번째 출산과 마찬가지로 조금이라도 더 아기를 뱃속에서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 하에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언제 수술 들어갈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밥을 먹어도 될 것 같으니 얼른 뭐든 먹으라고 하셨다. 남편과 5살 아들을 이미 집으로 돌려보낸 후였다. 남편만 있다면 오라 가라 있어라 말아라 편하게 말했을 텐데, 당시에는 코로나 방역 때문에 유아의 병원 출입이 굉장히 제한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남편이 나에게 밥을 가져다주려면 그 5세 유아와 함께 힘들게 병원에 와야 한다. 하지만 금식을 버틸 생각을 하니 지금 뭐든 먹어둬야 할 것 같았다. 전화 통화 후 남편과 아들이 닭갈비 도시락 봉지를 가져왔다. 간호사 선생님을 통해 받아 든 봉지 안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없었지만..(ㅠㅠ) 간호사 탕비실에 여분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저녁식사 후 밤이 되었다. 교대하는 새 간호사 선생님마다 보호자가 없이 왜 혼자 있냐고 물었다. 남편은 내 보호자이기도 하지만, 5살 아들의 보호자이기도 하다. 수술 전 안내서와 서약서 등에 직접 서명을 했다. 첫 번째 출산 때는 남편이 내 보호자 자격으로 서명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직접 했다. 이제 아이 둘에 부모 둘. 1:1 전담 마크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혼자 있는 건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는 출산예정일을 앞두고 일상적으로 피어오르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날 밤 더 극대화된 것이다. 아기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지내왔는데 이제 당장 내일 수술을 한다니 걱정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휴대폰 메모장에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주르륵 울면서 썼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내일 내가 혹시 수술받다가 잘못되면 휴대폰 메모장에서 유서를 찾아 읽으라고 남편에게 연락했다. 남편은 비웃으며 그럴 시간에 잠을 더 자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 태아의 상태를 체크한 의사 선생님께서 상황이 나쁘진 않으니 수술을 저녁으로 조금 미뤄도 된다며 지금 뭐든 빨리 먹으라고 하셨다. 뽀얀 쌀밥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새벽에 곤히 자고 있을 남편과 아들에게 밥을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를 불쌍하게 여긴 간호사 선생님께서 고구마라떼를 종이컵에 타서 가져다주셨다. 그렇게 수술 전 나의 마지막 식사는 고구마라떼가 되었다.


"엄마, 이제 우주*가 밖으로 태어난다면서?!"


시간이 흘러 해질 무렵 수술실로 이동했다. 코로나 방역 때문에 면회도 거의 불가한 상황이라 남편과 아들과의 인사는 수술실로 이동하는 길에 아주 잠깐동안만 할 수 있었다. 엄마 뱃속에 있는 우주가 이제 밖으로 나온다며 아들은 꽤나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오후 내내 병원에서 아빠와 대기하느라 지루했을텐데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는 아들이 기특했다. 그렇게 인사 후, 수술실로 이동하여 마취과 선생님께 설명을 듣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잠들지 않는다면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수술시간 내내 수면마취 없이 맨 정신으로 수술에 임했다.




이렇게 나의 두 아이들은 모두 이론적으로 정해놓은 출산예정일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양수를 터뜨렸다. 크게 벗어나지 않은 (비교적 안전한) 35주를 앞둔 경계에서, 마치 내가 태어날 날은 내가 정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태어났다. 이미 조산을 경험해본 내가 이번에는 뭔가 잘못되면 어쩌나 병원 가는 길에 참 많이 울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된 것 하나 없이 내 앞에 딸이 왔다. 설사 잘못된 것이 있었더라도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일 테다. 막을 길 없이 내 앞에 놓일 미래의 삶은 긍정적이고 대담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나의 둘째 아이 우주에게 배웠다. 우주가 세상에 나오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분만대기실 밖에서 나의 남편과 아들이 함께 있어주어서 마음이 무척 든든했던 기억은 아마 평생 간직될 것 같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병원 대기실에서 함께 동생을 기다린 우리 아들도 오빠 노릇을 시작했다.


"엄마, 안심해. 내가 이제 오빠잖아. 내가 우주 돌봐줄 거야."


35주 0일, 2.45kg

우주가 태어났다. 첫째 아이에게 한 것처럼 "웰컴 투 더 월드"라고 똑같이 인사해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 얼굴 옆에 온 우주의 너무 작은 눈코입을 보고는 준비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어머.. 어머.. 어머.. 너무 예쁘다. 어서 와." 온 마음을 다해 뜨겁게 환영했다.


둘째를 낳기 전까지는 아이가 둘이면 내 사랑을 반으로 나눠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둘째가 이렇게 예쁜 걸 보니 아마도 내 안의 사랑이 두 배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여전히 하루에도 드라마틱하게 냉탕과 온탕을 열두 번 오가는 육아를 하고 있지만, 둘째 덕분에 냉탕이 덜 깊고 온탕이 훨씬 더 깊어졌다. 둘째가 태어나고 나는 훨씬 더 많이 웃는 사람이 되었다. 내 안의 사랑을 더 키워주기 위해 우주가 내 세상에 왔나 보다.




*우주 : 둘째 아이의 태명, 우주의 따뜻하고 강한 기운을 담아 작명하였음.






) 이번 둘째 아이 제왕절개 수술 후에는 첫번째 출산과 달리 통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로 도입된 페인버스터는 정말 신세계였어요. 정말 통증이 1 없어서 딸아이에게 ' 낳고 얼마나 아팠는지 아냐' 소리도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둘째 출산은 훗배앓이가 무척 심하다고 들어서 수술  매일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통증이 찾아오지 않았어요. (페인버스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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