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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Dec 13. 2021

살아있는 우리에게

<뉘앙스> 성동혁 산문


우리 집 5살 아들은 셔틀버스를 타고 어린이집을 오간다. 가끔 다른 일정이 있어 내가 어린이집으로 데리러 가면 아이는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옆에 같이 나오는 친구에게 "우리 엄마도 나를 데리러 왔어!" 소리치며 자랑(?) 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데리러 오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나 싶어서 순간 마음이 찌릿하다. 하지만 셔틀버스를 타고 어린이집을 오가는 일은 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아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간식을 준비해왔냐는 아이에게 사탕을 짜잔 쥐어주고 카시트에 앉혔다. 아이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맑은 공기 덕분인지 지는 햇살도 더 또렷하게 차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내 운전석 뒤에 앉아 창문 밖을 보고 있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가 살아있어서 좋은 게 많지?

이렇게 사탕도 먹을 수 있고,

벌써 낮이 밝은 것도 볼 수 있고,

좌회전, 후진, 우회전, 직진도 할 수 있고,

... 잘못도 할 수 있고 말이야.

으하하하하!!"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룸미러에 보이는 아들의 이마에 붉은 햇빛이 얹어져 있다. 마치 신의 손등처럼.


"어, 정말 그러네. 우리 이렇게 살아있구나."




얼마 , 자꾸만 눈물이 차올라서  이상 읽을  없었던 책을 만났다.


신을 믿게 된 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어릴 적부터 계속됐던 병원 생활과 수술. 내겐 또래의 아이들보다 조금 빨리 깨닫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건 이 두 가지였다.

첫째, 내가 울면 엄마도 우는구나. 침대차에 실려 수술실로 가는 복도.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는데 엄마의 얼굴이 그렁그렁 모두 떨어질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 가장 크고 슬픈 얼굴이었다. 덕분에 난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눈물을 흘리면 그때의 크고 그렁그렁하던 엄마의 얼굴이 다시 쏟아질 것만 같아, 나는 참는 아이가 되었다.

둘째, 내가 사랑하는 엄마도 수술실까지는 같이 들어오지 못하는구나. 수술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대 위에 올랐다. 등 전체에 온통 차갑기만 한 수술대가 닿을 때, 그러니까 철판에 누운 내게로 너무 큰 조명이 켜질 때, 난 혼자구나, 신이 나와 함께해 주지 않으면 난 여기서 싸늘해질 수도 있겠구나, 감각했다. 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신을 수술대 위에서 믿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이었고 그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대견한 일이었다. (성동혁, <뉘앙스>)


책방에 앉아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에서 '산소통' 글을 읽었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고 그대로 책을 덮었다. 직감했다. 이 책은 나에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아껴 먹는 슈톨렌처럼 다가왔다. 내 일상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여겨지거나 혹은 신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지는 어느 날 밤에 조금씩 아껴 읽고 싶은 책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망울이 사랑을 담는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었으면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란 말을 두 눈 가득 꾹꾹 담아 보여주던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처럼. (성동혁, <뉘앙스>)


시인의 문장을 읽는데 아이의 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의 삶이 보였다. 삶을 살고 있어도 삶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날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산소처럼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신이 가끔 아이의 눈과 입을 통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다. 아이와 함께 했던 그 날 오후가 그런 순간이었다. 잘못을 하더라도, 상처 받더라도, 억울하더라도, 우리는 살아있어서 참 좋다. 아이가 바라보는 창밖으로 나도 잠시 시선을 모은다.


내 인생을, 그리고 내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하는 좋은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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