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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an 03. 2022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네 컵은 네가 씻어> 미지 에세이


2022년 새해의 첫 책으로 미지 작가의 <네 컵은 네가 씻어>를 읽게 되었다. 이제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출간 당시, 책 제목에 이끌려 바로 '읽을 책 명단'에 넣어둔 책이었다. 그때 나는 엄마 1년 차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내가 낳은 작은 존재 때문에 밤낮으로 미칠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행복의 임계치를 빠르게 찍어 오히려 그렇게 매일 불안했던 1년. 질풍노도의 첫 해를 통과하고 조금씩 육아의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3년 후, 미운 5살을 영접하며 제2의 미친 여자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은 몰랐던 때..)


그때 나는 곧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평생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으로 살고자 했던 나는 우리 아들이 워킹맘의 아이로 어떻게 잘 자랄 수 있을지, 나는 어떤 엄마로 어디쯤 서 있어야 할지 고민을 시작하던 때였다. 이 책의 제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분명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는 비법'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이 책의 리뷰를 읽어버리고 말았다. 리뷰에 직접 언급된 몇 가지 단어가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본인 컵을 본인이 씻게 만드는 육아 지침서가 아니라, '상실'이 담겨있는 책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버렸다. 그 상실은 내가 감히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살과 피로 만들어진 존재를 잃어보는 상상을 한두 번쯤 안 해본 엄마가 어디 있을까. 나 역시 핏덩이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어본 엄마로서 그런 무서운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저주가 내려질까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본 시간들이 있었다. 꼭 엄마여야 할 것까지도 없다. 어떤 존재를 진하게 사랑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이 미어지게 두려운 상실의 순간을 그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해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 내 마음이 찢겨나가듯 너무나 아플 것이며 매우 슬퍼질 것이라고,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이 책을 펼치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이 책을 잊고 살았다. 복직을 하여 바쁘게 일에 빠져들었고, 1년의 육아휴직 기간이 무색하게도 금방 또 그렇고 그런 회사원의 모습에 가볍게 적응했다. 아마도 내 인생의 마지막 승진이 될 것 같은 승진자 발령 명단에 이름도 올려보고, 확실히 내 인생의 마지막 아이가 될 둘째 딸아이도 낳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내 승진에 대해 당사자인 나보다도 훨씬 더 기뻐하셨는데, 막상 딸아이 출산에 대해서는 그만큼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당신의 딸이 딸을 낳았다는 사실은 무작정 덮어놓고 기뻐할 수만은 없는 미묘한 상황이었던 걸까.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탯줄을 자르는 순간, 그 존재는 모체와 물리적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엄마와 자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끈이 존재하여 그 둘을 연결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내 감정이 아이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고, 몸이 떨어져 있어도 아이 생각에 몸이 저릿해지는 현상을 경험한 적도 있다. 나와 엄마도 여전히 이 끈으로 연결되어있는 건지, 아이를 낳은 이후로 엄마 생각이 유독 더 많이 나는 것 같다.


엄마와 연결된 이 끈이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이 책에 대한 기억을 건드렸다. 얼마 전, 한 편의 글을 쓰면서였다. 이 세상에 오자마자 다시 되돌아가야 했던, 얼굴도 모르는 내 남동생에 대한 글을 쓰며 꽤 울었던 날이었다. 미지 작가의 상실이 떠올랐고 동시에 그가 쓴 책이 생각났다. '가슴팍에 착 달라붙어 있던 아이가 갑자기 아래쪽으로 확 떨어져 나갔'지만 분명 잘 받아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를 잃어버린 후였던 그의 상실에 대해 읽고 싶어졌다. 내 생명이 내 몸에서 나왔는데 숨이 꺼져버려 함께 집으로 데려오지 못했던 그 시절 우리 엄마의 상실을 간접적으로라도 마주하고 싶었던 걸까.


짐작과 달리,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았고 앞부분에 조금 나온다. (물론, 분량은 적었으나 너무도 굵직한 그 이야기에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참았다) 책 내용의 대부분은 작가가 유년시절부터 '그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그러나 한 번쯤은 꼭 하고 싶었던' 그의 진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대를 살아온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미지 작가와 우리 엄마, 아니 우리에게 일어난 그 상실은 사고였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남은 평생의 시간을 다 바쳐도 뒤바꿀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고. 그 사고 이전에 작가가 '삶의 순간순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제는 당당하게 하려고 한다. 그도 모르는 사이 수동적으로 강물에 휩쓸려온 순간들을 복기하며 앞으로 내 배의 노는 내가 잡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책을 덮을 때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새해 아침 <네 컵은 네가 씻어>를 읽고 작가의 다짐을 마주하며 소중한 진리를 다시금 되새겼다. 우리는 언제 사고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렇게 귀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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