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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an 24. 2022

꿈틀꿈틀 나아가는 우리

작년 여름에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한 명 있다.


그의 글에서 보이는 잔잔하고 명랑한 모습이 좋았다. 그도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기 때문에 여러 육아 에피소드나 아이와 나 사이의 관계 등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처음부터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 그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종종 글에서 어렴풋이 고독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바탕 가족들이 소란을 부리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식탁 같은 고독. 나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결을 가진 친구 같았다. 내가 곁에 앉아서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그를 깔깔 웃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렇게 한 달간 같이 글을 쓰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이후로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셔서 SNS로만 소식을 접했다. 그러다가 지난 연말에 우연히 리추얼 습관 모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 모임을 통해 한 달 내내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으로 새해 달력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달력을 당연히 모임 멤버들에게도 선물했다.


우편으로 달력을 받은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 왜인지 달력을 찬찬히 살펴보다 눈물이 찔끔 나버렸어요. 아이들을 보느라 잊어버린 꿈같은 것도 떠오르고, 떠나고 싶기도 했고요. (...)
무엇보다 내가 기억되었다는 것에 너무 기쁜 마음이 들었답니다. 엄마로서 살다 보니 종종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허무할 때가 있는데 슬님의 소중한 달력에 기억되었다니.. 그게 너무 가슴 뛰게 기뻤어요.
(...)


 달력을 보고  눈물이 났을까 화들짝 랐다. '잊어버린 ', '기억되었다는 ', '허무' 단어를 읽다가  눈도 같이 뜨거워졌다. 그게 어떤 것인지 너무    같아서 갑자기 그가   가슴이 저릿했다.  단어들이 그렁그렁  밑에 달렸다. 내가 만든 달력을 보고 일렁이는 기분으로 조용히 기뻐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들이 구길까  커다란  사이에 두었다고 한다. 남편이 집에 오면 가장 먼저 자랑하겠다고 덧붙였다. 근사하지 않은 서툴고 조잡한  달력을 자랑스러운 물건으로 소중히 여겨주니 나도 가슴 뛰게 기뻤다.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조용히 누워 영화 '어디 갔어, 버나뎃(Where'd you go Bernadette)'을 보다가 나는 또 그렁그렁 울어버렸다. 트라우마와 양육으로 긴 시간 창조 활동을 하지 못한 천재 건축가 버나뎃은 20여 년이 흘러서야 가까스로 해방될 창구를 찾았다. 버나뎃의 딸이 "Mom, You Can Go!"라고 외치는 순간, 내 안에 결박된 무언가도 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잊어버린 꿈'

'기억되었다는 것'

'허무'


어떤 단어 속에 발이 묶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혹은 희망적인 단어 이면의 현실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갑갑하기도 하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것 자체가 한 발짝 내딛기 위한 도약이 될 때도 있다. 버나뎃처럼 천재 건축가가 아니어도 우리 모두가 꿈틀꿈틀 꿈꾸며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버나뎃의 말처럼, "I will move for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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