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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Feb 02. 2022

설 전야, 우리 부부의 전쟁

새해 다짐


올해의 설 전날 밤, 큰 눈이 왔다. 이미 미리부터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라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다. 하지만 곧 펄펄 내리는 주먹만 한 눈송이를 보고 있자니 마치 예상치 못한 큰 눈을 만난듯 고요하게 들뜬 밤이 되었다. 아직 치우지 않은 창문 벽트리의 꼬마전구들을 켜고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분명 '도란도란'이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날은 우리 집의 생활비를 정산하는 월 말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남편이 지출한 생활비를 내가 정산해주는 날이다. 나는 뭘 사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남편은 이것저것 골라 사는 걸 좋아하니까 남편이 우리 집의 주된 생활비를 지출하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생필품을 사거나 식비를 지출하는 일은 대부분 남편이 한다. 정산할 때에는 지출의 세부내역까지는 확인하지 않는다. 그냥 남편을 믿고(?) 생활비 지출 합계와 남편의 용돈을 더한 총합계 금액만 공유한다. (단, 굵직한 범위 내에서 각 항목별 지출 비율은 분기별로 얘기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노력한다. 귀찮아서 잘 안되지만..)


올해 예정된 큰 지출을 앞두고 우리가 월 생활비를 좀 더 아껴 써야 하지 않겠냐는 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나의 플렉스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읽고 갖고 싶은 책을 구입하는 것 외에는 별로 없으니 그런 내 눈에는 뭐든 과소비로 보이는 게 억울하다는 남편의 입장이 돌아왔다. 다른 친구들의 사례를 들어 본인은 과한 지출을 하는 게 아니라는 대응도 이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 대화는 각자 원가족들과 살아온 예전 이야기로 흘러가더니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졌다. '가난 배틀'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은 이렇게까지 가난해봤다'는 식의 경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가난 배틀'로 시작하여 번외 편 '불행 배틀'까지 더해졌다. 각자의 예전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에게 차인 이야기며 구질구질한 에피소드까지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수십 번 얘기 나눈 일들이지만 여느 에피소드들이 그렇듯 말할 때마다 새롭다.


내가 더 불행했다며 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더했다. 경쟁은 치열해졌다. 그러다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그 해까지 거슬러 오게 되었다. 오늘의 배틀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서로를 만나기 직전의 시점에 우리 둘은 각자 가장 어두운 불행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말 신이 있는 것 같지 않아?"라는 남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오늘 배틀에 아래의 결론을 내렸다.


"아. 동이 트기 전에 가장 어두웠구나."


새해에도 크고 작은 불행의 터널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인생일 테니 너무나 당연하게 예상되는 사실이다. 앞으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 온다면 기꺼이 힘을 내어 터널을 지나 보겠다.


곧 동이 틀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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