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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an 22. 2022

서로 다른 삶의 모양

가난과 장애


'다름'은 언제부터 알게 되는 것일까? 이를테면, '장애'나 '가난' 같은 것 말이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이 다 같은 동네에 살았으므로 그냥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물론 조금 더 큰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친척집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긴 했다. 하지만 그 '다름'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집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달라 '가난'으로 불린다는 사실 자체를 피부로 인식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한 친구의 집에 가보기 전 까지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거의 우리  전체 크기와 맞먹는 친구의 방에서 도란도란 시간을 보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대궐 같은 집이 실제로도 존재하며, 그게  친구의 집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크기도 크지만  친구네 집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봉지에 들어있는 과자가 아니라 반짝이는 틴케이스에 들어있는 과자를 꺼내 먹었다. 언젠가는 과외선생님께서 선물해주셨다는 향수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한참을 놀다가   무렵, 양철 대문을 철컹 열고 우리 집에 돌아온 날에는 어쩐지  친구와 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친정아버지는 2년 전 사고로 왼손의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었다. 아버지가 장애인이 된 것이다. 접합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끝내 살리지 못한 두 손가락의 신경들은 점점 죽어갔다. 그래도 양손을 다 잃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아 한시름 돌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 중 장애인이 생긴 거니 내 자식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이 자랄 수 있겠다.'라고. 아버지의 아픔을 앞에 두고 자식의 성장을 떠올리는 이기적인 딸년이었다.


"엄마, 할아버지 손가락이 세 개 더라?"


친정에서 일주일 여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5살 아들이 갑자기 이 말을 꺼냈다. 이제 이 아이에게도 몸의 '다름'이 보이는구나 싶었다. 할아버지의 손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당사자인 할아버지에게, 그리고 함께 있던 나에게 지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건지, 혹은 불편한 사정일 것이라 예감하고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싶으면서도 내 아들이 전자의 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주었다. 사고가 있어서 할아버지 손가락이 잘렸다고. 사람들의 몸은 그렇게 다 다른 모양이라고.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손톱 밑이 긁혀도 이렇게 아픈데 손가락이 잘린 거라면 할아버지가 엄청 많이 아팠겠다며 다음에 만나면 호오- 해줄 것이라고 했다.


몸의 모양처럼 집의 모양도 다양하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우리 아이들이 크고 작은 크기의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관점에서 세상을 대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난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어떤 경험을 하도록 도와줘야 할까. 키우는대로 자라지 않고, 원하는대로 자라지 않겠지만 이것만큼은 조금 더 욕심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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