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옳다] 정혜선
'언니가 그런 행동을 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자 이제 한 번 들어볼까?'
'언니가 무조건 옳아.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다.
이 공급이 끊기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져간다. (중략)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사람은 그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p.49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p. 45-46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p. 50
나와 네가 순간순간 겨루다가 서서히 나를 지워나가기로 한다.
그렇게 자기 소멸의 길로 접어들며 병이 든다. (중략)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중략)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p. 40-41
공감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자기 보호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중략)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 p. 192
'나'가 또렷해져야 그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p. 105
'자기'를 드러내면, 그러니까 내 감정, 내 말, 내 생각을 드러내면 바로 싹이 잘리거나 내내 그림자 취급만 당하고 사는 삶은 배터리가 3퍼센트쯤 남은 방전 직전의 휴대전화와 비슷하다. p. 93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인정과 주목을 존재에 대한 주목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도 기대만큼 포만감이 없다.
물론 존재 자체에 대한 공감도 없고, 오른 석차에 대한 반응도 없는 무관심보다는 낫다. 하지만 밥 없이 반찬으로만 배를 채운 사람처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편안한 포만감이나 포만감으로 인한 안정감이 없다. 반찬으로만 채운 배는 한계가 있다.
p. 142
아이에게 칭찬할 때
"와, 성적이 그렇게 올랐구나. 참 잘했다"는 식으로 오른 점수에 방점을 찍는 칭찬보다는
"성적이 그렇게 많이 올랐구나. 네가 이번에 정말 노력을 많이 했나 보다. 참 애썼어"라고 한다면
오른 성적보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집중을 한 것이다.
p. 142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p. 142-143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중략)
이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중략)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중략)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p. 108-109
"나 있지, 힘든 일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그래, 뭐 말하고 싶으면 네가 말하겠지.
시간이 걸린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을 거고."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p. 239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