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행에 함께한 작은 책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51
인생은 점 잇기 놀이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 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는데, 그 경험은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프로그램의 근원도 이제는 알 것만 같다. 나의 유년은 잦은 이주로 점철되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여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원 경험들이 쌓여 그것이 프로그램으로 내 안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p.60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벨맨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셉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
(2)그런데 받아들여진다. →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
(4)그러나 곧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반복)
-p.61
강원도와 전라도, 경상도와 경기도, 그리고 서울, 말과 풍습이 다른 고장으로의 잦은 이동으로 나의 유년기는 마치 긴 방랑처럼 기억된다.
-p.194
여행은 대체로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매 순간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뉴욕 시절에 아내가 말했던 '그 여행'은 아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을 것이다.
-p.202~203
대체로 계획하고 내가 통제하며 지낼 수 있는 '여행'과
예상치 못한 일, 견뎌야 하는 일들이 다분히 지속되는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