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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_김영하

부산여행에 함께한 작은 책

'오랜만의 여행이니까, '여행'이 들어간 책 한 권을 들고 가야겠어!'라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장소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어서 '여행'을 원한다고. 일종의 '도피'다. 각 장소는 그 사람이 그곳에서 자주 했던 생각, 자주 했던 일, 자주 겪었던 상황 등 다양한 기억들을 담고 있다. 그런 기억으로 인해 너무도 피로해진 개인들은 그 장소를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날 라디오 진행자는 "여행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방청소를 하고 가구의 위치를 옮겨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뇌는 그런 것조차도 다른 장소로 인식을 한다고 하니까요!"라며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뭐, 나는 현재 '자유인'의 상태가 아니던가. 너무도 기대했던 시험이 허무하게 끝나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차였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부산으로! 지난 시간 동안 부산이 내게 남긴 기억은 그야말로 힐링이자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힘든 기억의 장소를 떠나 조금 편안한 기억의 장소로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번 잠실역 교보문고에서 사 온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함께 들었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여행'이 들어가길래:)


미처 몰랐는데, 김영하 작가의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수동 책방골목_우리글방


이 책은 '여행'이라는 제시어를 가지고 쓴 아홉 개의 작문 모음집이다. 모두 한 작가가 썼다는 것. 조금은 유명한 작가이기에 혹 필력이나 배워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51


한창 외교관을 꿈꾸던 중학생 시절에 특별히 좋아하던 책이 있었다. 강인선 기자의 <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 >이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이 말을 유독 좋아했다.


인생은 점 잇기 놀이


지금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훗날 내 인생의 큰 그림의 한 점이 되어 줄 것이라는 얘기. 어떤 무의미한 일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수이든지 성공이든지 최대한 많은 점을 찍으면 찍을수록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인생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여행은 더 다양한 점을 찍을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 일상과 같지 않은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그림이 아주 달라질 수도 있고, 새로운 자아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 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는데, 그 경험은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프로그램의 근원도 이제는 알 것만 같다. 나의 유년은 잦은 이주로 점철되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하여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원 경험들이 쌓여 그것이 프로그램으로 내 안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p.60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벨맨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셉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
(2)그런데 받아들여진다. →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
(4)그러나 곧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반복)
-p.61

작가는 뒷장에서 초등학교 6년 동안 6번 이사를 했던 그의 삶의 배경을 들려준다. 내 경우에는 다녔던 유치원 이름만 4곳을 말할 수 있고, 초등학교의 경우 6년 동안 4번의 전학을 다녔다. 고덕동, 명일동, 청주시, 다시 명일동. 운 좋게도 중학교는 3년 동안 한 개의 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내 욕심으로 인해 세 곳을 다녔다. 명일동, 위스콘신, 버펄로. 작가처럼 초등학교 6년 동안 6번에 이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느끼던 감정은 비슷했던 듯하다.

강원도와 전라도, 경상도와 경기도, 그리고 서울, 말과 풍습이 다른 고장으로의 잦은 이동으로 나의 유년기는 마치 긴 방랑처럼 기억된다.
-p.194

내 경우에는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성남과 하남, 서울, 그리고 미국의 위스콘신과 뉴욕.


한때 '동네 친구'라는 단어를 굉장히 부러워했다. 내게는 그런 '동네 친구'가 없었다. 적응을 위해 노력하다가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일의 반복뿐이었다.


작가가 적은 것처럼, 어린 시절 나는 '누군가와 오래 알고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차피 1-2년 뒤면 헤어질 테니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순간이 소중했다. 그 순간에 그들의 시선을 내게 모으는 것을 중요시했다. 잠깐 왔다가 떠날 이방인이지만 그들 기억 속에 남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기에 여행기나 모험소설을 읽으며 극복했다는 작가와 달리, 나는 내가 머물렀던 장소와 만났던 사람들에게 나를 남기는 법을 연구했다. 청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첫인상을 시작하면 인상적일까?'를 고민했던 나를 돌이켜보면, 전혀 귀엽지가 않다. 고작 11살이었는데.


여행은 대체로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매 순간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뉴욕 시절에 아내가 말했던 '그 여행'은 아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을 것이다.
-p.202~203


작가는 어린 날의 (강제) 이주와 진짜 여행의 차이를 이렇게 언급했다.

대체로 계획하고 내가 통제하며 지낼 수 있는 '여행'과
예상치 못한 일, 견뎌야 하는 일들이 다분히 지속되는 '일상'.



그렇기에 한 곳에 안정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며, 삶이 여행인 것 같은 사람들도 '여행 가고 싶다'라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여행은 일상의 부재"이다. 통제할 수 없는 일상에서 내가 주인일 수밖에 없는 여행을 원하는 것은 결국 본능이다.


부산 송도 해수욕장


이 책에서 처음 배운 단어가 있었다.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류를 지칭한 단어인데,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이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BBC방송 다큐멘터리 <인간 포유류, 인간 사냥꾼>에서는 끝없이 걷거나 뛰는 것이 인류의 강점이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2007년 하버드대 고고학과와 유타대 생물학과 합동 연구팀은 원시 인류가 사냥감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도록 진화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작가의 이 말에는 공감한다. 아무리 VR이나 AR 등의 가상현실 기술이 발달해 여행을 대체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 발로 떠나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 각자의 삶의 배경에 따라 그 여행에 대한 태도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아무리 엄청나게 이뤄지더라도, 호모 비아토르인 우리는 어디에선가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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