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는 안녕하셨나요 :)
읽어보고 싶었다.
그냥 제목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혹시나 시중에 가끔 있는 '제목만 그럴듯한 서적'일까 싶어, 그 자리에 앉은 채 책을 펼쳤다.
1/3 즈음 읽었을까..
'사자.'
돈을 아끼려던 참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책 한 권이 또 늘어나버렸다.
뚱뚱한 건 사실이잖아? (p. 27)
이 책이 흥미롭기 시작했던 부분.
이 질문으로 "당신은 혐오하지 않습니까?"의 장을 연다.
나는 미국에서 15kg 가까이 살이 찐 적이 있다. 유독 달콤한 음식을 즐기던 나에게 미국의 음식들은 너무도 잘 맞았다. 1년 뒤에 버펄로에서 만난 부모님은 처음에 딸을 알아보지도 못하셨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내가 살찐 것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눈초리' 를 준다던지, '다이어트'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위스콘신 생활을 너무도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미국의 쿠키와 브라우니는 한국의 것들과는 촉촉함부터 다르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요즘은 많은 글들과 영상들로 인해 사람들이 배워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눈초리'가 존재한다. 몇 년 전 한국에 놀러 왔던 한 미국인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눈치 보여서 힘들었어. 이 나라에서 일주일만 살면 강제로라도 살이 빠질 것 같아."
말도 말이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시선. 그것 자체가 혐오이지 않을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길거리에 다양한 사람들이 보일 수록, 그 나라의 문화가 건강하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다양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장애의 유무부터, 몸매의 다양성까지.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관여를 하는 것은 아닌지.
다수의 생각이면 정의일까? (p.233)
또 하나는 이것이었다.
"죄책감은 공감적 고통과 자신이 괴롭힌 사람에게 손을 뻗어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수치심은 모욕감을 느끼게 만들어 쓸모없고 사람 축에도 못 드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제레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중
리프킨의 글은 수치의 문화를 강조하는 동양과 죄의식의 문화를 중시하는 서양의 차이를 나타낸다.
'절대 악'의 개념이 명료한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은 주변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을 강요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으면 수치심을 제공한다는 것. 집단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받아 주로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문화 차이로 덮어두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라는 비논리적인 이유를 대는 것으로 이어진다. 사회에서 부당한 것을 '참지 않는다면'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모두 괜찮다는데 '너만'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가 다른 장에서 언급했듯이, "불평불만 청개구리가 세상을 구하기"때문이다.(p.156) 살기 힘든 사회이다 보니 늘 힐링 서적으로 가득하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자고 외친다. 하지만 저자는 부정적인 상황을 마주해야 발전이 있지 않겠냐고 얘기한다. 약자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상황이 제대로 드러나야, 강자가 강자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이유도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정호승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