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언어 규칙'이란 학살이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표현법을 만들어 대신 사용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학살은'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 취급으로, '유대인 이송작업'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 언어 규칙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자신들 간에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했다.
그 효과에 대해 아렌트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p.150)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말이 하는 역할은 현실을 알게 하는 것.
"말"은 우리와 현실을 연결시켜준다.
나치스가 언어 규칙을 만든 이유는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말은 현실의 힘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주 '그들의 상투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판사들이 그런 그의 말에서 '공허감'을 느꼈다고 했다. 판사들이 그에게서 바란 것은 '사실에 충실한 언어'였다. 공허하다는 것은 현실의 힘이 결여되었다는 뜻이다. 아이히만의 의식에 가득 찬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이 현실의 힘을 느끼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03. 인간의 복수성(plurality)
행위와 말,
이 두 가지의 기본 조건이 되는 인간의 복수성은 평등과 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아렌트에게는 "복수성(plurality)"이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실존적 조건이다.
인간들이 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그리고 자신들이 앞서 왔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미래를 계획하고 자신들 다음에 올 사람들의 필요를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들이 다르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과 구별되는 각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거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첫 번째의 '생물학적'탄생과
두 번째의 '상징적 탄생은
동일한 인간적 공적의 연속이다.
아렌트의 '탄생'개념은 그녀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탄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며, 인간을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탄생하는 한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어머니가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날에 단 한차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탄생을 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04. 유대인
'유대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많은 책에서 묘사하길, 유대인이 전 세계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편견에다가 신화가 덧붙여진 것이었다.
어떠한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기초도 갖춰지지 않은 '추상적'믿음이었다.
사르트르는 그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서 만일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창조해 내거나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보편적 유대인에 대한 초상은 '가난한 사람의 속물근성'일 터이다.
05. 사유할 수 없는 사람
"차이란 인간관계에서 관용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반면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만든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처(Michael Walzer)
아렌트는 인간의 복수성에 있어서 '평등'(정체성 또는 동일성)의 다른 측면, 또는 다른 갈고리인 '차이'를 일컫었다. '차이'가 없으면 소통도 필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 없게 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타인 또는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또한 '행위'할 능력, 또는 더 잘 말하자면 도덕 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다. 그에게 어떤 것을 '말하기'란 언어놀이를 하는 것과 동일했다. 또한 그는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책임의 윤리를 실천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06. 우리 모두 안의 아이히만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고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이다.
자주 전쟁이 일어나던 시절, 우리는 전쟁에 마취되어버렸거나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즉,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무사유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주 평범하게.
아렌트는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기술, 특히 미디어 기술이 우리를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미디어는 우리를 더욱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무사유'하도록 만든다. 아렌트는 이 부분이 가장 두렵다고 언급한다. 지구 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