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 그럴 리 없어. 우리 아빤 절대로 허락하시지 않을 거야. 겁나서 얘기 못하겠어."
고개를 푹 숙이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보자!"
다른 친구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쭈가 크리스마스에 자기 집에서 친구들이 모여 놀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하룻밤 자도 된다고 해서 우리 단짝 네 친구는 모여서 어떻게 허락을 받을지에 대해 심각하게 의논 중이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새로 생겨서 1회 입학생을 뽑았고 꽤 거리가 되는 이곳저곳에서 여학생들이 모였다. 학교를 배정받고 쭈는 전학을 갈 거라며 울었다고 했다. 친구도 한 명 없는 낯선 지역으로 이름도 모를 고등학교를 오게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1학년 같은 반이 된 우린 앞뒤로 앉은 딱 네 명의 전우였다.
입학하고 첫 수업 날 극 소심했던 내가 말도 없이 앉아 있는데 짝꿍이었던 쭈가 이름이 뭐냐고 먼저 말을 걸었다. 서로 친구가 없으니 잘 지내보자고 했고, 점심시간에는 뒤에 앉은 예쁜 여학생 둘이 우리 등을 툭툭 치더니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그 후로 항상 밥을 같이 먹고 어디든 같이 다니며 절친이 되었다. 우리 사총사는 겨울방학에 경복궁도 다니고 즐거운 여고시절을 맞았다. 2학년이 되고는 연미와 나만 같은 반이 되었지만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고, 고2 크리스마스에 드디어 함께 밤을 보낼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그동안 서로의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수다를 떨며 놀았던 적은 꽤 있었지만 한 번도 집을 떠나 잠을 자본적이 없었던 우린, 절호의 찬스로 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관은 내게 있었다. 다른 아버님들도 완고하신 분들이었지만 도저히 우리 아빠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쭈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너희 엄마께 전화를 드리면 어떨까? 그럼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엄마는 어차피 허락해 주실 것 같거든. 아빠가 문제라서 말이야. 그래도 엄마가 통화했다고 말하면 아빠도 설득하실 수 있으니 한번 통화하게 해 드리자."
하교 후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엄마께 말씀드렸다. 곧 쭈의 어머니께서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하셨고 두 분은 네네 호호하면서 다정히 얘길 나누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크리스마스에 쭈의 엄마도 집에 계시고 아이들은 2층에서 안전하게 놀 거니까 걱정 마시라고 전해주셨고 엄마는 아빠께 저녁에 말씀드리기로 했다.
두근두근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아빠가 퇴근하시고 기분 좋게 저녁을 드신 후 말씀드리려는데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쭈의 아버지셨다. 어머니들끼리는 서로 얼굴도 알고 지냈지만 아빠들이 만날 기회는 없어서 전혀 모르시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으신 쭈의 아빠가 직접 우리 아빠랑 통화를 하시면 더 안심하실 거라며 전화를 주신 것이다.
아빠는 허허 웃으시며 알았다고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쭈의 집으로 모인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고 꺄아악 소릴 질러댔다. 그리고 귤 한 박스를 방에 갖다 두고 손도 얼굴도 노래지도록 먹으며 영화도 보았다. 그러고는 쭈의 방에 있던 레코드판을 하나씩 구경하고 내가 디제이처럼 음악을 선곡해 들었다. 그때 이문세 음반을 골라서 전축 바늘을 좋아하는 곡의 줄에 콕 올려놓던 촉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우린 사진도 찍고 수다를 떨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눈물이 나서 울기도 했다.
우린 어른이 되었고 그 이후 여름휴가 여행을 같이 간 적이 있었지만 철부지 열일곱 살의 크리스마스 모임처럼 달콤하고 쌉싸름한 시간이 있었나 싶다. 이젠 반짝이는 십 대에 무지개처럼 수놓은 하룻밤 추억을 서걱서걱 퍼먹으며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
지금껏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건 쭈뿐이지만 친구들 모두 추억을 맛나게 되씹으며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 잊지 못할 '그 크리스마스'의 밤을 생각하며 작은방에 가득 찼던 네 여학생의 웃음소리가 캐럴처럼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