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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May 03. 2022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12 - 7 신나는 글쓰기


현정아, 오늘 오클랜드 날씨는 어때? 여긴 아침을 열었으니 넌 밤으로 가고 있을 테고, 우린 뜨거운 여름으로 직진 중이니 거긴 스산한 겨울로 가고 있겠지! 온 가족이 확진됐다는 소식까지만 네게 들었는데 모두 평안을 찾았는지 궁금하다.


오늘 신글 미션은 행복이 담긴 영화나 책을 친구에게 소개하는 거야. 그냥 온종일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 영화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어. 잭 니콜슨의 얼굴이 마치 섬광처럼 나를 스쳐간 거야. 그 노배우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던 영화관의 냄새까지 기억이 나더라고.


참 오래된 영화지. 작년에 재개봉하기도 했지만 1997년 영화라니 정말 올드하지 않아?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올드 한 사람이잖아.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고 난 제자리에서 늙어가고 있어. 영화도 바로 떠올리면 시네마 천국,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올드한 영화만 떠오르네. 미나리도 참 재밌게 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의 머릿속이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이 밝게 웃으며 강아지를 바라보는 옆모습의 포스터는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져. 잭 니콜슨은 밝게 웃어도 특유의 찡그리는 주름들이 있거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눈썹은 화난 사람처럼 끝이 올라가 있지. 그런데 그가 입으로 밝게 웃고 있어.

영화 내용이 그래. 강박증으로 똘똘 뭉친 나이 든 중년 남자가 옆집 게이와 그가 키우는 강아지, 그리고 또 상처받은 한 여자를 만나면서 찡그려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장착하게 되는 이야기야. 그냥 이렇게만 들어도 무슨 내용일지 예상이 되지? 어찌 보면 뻔한 스토리야. 대단한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대단한 반전도 없어.

그런데 사람이 다른 생명으로 영혼을 치유받고 세상에 한걸음 더 나아가는 이야기는 바로 '행복'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해.


사람은 매일, 그리고 매년 행복할 수는 없어. 트라우마를 겪고 몹쓸 강박이 생기기도 하고 불안증에 시달리기도 하지. 네가 엄마 돌아가시고 몇 년을 회색빛 같은 얼굴로 지냈다는 걸 알고 있어. 미소가 한없이 상쾌하고 맑은 눈빛을 가진 네가 말이야. 네가 환하게 웃으면 피부에서는 빛이 나고 네 얼굴 주변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지. 그런데 그 생기를 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단다.


오랜 타지 생활과 새로운 가족을 꾸려 살아가면서 느꼈을 부침, 거기에 어머님의 부재가 주는 외로움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동안 멀리서나마 걱정이 되던 날이 꽤 있었어. 무사한지 톡을 하고 연락을 기다렸지. 그러다가 아이들이 좀 크니 아르바이트도 하다가 대기업 입사도 도전해서 성공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하며 생기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아이들도 정말 예쁘게 자랐고 네 식구 모두 안정감이 들더라.


우린 막바지까지 몰렸다고 느끼고 힘겹게 자신만 지쳐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가치 있는 것들로 다시 삶의 활기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자신만의 공간에서 외롭고 거칠었던 잭 니콜슨처럼 말이야. 여기가 끝이라고 난 이런 사람이라고 못 박으며 자신을 작은방에 가두고 살면서 자책만 한다면 짧은 생이 허무하겠지. 내 삶에 새롭게 다가와 줄 소중한 일들과 사람들을 삶이 끝나는 날까지 기대하고 싶어

.

영화 속의 주인공이 결벽증 때문에 늘 닦아내야 하는 손잡이를 무심히 돌리는 통쾌한 장면처럼 회색빛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 날이 있을 거야. 우리가 이미 핑크빛 젊음을 한참 지나왔지만 말이야. 인디언 핑크빛도 핑크잖아? 지나치게 밝아서 위태로운 색이 아니고 그늘진 어둠이 내려서 무게감이 생긴 핑크는 얼마든지 충분히 아름다워.


남은 삶을 올드하지만 꾹꾹 채워서 잘 살아보자. 현정아!

오클랜드로 언젠가 날아갈게. 네가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 살 때만 가봤잖아. 새롭게 장만한 너의 첫 집 오클랜드 아파트에서 도란도란 밤새 얘기하고 싶다. 차가운 초록빛 미도리에 얼음을 띄워 마시면서 말이야. 그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우린 잔을 부딪히겠지?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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